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이 고인다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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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어본 우리 나라 여자 소설가들의 작품들은 분명 모두 다르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그것 같게 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애란처럼 분명한 자기 색깔이 있는 작가의 존재는 기쁨이고 다행이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색깔이란 무엇일까. 그녀에게는 1980년생, 20대 초반 등단이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다니지만 그것은 어떤 파격적인 문체로서 그녀를 구별짓는 것이 아니라, 길지 않은 인생 경험에도 인생에 대한 진중한 시선이 그녀의 소설을 관통하고 있으며, 예리하지만 따뜻하고, 글의 분위기를 끝까지 처지게 하지 않는 '위트'가 바로 그녀를 그녀로 보이게 하는 색깔이 아닐까. 어떠한 구차한 상황에서도  글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살짝살짝 드러내는 코믹한 터치, 읽고난 후에도 마냥 우울한 감상에 빠지지 않게 하는 그녀의 그런 감각이 좋다. 이런 작가의 단편집을 읽는 것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몰입하게 되는 일들중의 하나.
풍족하지 않은 형편, 희망보다는 패배감에 온 몸과 마음과 시간을 채우고 지낼 수도 있었을 재수생 생활을 그린 단편'자오선을 지나갈 때'에서의 한 구절. '...K-59. 오래전 내 책상 번호. 1999년의 나는 어떤 공간이나 시간이 아닌 번호 속에 살았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때가 내겐 어떤 떳떳한 한 시절로 느껴진다. 그래서 가끔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그때만큼만 하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내가 그때만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때보다--아는게 많아졌기 때문이다...(147쪽)' 소모적인 한 시절이 아닌, 떳떳한 한 시절로 느껴진다는 말이 마음에 들어왔다.
'그해에는 혼란스러운 것이 많았다. 신학기의 낯선 질문 앞에서 당황하거나, 뭔가 고백하고 해명하지 않으면 누군가 나를 비난하지 않을까 조바심 낸다거나 하는 일들로 말이다. 우리가 하는 말은 대부분 할 말이 없어서이거나 침묵을 견딜 수 없어 하는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또 우리는 우리가 언제 어떤 말을 하며 살아왔는지 쉽게 잊어버리는 존재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그 말들 안에서 자주 달뜨고, 아프고, 우왕좌왕했다. (222쪽)' '네모난 자리들'이라는 단편중에서 옮긴 구절이다. 대학 신입생. 모이는 자리마다 홍수를 이루던 말의 향연 속에서의 느낌은 지금도 어느 자리에 갈때마다 느끼는 것 아니던가. 할 말이 없어서 하게 되는 말들, 그리고 그 말들로 인해 아파하는 우리들이라니.
이 책에는 유난히 수험생, 취업준비생등, 현재를 담보로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글들이 많다. 작가도 그런 생활을 경험해보았을 것이라 짐작이 들 정도로 구체적인 묘사가 재미있다.
참신하나 가볍지 않고, 위트를 잃지 않으면서 삶을 진지하게 정면에서 직시할 수 있는, '네모난 자리들'의 한 구절처럼 (223쪽) 뜨거운 차를 마셨을 때와 같이 정갈한 고독이 가슴 아래로 내려가는 기분을 아는 그녀의 소설이라면, 앞으로도 주저없이, 단숨에 읽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이 책에 실린 여덟 편의 단편 중 어떤 글이 제일 좋았던가 골라보려다 결국 포기한다. 마지막의 '플라이데이터리코더'가 다른 글과 비교해 좀 튀더라는 말 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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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행복 2008-01-11 0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려라 아비'을 읽고난 후, 매우 잘 씌여진, 흠잡을 데 없는 소설이란 생각은 들었는데, 그 실력에 비해 이상하게 끌리지는 않네요. 너무 잘해서 그런가? 으음...
한 번 더 도전해볼까를 생각하게 되네요.

hnine 2008-01-11 14:49   좋아요 0 | URL
그러셨군요. 제게는 그 유명한 박완서 님의 소설이 그렇답니다 ^ ^
그러다가 또 언젠가 가슴에 와닿을지도 모르는 일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