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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없는 그 자리
이혜경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평점 :
소설을 쓰는 작가치고 세상일을 물 흐르는 듯 관조하며 눈 지긋이 감고 바라보는 사람이 있을까? 오히려 그 반대일 것이다. 그런데 이 작가에 대해서만은 그 생각을 잠시 잊게 했던 이유는 아마 '이 혜 경'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옆집 친구 같은 이름과, 이름에 한치 뒤지지 않는 평범하고 조용해보이는 인상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이전에 <길 위의 집>, <꽃 그늘 아래> 등을 읽은 후 왜 이 작가의 이름을 다른 어떤 작가와도 다른 대열에 놓게 되었는지, 오랜 만에 낸 이번 소설 <너 없는 그 자리>를 읽으며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아홉 편의 단편 모두 뒤통수를 치는 결말이다.
<너 없는 그 자리>에서 여자가 혼잣말하듯 조근조근 이야기하던 상대의 정체, <한갓되이 풀잎만>의 배신당하고 배신하는 이야기, <북촌>의 고즈넉함 속에서 일어나는 고즈넉하지 않은 이야기, 발리섬을 배경으로 하여 이국적인 느낌이 나는 <그리고, 축제>는 어릴 때 당한 폭행의 기억은 언제 어떻게 치고 들어올지 모른다는 것을 주인공뿐 아니라 등장하는 다른 나라, 다른 사람의 삶을 통해서도 보여준다. 개인적인 사건과 사회적인 사건이 한 이야기 속에 잘 맞물려 있다. 그것이 축제가 되었든 용서를 비는 의식이 되었든 한바탕 살풀이를 거쳐야 겨우 진정되는 것은 그냥은 좀처럼 잊혀지고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겠지. 몇 년 전에 작가가 인도네시아에서 머무른 적 있다고 하는데 그때 수집한 글감을 바탕으로 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감히 핀 꽃>을 읽으면서는 작가는 도대체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해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감히 해보기도 했다. <금빛 날개>는 아마도 작가가 후기에서 밝힌 이시형 박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을까? 자식의 죽음을 목전에서 지나친 아비의 업보는 무엇이란 말인지. <꿈길 밖에 길이 없어>의 남자 갑선은 정상일때보다 비정상일때 더 행복했다. 회복이 된 후 그가 외치는 말이 '나는 왜 미쳐지지도 않느냐'는, 속울음 담긴 한마디였던 것을 보면. <검은 강구>에서 작가의 이야기를 지어내는 방식은 특히 더 돋보인다. 새고려신문사와 교민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연변의 고려인들을 취재하여 태어난 작품같은데 토끼반도, 여우나라, 흑곰제국등의 비유도 탁월하고 여운을 남기는 마무리도 좋았다. <해풍이 솔바람을 만났을때>에서의 복수, 역시 제대로 독자의 뒷통수를 치는 이야기이다. 기분 나쁜 일격이 아니라 감탄이 나오는 일격이랄까. 인터넷이 우리 생활 속에 깊이 파고들면서 인터넷을 통한 재택근무가 많아지고 있는 사회 현상이 반영되어 있었는데 비슷한 나의 상황이 연상되어 더 관심있게 읽은 이야기이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여기 저기 문예지에 발표했던 작품들이 모여 낸 오랜만의 이 소설집은 오랜 만에 나온 보상을 제대로 해주었다. 작품 속에 그때 그때 사회적 현상과 이슈를 담으려고 한 노력도 엿보인다. 치밀한 작가이다.
누구는 소설보다 현실이 더 기막히고 처절한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여기 실린 이야기들은 현실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봐야 하는가.
소설을 읽는 이유중의 하나는, 읽는 동안의 재미외에도, 그보다 더한 현실에 대한 예방주사, 마음의 준비의 차원에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