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에 일어나 씻고 아침 식사 준비 하고 책상에 앉아 제일 먼저 한 일은 영화를 본 일이다.
세상의 모든 계절. 원제는 Another year.
2010년에 나온 영국 영화이다. 다른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과 헛갈리는 제목인데 영화가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시간 순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만든 제목인가보다.
낯익은 두 여배우 얼굴. 마이크 리 (Mike Leigh)라는 감독 이름도 낯익지만 영화를 보기 시작할 때는 어디서 봤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영화를 보면서 예전에, 기분으로 치면 수십년 전에 본 것 같은 영화 'Secrets and Lies (비밀과 거짓말)'와 어딘가 비슷한 분위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서 기억이 났다. '아! 거기 나왔던 그 여배우구나. 엄마 역으로 나왔던...' 그러고 보니 감독도 그 영화를 만든 그 감독이네! 나의 기억력이 아닌, 느낌, 기분이라는 놈이 알아냈다.
병원에서 심리상담사로 일하는 여주인공 Gerry가 한 환자에게 이것 저것 질문하는 장면이 초반에 나온다. 이 환자는 단지 밤에 잠이 잘 안와서 수면제나 처방해주었으면 하지만 병원의 의사와 상담사는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고 근본적인 치료를 권하여 이것 저것 묻지만 이 여자환자는 거의 '모른다', '기억 안난다'라는 짧은 답으로 대화를 거부. 당신은 지금 당신도 의식하지 못하지만 화가 나있고 (anxious) 우울하다고 (depressed)말해주지만 그것에 대해서도 환자는 묵묵부답.
감독이 영화의 첫장면으로 이것을 택한 의도는 무엇일까?
Gerry의 남편 Tom (발음만으로 보면 톰과 제리이다 ^^)은 자칭 지질학자. Joe라는 장성한 아들 하나를 두고 있는 이 부부의 사이는 비교적 좋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더 주목해야할 사람은 Gerry의 직장 동료인 Mary. 가족 없이 혼자 사는 그녀는 Gerry의 집을 가끔 방문하여 함께 식사를 하고 자기 얘기를 하는 낙에 사는, 외롭고 불안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 여자이다. 어느 날 Mary가 Gerry 집을 방문해있는 동안 Gerry의 아들 Joe가 여자친구를 데려오면서 Mary는 자기 감정을 숨기지 못한채 말과 행동을 함으로써 잠시 Gerry와 어색한 사이가 된다. 은퇴후 먹는 것과 술, 담배로 외로움을 달래며 사는 남자 Ken,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음에도 아내가 죽고 나자 정신적 마비 상태가 온 것 같은 Tom의 형 Ronnie 의 모습에서도 우리는 나이들어가는 삶의 한 모습을 본다.
129분 내내 영화를 보는 것 같지 않고, 투명인간이 되어 이웃의 삶을 들여다보이는 것 같을 정도로 배우들의 연기가 뛰어났다. 그들은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 속 인물로 살고 있었다.
저 말투, 저 표정, 저 거리...어느 새 나도 그 영화 속에 들어가 Gerry가 되었다가 Mary가 되었다가 다시 나로 돌아왔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마지막 장면까지 Mary의 그 외롭고 불안하고 굶주린 (정에) 눈길과 표정이 오래 남을 것 같다.
숨막히는 사건과 빈틈없는 대사 중심이 아닌, 인물들의 심리 상태를 무심한듯 별것 아닌 평범한 일상을 통해 보여주려고 한 감독의 고단수가 느껴진다.
이 영화를 보고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Mary같은 노년이기보다는 Gerry같은 노년이면 좋겠는데.
쓸쓸하지만, 인생이라는 그 겹겹의 껍질을 한겹 더 벗겨본 것 같은 여운을 주는 영화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