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공책 - 부끄럽고 아름다운
서경옥 지음, 이수지 그림 / 시골생활(도솔)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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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이 넘으신 나의 어머니에게 나도 언젠가 권해본 적이 있다. 당신이 살아오신 얘기를 한번 글로 적어서 남기시면 어떻겠냐고. 맏딸인 나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살아오신 이야기, 그리고 어머니의 어머니, 즉 외할머니 이야기 등을 동생들에 비해 많이 듣고 자랐다. 그저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이야기들이 지금의 나에게로 까지 이어져온다는 느낌 때문이었을까, 어머니가 들려주시는 그런 이야기들은 어떤 옛날 이야기보다도 리얼하고 각별했다.
이 책의 저자는 1946년 생이니 올해 예순 넷 되신 분인데 그 시절 명문이라 할 대학 교육까지 받으셨지만 남편 뒷바라지와 자식 키우는 일에 대부분의 세월을 보내신 분이다. 이 책 한권에 드러나지 않은 많은 사연이 있을 터이나, 누구나 그렇듯이 자신의 단조로운 삶으로 해소되지 않는 아쉬움과 공허함을 메우고자 음악, 미술, 자수 할 것 없이 여러 방면의 배움의 길을 통해 나름의 길을 찾고자 노력해 왔다. 50대 후반에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강원도 봉평으로 거처를 옮기고, 새 집을 짓는 목수 일을 시작한 남편과 함께 자연 속에서 생활하기 시작하면서 이렇게 책을 낼 마음의 여유가 생겨난 것일까. 저자의 어머니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그동안 자신이 배워온 바느질 이야기, 음악 이야기, 시골 생활 이야기, 이웃 이야기 등이  책 제목 밑에 달려있는 말처럼 부끄러운 듯이 조심조심, 하지만 격하지 않은 아름다운 필체로 쓰여져 있다.

"내 생각에 엄마는 주부로서 모든 일을 성취했다고 보는데, 엄마는 왜 주부의 일로 엄마의 세계를 펼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어느 날, 이제는 다 커서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딸이 묻는다.  
"판에 박은 주부의 일상이 나를 지루하게 했던 것 같아.(...) 대학까지 나온 여자에게 가정의 울타리는 감옥이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어. 집안 살림을 하는 데는 대학 교육이 필요 없거든. 나의 세계는 항상 내 주변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했어. (...) 그 욕망을, 허전함을 조금이라도 메워 보려고, 가까이에서 나를 세상 밖으로 끌어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으려고 이거저것 배우고 헤매며 다닌 셈이지. 성취감도 없고, 여전히 '이게 아닌데' 하면서 말이야." 저자는 대답한다. 이어서 대답하기를, 그러다가 어느 날 손주와 숨바꼭질 놀이를 하다가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문득 보면서 깨달았다고 한다. 내가 살고 싶었던 바깥 세상은 나와 동떨어져 있는 바깥이 아니라 바로 이 자리라는 울림을 들었다고. 헤매고 방황하던 '이게 아닌데'가 아니라 '바로 이게 그것' 이라고. 어딘가로 가고 싶었던 곳은 세상 밖이 아니라, 주부로 살며 감당하기 어려웠던 일들, 회피하려는 마음의 표현이 세상 밖으로 사라지고 싶은 욕구로 전이된 것 아닐까 한다고.
책 끝 부분의 이 대목을 읽는 순간 저자의 엄청난 고백을 들은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은 왜일까. 그리고 맘이 그리 편치 않은 이유는. 잔잔하다면 잔잔한 이런 일기 형식의 글을 읽으면서도 쉽게 마음이 흔들리는 나는 아마 저자의 다른 모습에 지나지 않을까, 이런 생각까지 해버렸다. 그러면서 한편, 만약 저자가 나의 어머니라면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었다.
"엄마, 못 이룬 것을 아쉬워하지만 마시고 그동안 이루어 내신 것들도 가끔은 생각해주세요. 엄마는 참으로 훌륭한 삶을 사셨어요." 라고. 그 말이 위로로 들릴지, 아니면 오히려 무심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시골 집에 길을 잃고 찾아든 개를 거두는 심성, 여행 길에 버스를 기다리느라 들른 집의 아이들을 불러 모아 대화를 나누는 모습, 자식을 셋 낳아 하나만 곁에 있다고 표현하는 저자의 속깊음이, 읽는 사람의 마음을 조용히 울리고 지나간다.
그림을 그린 저자의 딸의 홈페이지를 구경해보는 것으로 책 읽기를 마쳤다. 나도 언젠가 이런 '공책'을 만들 수 있을까 상상해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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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9-05-20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멋진 책일거같아요

hnine 2009-05-20 20:59   좋아요 0 | URL
책 구성이 특이해요. 그런데 이 글을 쓰신 분이 많이 절제하시며 쓰셨다는 느낌이 들던데 저만의 느낌인지도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