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게 쓰는 편지 

 

편지가 왔다 남편의 애정이 식었다고, 강물은 무엇 때문에 흐르는지 모르겠다고
오랫동안 쓰지 않던 볼펜으로 답장을 쓴다 이런 거야 사랑이란 물기가 말라버린 볼펜, 아니면 잠시 몸담았던 향수병의 빈 케이스 같은 거
아니다 이건 위로가 아니다 창 밖에 철탑이 웅웅거린다 그래 저것이 좋겠어 끙끙거리며 철탑을 옮겨와 정성껏 포장한다 우뚝 버티고 선 것 같지만 정작 조그만 바람에도 철탑은 얼마나 마음을 떠는지
아니다 이건 위로가 아니다 몇십 년 철탑과 살아온 그녀가 그것을 모를 리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일테면 아직도그녀가 믿고 있는 사랑이라는 종교, 그 교주 머리 위에 확실하게 아우라를 걸어주는
이단의 주문처럼 횡설수설 볼펜심이 지나간다 남편은 오랫동안 신어 낡을 대로 낡은 구두의 뒤축이라고, 그러니 그대여 삐딱걸음을 걸을 수밖에 없는 거라고
쓴다 썼지만 여전히 백지다 나오지 않는 볼펜은 그녀나 나를 위해서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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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색으로 진하게 표시한 것은 내가 한 짓)

 

 

 

 

 

 

  - 태평양을 다리는 세탁소 (천년의 시작, 2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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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9-01-20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기가 말라버린 볼펜
향수병의 빈 케이스
조그만 바람에도 떠는 철탑
낡을대로 낡은 구두의 뒤축

나오지 않는 볼펜이 다행이라는...
아- :)

hnine 2009-01-20 17:31   좋아요 0 | URL
좀...쓸쓸한 시 이지요.

순오기 2009-01-20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책을 소개해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hnine 2009-01-22 16:36   좋아요 0 | URL
이분이 동화 작가이기도 해요. 시를 먼저 알게 된 후에 동화도 몇 권 찾아서 읽었더랬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