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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피 ㅣ 민음 경장편 1
김이설 지음 / 민음사 / 2018년 3월
평점 :
품절
수업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가끔 묻는다. A형과 B형, O형, AB형 이렇게 분류되는 피는 과연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하고.
'나쁜 피'. 이 제목에서의 피는 절망적이고 암담한 가족사를 의미하는 것일텐데, 무슨 의미이건 '피'라는 단어는 일단 긴장을 주고 이목을 끈다. 이 소설의 내용을 한 마디로 잘 나타내주고 있지 않나 생각 된다.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 대부분의 등장 인물들이 이렇게 저렇게 혈연으로 얽히고 섥힌 관계이지만 혈연이기 때문에 지켜져야 할 것들이 무참히 깨어지는 패륜이 대를 이어 계속되어 가는 내용으로 말미암아, 읽기 시작하여 마지막 페이지에 이를 때 까지 다른 일에 몰두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건 분명히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어떤 악한 면의 일색인 스토리임에도, 읽어가면서 참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각 등장 인물들에 대해 이유를 알 수 없는 애틋한 감정이 생겨나는 것이다. 동정이라고 해야하나, 측은지심이라고 해야하나. 이유가 무엇일까? 사실 이 소설의 대강의 줄거리를 처음 대했을 때, 혹시 비극적인 가족사를 내세워 읽는 사람에게 충격인지 재미인지 감동인지 모를 그런 애매한 감상만 남겨주는 그런 내용인 것은 아닐까 염려도 했었다. 요즘 워낙 그런 류의, 나같이 평범한 상상력을 지닌 사람에게 지나친 충격외엔 아무것도 주지 않는, 영화나 소설들이 많이 나오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굳이 그런 것을을 읽거나 보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소설의 인물들에게 생기는 이 감정은 무엇이란 말인가. 주인공 화숙 부터 그렇다. 정신 지체인 엄마, 외삼촌의 불륜, 이 남자 저 남자에게 아무 힘 없이 당하는 엄마를 보며 자란 어린 시절 등으로, 상처를 입을 대로 입고, 깊어질 대로 깊어진 사람이다. 자신이 입은 그 상처의 보복으로서 또 하나의 인물인 수연을 대상으로 일부러 고통과 상처를 입히고. 수연의 핏줄인 어린 혜주는 말을 잃는다. 이렇게 나쁜 피, 즉 가족의 운명은 대물림을 하는 것인지.
저자는 이 소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좋든 싫든 운명을 공유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 공유될 수 밖에 없는 '가족' 이라는 것의 의미를 다시 되짚어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21세기가 되어서도 우리는 그 가족이라는 운명공동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라고. 그 관계가 얼마나 끈끈하게 이어져 있든 그렇지 않든 우리가 태어난 이상 핏줄로 얽힌 관계도 함께 탄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다. 여러 인물들이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등장함에도 그 관계들이 잘 얽혀들어가며 이야기가 전개되어 자연스럽게 읽혀질 수 있었던 것은 작가의 노고, 그리고 역량이라고 본다. 인물들의 심리를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면서 읽는 사람이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쓰는 것 역시.
다만, 후반부에서 수연의 연인인 재형이 그동안 수연을 상습적으로 구타해온 것으로 설정한 것과, 수연의 마지막 극단적인 행동은, 그녀의 무기력과 나쁜 운명을 강조하며 마무리 하기 위한 약간의 무리한 설정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내가 문학평론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느낌이다.
책 속의 소개글에 써있기를, '박완서와 이혜경과 신경숙의 뒤를 잇는' 이라고 나와 있는데, 이 세분 작가와는 또 다른 그녀의 분위기가 있다고 생각된다. 한 작품을 읽어보고 나서 말할 수 있는 사항은 아니지만 말이다. 나는 오히려 읽으면서 이 현수 작가의 작품을 자주 떠올렸다. 이 현수 작가의 글 보다는 덜 감상적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글은 아무나 쓰는 것이 아니구나, 즉 쉽게 쓰여지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된 것은 이 소설이 아주 긴 장편은 아님에도 작가가 참 공들여 구성하고 써나갔다는 느낌을 받아서이다.
다음 작품에도 기꺼이 기대를 걸어본다.
(오자 신고: 95쪽 여섯째 줄의 '적인' 은 '적힌'의 잘못된 표기인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