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에 올라가면서부터 내 책상은 동생과 함께 쓰던 방에서 아빠의 서재로 옮겨졌다. 서재라고 해서 넓직하고 근사한 그런 서재라기 보다, 아빠의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는 책장 세개가 나란히, 그리고 작은 티 테이블, 아빠 책상, 그리고 오갈 데 없어 어울리지 않게 자리잡은 서랍장, 부엌에 가지 않고도 커피를 끓여 마실 수 있게 전기 포트, 커피, 설탕 등이 한 쪽 구석에 있는, 크지 않은 방이었고, 거기에 내 책상이 또 한 공간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저녁을 먹고 나서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나는 거기 책상에 앉아 책도 읽고 라디오도 듣고, 편지도 쓰고, 라디오 프로그램에 보낼 엽서도 꾸미고, 일기도 쓰며 시간을 보내다보면, 내가 거의 잠자러 서재를 나설 시간쯤 되서야 아빠께서는 들어오셨다. 내가 뭐하고 있나 잠깐 들여다보시고는 늦은 시간이었지만 가끔 음악을 들으셨다. 아 참, 그 방에는 위에 말한 것들 외에도 낡은 턴 테이블과 수백장의 LP판이 책꽂이가 아닌 LP판 전용 꽂이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책장 위에 올려져 있었다. 어떤 날은 클래식을, 어떤 날은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어떤 날은 영화 스타워즈 주제 음악, 아빠의 취향은 그야말로 어느 한 분야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 날도 늦게 오신 아빠께서는 판을 하나 골라서 턴테이블에 올려놓으셨는데, 그때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는 순간 나는 그야말로 꼼짝도 할수가 없었다. 몰입되었다고 해야하나. 아빠를 무척 어려워했기에 이 곡의 제목이 무엇인지, 어떤 느낌이라던지 하는 말은 감히 꺼내지도 못하고, 눈은 그냥 보던 책을 향하고 있었고 고개도 못든채 그냥 안듣는 척 하면서 듣고만 있었다.
슬픔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감정이 밀려와 온 몸을 휩싸고나면, 어느새 그 슬픔의 감정을 서서히 덮치고 솟아오르는 느낌은 숭고함이라고 해야하나, 지금도 나의 부족한 표현력으로는 형언할 방법이 없다. 너무나 아름다운 음악. 금방이라도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아서 참느라 애쓰며 듣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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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8-11-25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윗 글을 읽어서인지 서늘하게, 아릿하게 들려와요. 감수성 여린 시절에 이 음악을 들었다면 그 충격이 쩌릿쩌릿했을 것 같아요. 이 아침에, 아름다운 음악 듣고 갑니다.

무스탕 2008-11-25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도 그렇게, 제 발길을 딱 붙잡은 노래가 있었어요.
정말 길을 가다가 레코드 가게 앞에서 발이 멈춰 버렸는데 노래가 끝나도록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가 노래가 끝난 다음에 들어가서 물어봤지요. 이 곡의 제목이 뭐냐고요.
'브룩크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OST 라고 알려주더군요.
제가 이 영화를 봤거든요? 그런데 영화에서는 들은 기억이 안나는거에요;;
하여간, 그 이후로 브룩크린.. 은 정말 잊혀지지가 않아요.

hnine 2008-11-25 12:25   좋아요 0 | URL
마노아님, 나중에라도 이 음악 들을때에는 처음 듣던 장소, 시기, 그리고 아버지 생각이 함께 날 것 같아요. 좋지요 이 곡? ^^

무스탕님, 그 음악도 참 좋지요. 발이 멈춰 버렸다는 말씀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겠네요. 저는 그 영화는 못 봤어요. 아마 'Love idea'라는 제목이 붙어 있지 않았나 싶은데. 오랜만에 그 곡도 들어보고 싶네요.

상미 2008-12-17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쩌면 내가 준이보다 더 너희 아빠 서재를 기억하고 있을거 같아.
네가 묘사한것처럼 다 떠올라.벽면 가득 책장들, 네 책상위치도.
아빠를 어려워했었구나... 나 30년지기 친구 맞니?

hnine 2008-12-17 22:18   좋아요 0 | URL
이렇게 어린 시절의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게 새삼 너무 고맙고 소중하게 느껴지는구나. 아빠를 어려워했었다는 말 조차 이제서야 할수 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