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 거리 저녁의 게임 병어회 겨울의 환 창비 20세기 한국소설 33
오정희.김채원 외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대학생이 되어 처음 읽어보았던 소설들을, 어떤 계기로 참으로 오랜 만에 다시 읽어보게 되었다. 이 소설들은 대개 1970년에서 90년대 초기에 발표된 것들로서, 창비에서 20세기 한국소설이라는 이름의 세트로 묶어 낸 중의 한 권으로, 오 정희저녁의 게임, 중국인 거리, 동경, 옛우물, 이 순병어회, 백부의 달, 김 채원애천, 겨울의 환, 이렇게 여덟 편이 실려 있다.
처음 읽은 그녀의 소설 '완구점 여인'에서도 느꼇듯이, 오 정희 소설의 주인공은 여자, 늙어가는 여자, 나이가 들어가는, 완숙해져 가는 인생이 아닐까 생각 된다. 이미 늙어버린 싯점이건, 그 여자의 젊은 시절의 한 때이건, 조용히 황혼을 향해 가며 되돌아보는 어떤 기억 한편을 쭈욱 펼쳐 놓은 것 같은 느낌. 그래서 오 정희의 소설을 읽고 나면, 나도 그 소설의 등장 인물과 비슷한 나이로 변해 버린 느낌이 한동안 드는 것이다. 인생이란 이렇게 흘러 이렇게 추억이 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20년 전에 읽을 때 그 문체의 뛰어남, 어떤 경지에 오른 듯한 문장력에 감탄했을 뿐, 특별한 감명을 받은 기억은 없는데 반해, 다시 읽는 지금의 내가 변했음인가. 인생은 이렇게 살아지는구나, 산다는 일, 인생을 '살아낸다'는 일이 이렇듯 오랜 기다림과 바램, 그러다가 결국엔 어쩔 수 없이 그리움 한 자락 남길 수 밖에 없는, 오래 된 청동 거울 같고, 옛 우물 같은 것일 수 있겠구나 하는 울림이 마음 속에 깊고 오래 공명처럼 퍼져 나간다. 새로운 것이 없는 노년의 일상에 대해 쓴 한 구절-<늙은이는 반성하지 않는다. 반성을 요구하는 어떤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동경' 99쪽> 사십오 년 쯤 살아 내고 났을 때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ㅡ<한 사람의 생애에 있어서 사십오 년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부자도 가난뱅이도 될 수 있고 대통령도 마술사도 될 수 있는 시간일뿐더러 이미 죽어서 물과 불의 먼지와 바람으로 흩어져 산하에 분분히 내리기에도 충분한 시간이다.  '옛 우물' 106쪽> 내가 가지고 있던 오 정희라는 소설가에 대한 생각은 아무튼 한층 더 격상되었으니, 예전 소설을 다시 읽어보는 것은 분명히 해볼만한 일인 것 같다.
함께 실려 있는 이 순의 '병어회'와 '백부의 달'은 그저 그렇게 읽어내린 작품. 예전에 그녀의 소설 중 기억나는 것은 '우리들의 아이'라는 단편인데 희극적인 장면이 연상되는 부분이 글 여기 저기에서 자주 등장하였다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인 것 같았다.
김 채원의 '애천'의 몽환적인 분위기, 그녀의 유명한 '환(幻)'시리즈의 시작이 된 '겨울의 환'은 기대보다 좋았다. 아마도 동년배 여자 주인공의 감정을 묘사한 내용때문이었을까. 1989년의 그 나이와 2008년의 같은 나이 세대가 느끼는 옛 추억은 다를 수 있겠지만, 이제는 나의 삶이 흘러가는 방향이 가늠 되고, 그것은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달라질 것이 없다는 체념이 되기도 하는 시점에서 이성에 대한 사랑의 감정으로 온 정신을 지배당할 수 있다는 것이 새로왔지만, 역시 그  사랑의 대상이 어릴 때 추억 중의 한 사람의 재현이라는 점을 주목했다. '밥상' 차리는 여인의 묘사, 그리고 밥상 차리기에서 비롯된 남편과의 에피소드, 나는 밥상을 차리는 여자가 아니라 밥상을 깨뜨리는 여자에 가까왔다는 표현, 어머니의 밥상에서 결핍된 요소 등등, '밥상'이라는 것에 여러 가지 상징을 부여한 것도 눈여겨 읽었다.

조용히, 하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열렬히 공감하며 읽어갈 수 있었던 책이었다. 내 인생의 어느 부분에서 또 다시 읽을 기회가 올까. 그 때는 또 어떤 느낌일까 생각해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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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인생. 2008-02-20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인님 이글을 이제야 읽어보았어요 변명같은 변명이지만. 제가 님이 쓰신 일요일에는 거의 알라딘에 들어오지 못했거든요. 앗 그계기가 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
<인생은 이렇게 살아지는구나, 산다는 일, 인생을 '살아낸다'는 일이 이렇듯 오랜 기다림과 바램, 그러다가 결국엔 어쩔 수 없이 그리움 한 자락 남길 수 밖에 없는, 오래 된 청동 거울 같고, 옛 우물 같은 것일 수 있겠구나 하는 울림이 마음 속에 깊고 오래 공명처럼 퍼져 나간다> 이부분에 공감하면서 제가 한 십년후에 읽는 오정희 소설은 이렇게 깊이있게 나를 울리지 않을까... 그렇네요.

이곳에 오면 서늘한 바람같은게 불어요. 그바람 한가운데에 등돌리고 있는 스누피의 등이 어쩐지 오늘은 애잔하게 느껴지네요 나인님. 감사드려요.


hnine 2008-02-21 11:35   좋아요 0 | URL
여기 알라딘에서 좋은 점 중 하나잖아요. 이런 저런 계기로 다양한 분야의 책을 접할 수 있다는 것. 춤추는인생님 말씀때문에 다시 읽어보게 된 것 맞아요 ^^ 읽었던 글을 또 읽을 때 느껴지는 감동이란, 처음 읽을 때와 참 다르다는 것, 더 뭉클하고, 시간이 흐른 흔적도 함께 느껴지더라는 것...
감사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