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에서 10까지 사랑의 편지 ㅣ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4
수지 모건스턴 지음, 이정임 옮김 / 비룡소 / 2002년 4월
평점 :
절판
누가 이 책이 어떻냐고 물어보면 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수지 모건스턴이야."
그것으로 대답은 충분하다.
그녀의 90여편의 작품 중 내가 읽은 것은 열 편 정도에 불과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그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작품은 지루하지 않다. 남들이 다루지 않은 소재를 다룬 것들이 많다. 재치가 있다. 어둡지 않다.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는 감동을 남긴다. 메시지가 있다. 무엇보다도 인간을 보는 눈이 따뜻하다.
열한 살 남자 아이 어네스트는 엄마 아빠 얼굴도 모르고 여든 살 할머니와 함께 산다. 엄마는 어네스트를 낳고 바로 돌아가시고 아빠는 그 이후 집을 나가버렸다. 할머니에게도 이 일은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할머니는 웃음을 잃고 말을 잃고 사람과의 교류도 잃었다. 집 안에만 있으면서 과거를 떠올리고 그리워하며 있는 듯 없는 듯 숨만 쉬며 지낼 뿐이다. 이런 할머니를 보면서 어네스트는 열 한 살이 되도록 사람을 사귀는 것도, 대화를 나눈다는 것도 모르며 조용히 자기가 할 일만 한다. 그렇다고 자신을 비참하게 생각하거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말썽만 피우거나, 아니면 모든 일에 심드렁하여 의욕이 없거나, 그런 아이도 아니다. 학교에서는 모범생이고 할머니를 가엾게 여길 줄도 않다.
그러다가 어네스트의 학교에 빅투와르라는 여자 아이가 전학을 오게 되면서 모든 것이 달라진다. 어네스트를 좋아하고 자기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며 행동으로 보여주는 아이. 심지어는 어네스트와 몇년 몇 개월 후에 결혼할거라고 말하고 다니는 천진난만한 아이.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어네스트와 달리 열 세명의 형제를 두고 있어 늘 복닥이는 환경에서 자라온 아이.
꾸밈없고 발랄, 경쾌한 소녀 빅투와르에 의해 어네스트는 점차 다른 사람과 말을 주고 받고, 더 나아가 마음을 주고 받는 것을 배워간다. 매일 같은 사람과 같은 메뉴의 식사를 하고,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말만 몇 마디 오고 가는 단절된 세상에서 살던 어네스트에게 그것은 새로운 세상으로 안내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네스트는 변한다. 어네스트의 할머니도 변한다.
이 작품은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사람을 변하게 만드는지,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것,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준다.
내게도 어느 날 빅투아르라는 이름의 천사가 나타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그러다가 이 세상에 빅투아르 같은 천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왜 누군가에게 빅투아르가 되어주지 못하나 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마지막 책장을 덮는데 마음이 따뜻하게 데워져 있음을 느낀다. 표정도 분명 책을 읽기 이전보다 훨씬 밝아져 있을 것이다. 이 책이 잠시 동안이나마 나에게 빅투아르가 되어 준 것이다!
그러니까 수지 모건스턴이다. 언제부터인가 나에게 위로이고 비타민이고 어깨를 토닥이는 손이고 힘들 때 마시는 녹차라떼가 되어주고 있는, 수지 모건스턴인 것이다.
고맙고 또 부러운 작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