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전 -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소설이다
강제윤 지음, 박진강 그림 / 호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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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이땅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고 있지만 다 읽고 보니 이 책은 그보다 더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책이다. 사람사는 땅을 내 두 발로 걷는다는 행위. 때로는 터벅터벅, 때로는 꾹꾹 눌러 밟으며 이 땅을 걸어다니며 만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어찌 무덤덤하게 느껴질 수 있겠는가.

우선 저자의 이력이 평범하지 않아보인다. 1988년 등단. 민주화 운동으로 옥고를 치루고 인권활동가로 살았으며 보길도 귀향 시절엔 33일간 단식으로 숲과 하천의 파괴를 반대하였다. 한국의 모든 섬을 걷겠다는 작심아래 여섯 해 동안 250여 개 섬을 걸었고 난개발로 사라져 가는 섬들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그가 닿은 섬들. 때로는 인적없는 길을 세시간 동안 걸어가 이른 마을에 젊은이는 없었다. 허리 구부러지고 주름꽃이 얼굴을 뒤덮은 할머니들뿐. 아마 그래서 이 책을 기획하게 되지 않았을까? 그가 섬을 다니며 만난 사람들은 우리 어머니 세대이고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한때 우리의 시대를, 우리의 삶을 풀어내는 것일테니까.

사실 나의 어머니도 올해 칠순이 넘으셨지만 이 책에서 저자가 만난 분들은 내 어머니보다는 이미 세상을 뜨신 내 할머니 세대에 가깝다. 이 책을 읽으며 어릴 때 부터 한집에 사시며 나와 동생들을 키워주신 내 할머니, 그리고 나의 아버지와 할머니와 한 고향 출신으로 우리 집에서 일을 도와주시던 아주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엄마에게 못하는 얘기도 이 아주머니에게는 할 수 있었고 언제나 잘 들어주시던 분이었는데. 할머니는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 돌아가셨고, 십년 넘게 한집에서 식구처럼 지내시던 그 아주머니 역시 몇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언제 본 적도 없고 다시 볼 일도 없을 나그네(저자)의 방문에도 그냥 돌려보내지 않으려는 할머님들의 마음은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는 새에 말을, 행동을 지배하고 있는 모성본능 아닐까. 누군가의 아들이니 내 아들 같기도 하여 배 곯지 않는지 그것부터 염려하는.

"얼른 잡수고 가시오. 객지서 오셨는디 드릴 것도 없고, 맘이 짠하요."
아주머니는 난생처음 본 나그네지만 집에 들렀으니 뭐라도 대접하고 싶었던 게다.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넙죽 받아먹는다. 평생 다시 마주칠 일 없을 나그네한테 베푸는 마음이란, 대체 어떤 마음일까. 달고 붉은 감. 목으로 넘어가는 것은 감이 아니다. 어미의 마음이다. (105쪽)

 

"할머니, 선착장까지는 얼마나 가야하나요"
"멀어, 이 밤중에 거기를 어찌 갈려고."
할머니는 나그네의 소매를 붙든다.

"빵이나 하나 먹고 가."

할머니는 구멍가게 주인이다.

"돈 안 받을 테니까. 먹고 가. 거기까지 갈려면 배고파서 안 돼."

할머니는 걸망을 맨 나그네가 안쓰러워 보였나 보다. (107쪽)

 

이 책엔 이런 대목이 이 외에도 여러 군데서 나온다. 그럼에도 그때마다 나는 페이지를 그냥 넘기지 못한다. 그 나그네의 마음이 되기도 하고, 할머니의 마음이 되기도 한다.  내 할머니 생각이 나고, 고향에 두고 온 막내 아들 생각을 하며 눈물 짓던 아주머니 생각이 났다. 특히 책에 그분들과 동향인 할머니들이 나오면 비슷한 말투를 따라 읽으며 마음이 뭉클해진다. 행정구역 상 서산에 속하는, 그 당시만 해도 작았던 섬이 고향인 할머니께서 굴 따는 얘기, 김 양식 하시던 얘기, 나는 머리 속으로 상상을 하며 들었더랬다.

오랜 만에 뭍으로 여행이라도 다녀오게 되면 제일 좋은게 뭐냐는 저자의 물음에, 남이 해 준 밥 먹고 일을 쉬고 놀 수 있었던 것이 제일 좋다고 하시는 할머니. 경치 구경보다 그것이 좋았다. 할아버지 앞서 세상을 뜨시고 자식들 모두 자기 가정을 꾸려 떠나보낸 후, 이렇게 남의 자식 (저자)이 와도 그냥 맘이 설렌다는 할머니. 대문을 들어섰다가 인기척 없어 빈 집인 줄 알고 돌아나오는 저자의 등 뒤에서 "가지 마시오. 나는 사람 구경 못 하고 사요. 어서 들어오시오."라고 불러 세우셨다는 안마도의 할머니는 지금도 그렇게 사람을 기다리며 살고 계실까? 그래도 자식이 있으니 전화도 해주고 그러지, 늙어서 외롭지 않으려면 꼭 자식을 가지라고 저자에게 거듭 당부하셨다는데, 자식을 열둘이나 나은 할머니 당신은 외롭지 않으시냐고 속으로 물음을 삼키며 돌아나왔단다.

할머니 성함이 어떻게 되시냐고 묻자 성도 이름도 없이, 그저 누구 어메라 불리며 산다시던 할머니께서, 인사 드리고 돌아나오는 저자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 "나 이름은 윤필순이요."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하지만 외롭게 섬을 지키고 사시는 분들이라고 약하게 봐서는 안된다. 고난과 외로움, 설움을 이겨내신 그분들의 삶에 대해 단련된 모습, 삶의 고수가 다 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배우라.

제주의 해녀 할머니들은 그 강인함이 비장의 무기 수준이다. 장성한 아들, 며느리와 한집에 사는 경우에도 아예 안채, 바깥채 구분하여 살림도 따로 하고 산다는 앗살함. 집에서는 답답한데 바다에 나오면 시원하다시며 아흔의 연세에도 물질을 멈추지 않으신다고 한다.

한 평생, 산다는게 무언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그렇게 살아내어 이르게 되는 곳은 어디인가. 또 이런 속절없는 생각에 빠지려고 하는때 한 할머니의 말씀이 떠오른다.

"여자들은 철들면 시집가는데 사내들은 철들면 죽어 뿌러!"

쓸데 없는 생각으로 들어가는 순간을 와르르 무너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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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2-05-27 0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철들며 죽고 싶지는 않아요 ^^;;;
철들며 신나게 이 삶을 누려야지요 ^^;;;;;;

며칠 앞서
시골마을 이웃 할머님들과
마늘밭에서 함께 마늘일을 하면서
참 좋았어요.

hnine 2012-05-27 13:27   좋아요 0 | URL
그럼요, 물론이지요 ^^
전 요즘 '누린다'는 말이 참 좋더라고요. 참고 견딘다는 말보다 현재를 누리며 사는 것은 꼭 어떤 물질적인 조건이 갖춰져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덕분에 좋은 책 알게 되어 잘 읽었습니다.

하늘바람 2012-05-27 0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남자가 과연 철이 들까 하고있는데 된장님 댓글 보고 웃네요^^

hnine 2012-05-27 13:28   좋아요 0 | URL
ㅋㅋ 남자들을 한꺼번에 몰아서 얘기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그 말씀 하시는 할머니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짐작은 할 수 있어요.

노이에자이트 2012-05-27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자들은 철들면 시집간다...그러나 노처녀들이 많아지고 있는 걸 보면 여자들도 철이 안 드나봅니다.

hnine 2012-05-28 07:43   좋아요 0 | URL
ㅋㅋ 요즘은 철 드는 방법이 다 각각이라고 해야겠지요. 어떤 게 철드는것인지 저도 한마디로 얘기 못하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