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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는 당나귀답게 ㅣ 마음이 자라는 나무 4
아지즈 네신 지음, 이종균 그림, 이난아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5년 4월
평점 :
우화 하면 어릴 때 읽은 이솝 이야기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그때는 동물들이 많이 나오는 이솝 이야기보다는 사람들이 나오는 명작 동화를 더 좋아했었다. 지금도 동물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의인화 작품에 그리 끌리지는 않는다. 동물들이 등장하는 우화집, 한번도 제목을 들어본 적이 없는 이 책을 읽어보기로 한 것은 지인의 소개말을 듣고 나서이다.
작가 아지즈 네신은 터키 사람이지만 터키 뿐 아니라 세계 각국 28개어로 번역되어 소개되었을 만큼 많이 알려져 있는 작가이다.
그가 남긴 우화 중 우리 나라 정서에 맞을만한 것 열 네 편을 골라서 이 책을 엮었다고 한다. 역자는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을 번역한 이 난아 님.
이 책의 제목이 되기도 한 '당나귀는 당나귀답게' 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나라의 서커스 단장이 당나귀를 훈련시켜 사람이 하는 말을 할 수 있게 하자 그 당나귀를 구경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이 당나귀는 비싼 값에 팔렸다. 그러자 너도 나도 당나귀에게 사람 말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사람 말을 할 줄 알게 된 당나귀 숫자가 늘어나니 사람들은 더 이상 말을 하는 당나귀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된다. 그래서 이번엔 사람에게 당나귀처럼 울게 훈련시켜 볼거리를 만들고 큰 돈을 벌게 된다. 그 결과 사람 말을 하게 된 당나귀는 더 이상 당나귀처럼 행동하지 않게 되고, 당나귀처럼 울게 된 사람들은 사람 구실을 못하게 됨으로써 이 나라는 일대 혼란이 벌어진다. 농작물은 썩어가고 질병이 돌았으며 가난과 흉년이 왔다. 이유를 알기 위해 지혜로운 사람에게 의견을 구하자 그가 말하길 사람이 사람의 일을 하고 당나귀가 당나귀의 일을 하도록 하라고, 자기 본분에 맡는 일을 더 훌륭하게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이끌어 주라고 한다. 그 날 이후 그 나라에서는 사람들은 사람답게 말하고 당나귀들은 당나귀답게 짐을 운반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모든 존재들이 자신의 역할을 더 잘 하려 애쓰게 되었다.
사실 내가 이 책을 읽기로 한 것은 이 책 중에 있는 '바위 밑과 바위 앞'이라는 이야기를 읽기 위해서였다. '바위 밑'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이 있었다. 그 마을의 집들은 거대한 바위 밑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그 거대한 바위는 이 마을의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이 마을에서는 해가 뜨는 것을 볼 수 없었다. 다른 마을에 아침이 오고 오후가 될 무렵에야 바위를 넘어온 해를 겨우 볼 수 있었다. 이 마을에 영리한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검은 바위의 다른 쪽은 햇빛 가득한 밝은 세상이라는 말을 듣고 그곳을 가보기로 한다. 친구들과 함께 가본 바위 앞 세상은 과연 듣던 대로 대낮같이 환한 것을 보고 마을로 돌아와 어른들에게 그곳으로 이사하자고 제안하지만 어른들은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그냥 살던대로 살자고 한다. 어느 날 이 마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떠돌이중이 나타나서는 자기에게 대접을 잘 하면 검은 바위 그늘로부터 해방시켜 준다고 한다. 바위 밑 마을 사람들은 그 말을 믿고 이 중에게 깍듯이 대접을 하지만 나중에 결국 그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영리한 사내아이는 그렇게 될 것을 이미 알고 어른들에게 얘기를 했지만 아이의 말이라는 이유로, 또한 익숙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마땅치 않다며 어른들은 계속 묵살할 뿐이다. 떠돌이중에게 속은 후, 끈질기게 어른들을 설득한 아이의 의견대로 결국 마을 사람들은 바위 너머로 이사를 하여 새로운 마을을 만들고, 마을의 이름을 '바위 앞'이라고 부른다는 이야기이다. 사람이 한번 무엇에 익숙해지면 그 익숙함 자체가 하나의 속박이 되어 더 이상의 변화와 발전을 가로막게 된다. 차라리 정체도 모르는 존재를 숭배하고 그의 말을 믿을지언정 스스로 행동하여 변화를 향해 나아가기를 거부하고 있다.
우화가 무엇인지, 어떤 여운과 메시지를 남기는지 이 책은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책의 뒷장을 보니 2005년에 1쇄를 찍은 후 올해 22쇄가 나왔는데 이런 책이 어떻게 나에게는 제목도 생소했는지 모르겠다. 1995년에 세상을 떠난 저자의 유언에 따라 고아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기 위해 네신 재단이 만들어져 지금도 운영되고 있다. 저자 자신이 몹시 가난하고 불우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문제아가 되지 않았던 것은 부모님의 따스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자신도 고아들에게 그런 부모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그는 그의 작품뿐 아니라 그가 보인 행동으로 인해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세상을 뜬 후에도 여전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