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도
윤영수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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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갈 집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십 오륙년 전 낯선 남의 나라에 머물 때,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동네를 한바퀴 돌라치면 불빛이 은은하게 스며나오는 다른 집 창으로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가곤 했다. 갖은 갈등 속에 부대끼다가 떠나온 집이었으면서, 저런 따뜻하고 은은한 불빛같은 가정을 나도 꾸려볼 수 있을까, 꾸려보고 싶다, 그런 날이 과연 올까, 온다면 얼마나 많은 산과 물을 넘어서 올 것인가...그런 여러 가지 상황을 그려보곤 했다. 지금, 따뜻하고 은은한 불빛같지는 않지만 나만의 가정을 꾸리기는 했다. 그때의 간절함과 애뜻함은 어디다 줘버리고, 불평, 불만, 혼자만의 시간이 아쉽다 어쩌구 하는 푸념이나 해대며 살고 있음이여. 모자라는 인간이여.

 

'귀가도'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부터 벌써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르면서 가슴 한켠이 알싸해졌다. 작년 초에 나왔고 저자의 이름이 낯설음에도 불구하고 꼭 읽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책이다. 마흔이 다되어, 단편을 딱 두편 써보고 등단했다는 작가. 하지만 그녀의 글에서 느껴지는 삶의 맛은 쓰고 깊었다. 감히 언급해보자면 오정희 작가의 글과 박완서 작가의 글 분위기가 조금씩 느껴졌다고 해야할까. 희망적, 낙천적, 뭐 이런 것은 절대 아니면서, 힘겹게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버티며 살아가는 인물들에서 오정희 작가의 분위기가, 사회와 인간 심리에 대한 예리한 시선과 풍자에서는 박완서 소설이 떠올려졌다.

모두 여섯 개의 독립적인 이야기들이 이 책 한권으로 묶여 있는데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귀가도 1-철학잉어가 그 첫번째. 참신하고 독창적이다. 귀가도2-도시철도 999가 두번째 글. 저자는 이 작품을 위해 지하철에서 몇 시간을 보내며 듣고 관찰했을까. 귀가도3-아직은 밤 세번째 글. 여기서 '밤'은 물론 해가 지고난 후의 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여자의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서 말라 붙은 눈물 자국이 떠올랐다. 이 작가가 보는 세상을 이때부터 나도 함께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애정 또는 미움 그런 것이 아니라 연민, 애처로움. 그래도 한번 살아볼 세상이라기 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질게 살아내는 세상. 살아갈수록 두 손에 쥐어지는 것이 점차 생겨가는 것이 아니라, 뭘 준게 있다고 가진 것 조차 하나하나 앗아가느냐 따져 묻고 싶은 세상, 그런 것 말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는 김이설의 소설 주인공들을 떠올릴 수도 있겠으나 분위기는 다르다. 매우 다르다. 독자로 하여금 끌어내는 정서가 다르다.  이 작가의 경우 좀 더 절제되어 있고 간접적 묘사라고 할까. 네번째 이야기 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제목만큼 특이한 내용이다. 어떻게 이런 스토리를 생각해내었을까 감탄했다. 다섯번째 이야기 떠나지 말아요 오동나무 마무리 문장을 보면 작가를 또한번 보게 된다. 이렇게 마무리하는 작가의 시선을 다시 헤아려 보게 한다. 알아들을 사람만 알아들으라는 배짱이 느껴질망정, 한문장, 한구절 더 보태어 독자에게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작의 작가가 아니지만 눈여겨 봐야할 작가임을 확인하게 한다. 마지막 이야기 바닷속의 거대한 산맥 여주인공의 자존감, 꼿꼿함에서 우리는 그동안 잊고 살던 우리의 자존감을 조우할 기회를 맞는다.

주인공이 아닌 주변인물들의 질펀한 대화에서 느껴지는 '포기 반, 유머 반'의 정서. 거기다가 내가 좋아하는 사투리 억양까지.

"반백년 살아보고도 몰러? 눈먼 돈이 굴러다니남?"

"가을 소나기가 오지기도 허다, 주차장 입구는 시방 헤엄치게 생겼어."
"비 오면 누님은 좋지 뭐, 하루 일 젖히고."

"젖히기는? 올라믄 아침 일찍 일하기 전버텀 와야지, 일 다 끝내고 뒷북치는게 좋아? 내일 일만 두 배여." (235쪽)

"사주 얘긴 끄내덜 말어. 나는 정경부인 팔자라고 혔어. 정경부인이 새벽부터 차 닦어." (243쪽)

제목에서처럼, 산이 산맥이 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다만 곁에 있어주기. 그 덕에 산은 산맥이 되어 세월을 버틴다. (243쪽)

 

나는 왜 이렇게 사투리가 정겹고 좋을까.

매일 돌아가는 집이 있고, 태어나서 한 평생 누리다가 돌아가는 집도 있다. 누구나 집으로 돌아간다. 집으로 돌아가며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비슷하다. '바닷속의 거대한 산맥'에 나오는 인물, 은주의 대사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결혼하면 저녁은 꼭 남편하고 먹을 거야. 저녁뿐 아니야. 하루 세 끼 내내 같이 먹을 거야. 남편한테 딱 붙어서 절대 안 떨어질 거야. 커피에 물 한 컵도 나 혼자서 절대 안 마실 거야.(245쪽)

철도기관사였던 아빠는 이 여자가 일곱살때 트럭에 받혀 죽었고, 원래 두 번 시집갈 팔자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녔던 엄마는 그 후 두 딸과 함께 쫓겨나다시피 하여 무작정 상경. 열 다섯 살 많은 영감과 살림을 꾸리며 두 딸을 독립시켰는데 그때 여자의 나이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그래도 엄마를 미워하지 않고 늘 엄마 얘기를 하는 이 여자. 우리 엄마는 항상 신나게 웃어서 좋다며, 나보고도 슬퍼도 웃으면 복을 받게 되어 있다고 엄마가 그랬다는 여자. 그러니까 이 여자의 웃음은 모두 눈물이고 외로움이었다.

 

첫페이지 첫문장을 베껴 써보고 싶은 작품이 있는가 하면 이 책 속의 작품들처럼 마지막 문장을 옮겨 적어보고 싶은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가게 안은 밥 냄새에 찌개 냄새로 가득 찼지만, 게다가 덩치 큰 그녀가 뛰는 바람에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가 장난이 아니지만 나는 그대로 꼼짝 않고 온돌 위에서 몸을 옹크린다. 그녀의 겅중거리느 모습을 조금 더 지켜보아도 될 것이다. 사람의 체온이 없는 문밖은 어둡고 춥고 쓸쓸하다. (248쪽)

 

마지막 작품, 마지막 구절이다. 겉멋의 흔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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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2-06-08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뜻하게 지낼 보금자리는
참 좋은 사랑이 감도는 쉼터라고 느껴요

hnine 2012-06-08 17:40   좋아요 0 | URL
따뜻한 보금자리로서의 쉼터가 저절로 생기지 않더라고요. 가족 구성원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겠지요. 요즘 그런 가정이 몇이나 될까 싶기도 하고요. 그래서 갈수록 여기 저기 건물마다 카페가 성업중인가 싶기도 하고...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