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조각 번역물이 아니고 내 이름자 들어가는 단행본 번역의 기회가 주어질 것인가, 어제 출판사의 연락 받고 오늘 갔다가, 결국 어정쩡한 답변만 듣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아오고 있는 길. 나도 모르게 그 발걸음은 내 집이 아닌, 얼마 전 나은경으로부터 알아낸 계현의 집 주소로 향하고 있었다. 그냥, 은경으로부터 들은 그런 모습의 계현이가 머릿속에서 얼른 그려지지가 않기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할까. 아니, 이것도 핑계일지 모른다. 그냥, 내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었다고 하자.
지금 만약 다시 만나면 어떤 느낌일까. 계현이는 나를 기억할까? 그것과 함께 궁금했던 것은, 지금 이렇게 별 볼일 없이 살고 있는 나를 보면 그녀는 무어라 할까.
아파트 단위의 주거 형태는 집 찾기를 수월하게 해준다. 그녀의 아파트는 버스 정류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101동, 102동...저기다 103동. 갑자기 빨라지는 발걸음. 출판사에서 나올 때 발걸음보다 오히려 힘이 실어졌다. 1층 그녀의 집을 기웃기웃했다. 그 옛날 그녀의 집 대문 밖에서 그랬던 것처럼. 열 몇 살 적 어느 시기, 그녀의 인생을 기웃기웃 했던 것처럼.
그러면서 조금 있노라니 가방을 멘 한 꼬마 아이가 그 아파트 입구로 쪼르르 들어가더니 초인종을 누르는 것이 보였다. 금방 문이 열리면서 그 아이를 맞이하느라 나온 한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다 박계현. 문을 열고 아이를 들이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웃는 모습 어딘가에 예전의 그 날카롭던 인상이 남아있는 듯도 하고 아닌 것도 같았다. 시선을 고정한 채 그 자리에 서 있던 그 몇 분. 머릿속에 내 멋대로 짓고 있던 시나리오 뭉치가 바람 속으로 날아가는 소리를 들었다. 퍼드덕.
여기 저기 흩어져 시야에서 멀어지는 것을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바라만 보고 있는 자신을 느끼고 있었다.
“너랑 이렇게 다시 연락이 될 줄 누가 알았겠니. 그것도 계현이 때문에.”
그 후 다시 통화하면서 은경이가 하는 말을 그냥 흘려들을 뻔했다.
“계현이 때문에 연락이 된 게 뭐 안 될 거라도 있니?”
“그게......”
은경이가 얼른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가 나에게 되물었다.
“나영이 너 계현이 소식이 왜 갑자기 궁금해졌는데?”
“얘기했잖아. 신문에서 우연히 이름이 똑같은 다른 사람 기사를 보고 생각났다고.”
“그날, 내가 뒤에서 봤어…….”
은경이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쓰레기 버리고 교실로 돌아가다가 네가 가던 길을 멈추고 봉투에서 그림들을 꺼내보는 걸 봤어. 네 표정이 이상하기에 나도 금방 아는 척을 못하고 좀 떨어져서 네가 뭘 하나 보고 있었지…….”
아, 그렇구나. 본 사람이 있었어.
“계현이가 그림 그릴 때 나도 옆에서 봤기 때문에 멀리서도 네가 봉투에서 꺼내는 그림이 계현이 그림인 걸 알겠더라고.”
“......”
얼굴이 화끈거렸다. 직접 얼굴을 보지 않고 전화로 듣는다는 것이 그나마 얼마나 다행인가.
“그리고……, 담임선생님에게 방금 눈으로 본 것을 말씀드렸어. 알려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어.”
전화기를 내려놓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이런 일이 있었다니. 그러니까 담임선생님은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고 계셨던 거다.
“나영아, 계현이네 집은 그때 부모님이 빚을 많이 지고 빚쟁이들을 피해 거의 도망 다니다시피 하는 중이었대. 그래서 그렇게 전학도 자주 다니던거고. 그런 걸 알고 선생님이 계현이에게 더 잘해주려고 하셨던 모양이야.”
나는 금시초문인 사실들이다. 머리가 띵해졌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컴컴한게 낮인지 밤인지 헛갈릴 정도였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지상의 모든 것을 바삭하게 말려버릴 듯 작렬하던 햇살이, 이번 주가 시작되면서 거짓말처럼 한풀 꺾였다.
일의 진도는 그럭저럭.
집중이 잘 안될 때에는 오히려 일거리를 들고 TV앞에 앉았다. 하던 일 팽개치고 뛰쳐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하다 막히면 고개 들어 TV 잠시 쳐다보고, 다시 일로 돌아오고, 그러다 다시 TV 한번 쳐다보기를 반복하며 어쨌든 진득하니 앉아 있어 보자는 전략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 나의 남은 인생은 이렇게 반복만으로 채워질 것인가. 무한반복으로?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면 시선은 책상위도 아니고, 앞의 TV도 아닌 곳, 아무 곳도 아닌 공간을 맴돌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 혹은 하지 않는 것. 다 소용없을지 모른다. 어차피 짜인 시나리오란 없는 것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