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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기행 2 ㅣ 펭귄클래식 18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홍성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평점 :
괴테는 이미 이탈리아의 로마, 베네치아, 볼로냐, 나폴리, 시칠리아를 여행하였고 이 여행기록이 <이탈리아 기행 1>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기 전 괴테는 로마를 다시 방문하기로 한다. 두번째 방문에서 10달을 머물렀으니 사실 방문이라기 보다 로마'체류'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1권이 비교적 여행기의 성격을 띠는 반면에 2권은 한층 성숙된 생각과 감상이 담겨 있고 작품 구상, 새로운 배움의 과정을 기록한, 한권의 에세이를 읽는 느낌이었다.
두번째 로마에 머무는 동안 괴테는 <타소>, <타우리우스의 이피게니아>, <파우스트>, <에그몬트> 등 작품의 완결을 위한 구상에 많은 시간 할애하였고, 스케치와 그림 그리기에 매진하기도 한다.
괴테에게 로마는 커다란 배움의 장이었다.
나는 금방 졸업하기에는 너무 커다란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예술에 대한 내 지식, 보잘것없는 재능을 철저히 다듬어 완전히 무르익게 해야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반쯤 되다 만 사람으로 여러분 곁에 되돌아갈 것이고, 그리움, 노력, 버둥거림과 잠행이 또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15쪽)
괴테는 문학에만 관심있는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로마에 와서 제일 열심히 한 것 중 하나는 화가의 지도를 받으며 그림과 조형예술에 매진한 것인데 그동안 성당, 박물관 등의 유명한 그림과 조각을 보러 다니며 예술의 한 분야인 미술에 대한 재능도 발굴하고 싶었나보다. 여행하는 동안 괴테와 동행해준 사람들은 시중드는 하인이 아니라 음악, 미술, 철학, 문학, 고고학등 각 분야에서 괴테의 조력자가 되어줄 사람들이었다. 이 책의 표지에서 볼 수 있는 괴테으 초상화를 그려준 티슈바인이 그렇고, 앙겔리카, 라이펜슈타인, 하케르트, 모리츠, 하인리히 마이어등, 늘 괴테의 주위에 머물며 괴테의 친구이자 교사 역할을 해주었다.
너무나 흥겨운 내 생활에 대해서는 이러쿵저러쿵 쓰지 않겠습니다. 무엇보다 나는 풍경 그리기에 푹 빠져 있습니다. 이곳의 하늘과 땅의 부름에 응하지 않을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목가적인 풍경도 몇 군데 발견했습니다. 내가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우리 같은 사람은 주위에 늘 새로운 대상이 있어야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103쪽)
하지만 책의 끝부분에 가서는, 그림에 대한 훈련을 단념하기로 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나는 성실하게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살며 앞날을 기약하고 있습니다. 애당초 문학을 하도록 태어났으며 앞으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기껏해야 십 년 동안 재능을 십분 발휘해서 무언가 명작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하루가 다르게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로마에 비교적 오래 머물면서 얻은 수확이 있다면 조형 예술 훈련을 단념했다는 겁니다. (242쪽)
순간이 전부이며 이성을 가진 인간의 유일한 특권은 스스로의 삶을 주도할 수 있는 한 분별 있고 행복한 순간을 최대한 많이 가질 수 있도록 처신하는 데에 그 본령이 있다고... (111쪽)
한때 계몽주의자로서 이성을 중요시했던 괴테도 그의 친구이자 조력자인 헤르더의 글을 읽고난 결론을 말하면서, 행복한 순간을 최대한 가질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인간의 특권이라고 했다.
이렇게 <이탈리아 기행 2>에는 로마에 체류하면서 괴테가 고국의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 친분있는 사람들의 발표글, 그들로부터 받은 편지 등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이중 모리츠의 논문 '미의 조형적 모방에 관하여' (264-273쪽)란 글은 나는 여기서 처음 보는 이름이지만 지금 읽어도 내용이 진지하고 공감을 불러일으켜, 앞에 종교적 성인의 글을 옮겨 놓은 부분은 설렁설렁 읽은데 반해 모리츠의 이 짧은 논문은 눈에 힘을 주어 밑줄 치며 읽었다. 괴테도 훌륭한 문학가이지만 그의 주위에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참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로마의 사육제에 대한 부분도 상당 부분 차지한다. 여행객의 신분으로 사육제를 단순히 구경하는 차원이 아니라, 시작부터 끝까지, 어떻게 진행이 되고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참여하는 사람들의 복장, 춤, 노래, 그것들의 의미 분석까지, 글로 썼음에도 눈에 그려지도록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써놓았다. 괴테는 사육제라는 큰 행사 속에 담겨진 인간 군상의 습성과 의미를 보고자 했던 것 같다. 로마의 많은 종교적인 축제와 사육제가 어떻게 다른가도 언급했다.
우리가 로마의 사육제를 기록할 때 과연 그런 축제를 제대로 묘사할 있겠냐는 반론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각적인 대상이며 생동감 넘치는 저 커다란 집단은 직접 눈앞에서 보아야 하고, 각자의 방식대로 구경하고 파악해야 합니다.
로마의 사육제는 사실 민중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민중 스스로 주최가 되는 축제입니다. (196쪽)
사육제를 구성하는 여러 행사중 '가장'을 서술한 부분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우리 나라에도 탈춤, 가면극이 있듯이 로마 사육제에도 각양각색으로 가장을 하고 신분을 감춘 상태에서 현실에서 공개적으로 쉽게 오고가지 않을 말을 서슴없이 던지는 것이다. 이중에는 고대 신을 흉내내는 어릿광대도 있고 변호사 분장을 한 어릿광대, 정치인인 양 행세하는 사람도 있다.
변호사 한명이 법정에서처럼 열변을 토하며 잰걸음으로 군중 속을 헤집고 들어옵니다. 행인들을 붙잡고 모조리 법정에 세우겠다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유부녀에게는 정부와 바람을 피운다고 야단치고, 아가씨에게는 연애를 한다고 질책합니다. 누구에게나 창피를 주고 난처하게 만들 궁리를 합니다. 누군가에게 다가가서 말을 거는 게 아니라 이미 지나가 버린 사람을 붙잡아 세웁니다. (205쪽)
가장 행렬중 퀘이커 교도들이 등장하는 것은 의외였다. 카톨릭교가 주 종교인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에 거의 있지도 않은 영국의 퀘이커 교도가 사육제에 단골로 등장하는 이유는 뭘까.
이때 로마를 방문한 외국인들, 특히 화가들은 곳곳에 앉아 그림을 그린다. 괴테는 사육제에 참가한 사람들뿐 아니라 그들을 관찰하고 그리는 화가들도 눈에 담는다. 사육제 행사가 끝나고 끝 마무리는 어떻게 정리되는가를 보면서 질서 없이 진행되는 부분에서는 한탄을 하기도 한다.
독일 출신의 이성적인 괴테의 눈에 사육제는 처음엔 소동과 흥분의 '짓거리'로 보였고, 아무리 예술적인 시선으로 보려고 해도 그때마다 탐탁잖고 섬뜩한 인상을 풍겼다고 했으나, 곧 그런 생각과 화해를 하기로 했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일 년 내내 로마에 머물며 품위 있는 대상에 몰두하다 보니 그런 것에 익숙해진 정신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나보다 라고 하면서.
눈에 보이는 인파와 흥분의 행렬만 보는 괴테는 아니었을 것이다.
인파로 가득 찬 그 좁고 기다란 길은 우리에게 인생 행로를 떠올리게 해줍니다. 그곳에선 맨 얼굴이든 가장을 했든, 발코니에서든 관람석에서든 모든 구경꾼은 자신의 앞과 옆의 오직 한 곳만을 바라다봅니다. 나아간다기보다는 오히려 떠밀리면서, 자기 뜻으로 멈춘다기보다는 오히려 막히면서 더 볼만하고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는 곳으로 나아가려고 부단히 애를 씁니다. 그러다가 그곳에서도 다시 길이 막히게 되고 급기야는 밀려나고 맙니다. (236쪽)
사육제의 한가운데서 괴테는 사람들이 한 평생 살아가는 과정을 본다.
로마를 떠날 때가 다가왔지만 그는 떠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로마에 와서 점점 더 행복해지고 하루가 다르게 즐거움도 커지고 있음을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가장 머무를 만한 가치가 있을 때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실로 가슴 아프긴 하지만 그래도 어떤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 수 있었다는 사실에 적이 안심이 됩니다. (260쪽)
만족한다면서도 그는 떠나면서 서운한 마음을 시로 남기며 글을 마친다.
1년 10개월에 걸친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온 괴테는 그동안 완결하지 못하고 있던 원고들을 마칠 수 있었다.
딱딱한 공직 생활을 하면서 부와 명예는 갖췄으나 타고난 탐구욕과 다방면의 관심사를 맘껏 펼칠 기회를 충분히 펼치지 못하는 생활에 이력이 날 즈음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창작욕을 되찾아 온 괴테에게 이탈리아는 새로운 세계로 발돋움 할 수 있게 해준 커다란 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