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
강영숙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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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영. 숙. 평범하기 그지 없는, 그래서 한번 듣고 지나칠 수도 있을 이름.
강원도 춘천 생. 1998년 서울신문 신춘 문예로 등단하여 2006년에는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런 소설가도 있었구나 하며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에는 2004년부터 2008년까지 각종 문예지에 실렸던 그녀의 단편이 총 아홉 편 수록되어 있다.
그 중 첫 작품은 '친애하는 M씨 보세요' 로 시작하는, 내가 좋아하는 편지글  형식의 <스쿠터 활용법>. 이 중에 화자가 편지의 대상에게 하는 '난 정말 괜찮은 걸까요?' 라는 물음을 이 리뷰의 제목으로 삼았다.
어릴 때부터 피붙이보다 더 '믿는 구석'이 되어 주던 '그'에 대한 이야기, <안토니오 신부님>에서 '그'는 주인공 여자가 어릴 때에는 동네의 또래 친구였고 성장하여 신부로 사제 서품을 받은 후에는 친구로서, 여자가 인생의 바닥을 칠 때마다 옆에서 함께 해주어 온 사람이다. 주인공 여자가 화자가 되어 그를 그리며 쓴 글인데 따뜻함과 쓸쓸함이 글 속에서 뚝뚝 묻어져 나온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이 작가의 글에 몰입되어가기 시작한 것 같다.
다음 작품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는 이 책의 제목이 되기도 했는데, 바다를 쓰레기로 메워 만든 매립지에 덜렁 세워진 고층 아파트.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주인공 '령'에게 유일하게 남은 것이라고는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그 아파트 한 채이다. 거기서 그녀는 매일 바다를 꿈꾼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그 자리의 이전 상태를 꿈꾸는 주인공. 즉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세계를 꿈꾸는 인물의 분열적 정서가 불안하기도 하지만 우리들의 감춰진 모습의 어느 한 자락을 엿보는 듯 하다. 이 주인공 이름이 다음 작품의 제목 <령>으로 다시 등장한다. 안풀리는 상황 속에서 삶을 버텨나가는 령은 어느 날 선거 유세장에서 대학때 친구 J를 오랜만에 재회하게 되어 반가와 하지만 그 만남이 바라는대로 계속 이어져가지 않게 되자 원망과 애증이 쌓여 마침내 그를 향해 칼을 찔러넣게 되는데, 칼을 찌른 대상은 J가 아니었고, 령은 곧바로 누군가에 의해 제지당한다는, 역시 우울하고 외로운 인간의 이야기이다.
다음 작품 <천변에 눕다>에 대거 등장하는 온갖 찌질한 인생들을 보며 이 소설, 왜 이리 슬프냐고 혼자 탄식하며 읽었다. 하지만 그런 페이소스 속에 유머가 살아있다면 상상이 되는가. 그야말로 '유머도 있어요, 페이소스도 있어요, 허무도 있어요, 그러면서 생명력이 있어요.' 라고 말하고 싶은 느낌. 이러면서 읽다 보면 어느 새 한 단편의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 있었다.
이혼 하고 딸 둘은 모두 장성한 60대의 나이의 여자가 딸의 소개로 맞선을 보는 이야기 <해안 없는 바다>의 시작은 이 여자가 혼자 가서 영정 사진을 찍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함과 동시에 또 다른 시작을 시도하는 주인공을 통해 작가는, 인간은 자기도 모르는 내면 속에 끝까지 새로운 시작에 대한 한줄기 희망을 놓지 않고 산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까?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남녀 직장 동료 사이의 독특한 관계를 그린 <K에게>의 두 주인공처럼 그렇게 엇갈린 인연들을 우리는 사는 동안 알게 모르게 많이 거쳐가고 겪었겠지.
우울이 실어증으로 나타난 주인공이 나오는 <갈색 눈물방울>에서 그 제목은 이웃에 사는 동남아 여자의 구질구질한 삶을 상징하고 있다.
죽은 가족들을 모두 집으로 초대하여 음식을 차리고 회포를 나누듯이 그들과 못다한 얘기를, 때로는 언쟁을 하며 과거의 아픈 상처를 꺼내 보고 못다푼 한을 풀어보려 한다는, 독특한 구성의 <자이언트의 시대>를 마지막으로 이 책의 아홉 편의 글이 모두 끝이 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의 언덕을 넘으며 그것이 순간이든 아니면 영원으로 이어지든 우울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공통점으로 하고 있다. 표현에 감정이 넘쳐나지 않게 배제되어 있는 듯한 문장들, 체념과 비관과 우울이 전반적인 내용에 스며들어가 있으면서도 읽는 사람을 바닥까지 떨어뜨리지 않고 오히려 작가와 함께 대담해질 수 있게 하는 것은, 주인공들이 바로 삶에 대해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작가 역시 그런 자세로 삶을 보고 있는지도.
우울에 빠질지언정, 그래서 삶에 대한 환멸의 느낌을 가질지언정, 그 삶을 끌고 가는 오기와 생명력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기에 오히려 그래, 어디 끝까지 가보자는 마지막 카드를 손에 꼭 쥐고 살아나가게 하는 힘이 있다.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작가 소개난에서 훑어 보며 어떤 작품을 더 읽어볼까 하고 있는 나는 아마도 또 언젠가 이 작가의 작품들을 시리즈로 계속 읽게 되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참고로 이 책의 제목은 Mark Rothko의 그림과는 아무 상관이 없음을 말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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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0-05-30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도 제목에 빨강이 들어가네요.
궁금한 책이네요

hnine 2010-05-30 08:56   좋아요 0 | URL
예, 얼마전에 읽은 편혜영 작가의 '재와 빨강'이 있었지요.
이 작가도 제가 찜했습니다 ^^

하늘바람 2010-05-30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찜을 받은 작가는 얼마나 좋을까요

hnine 2010-05-30 14:37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님께도 찜할 준비 되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