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무게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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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형식이 되었던 서사는 소설에 필요한 요소이다. 소설가라고 하면 우선 흥미있고 독창적인 서사를 구상할수 있는 사람, 그런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것이라 연상하기 마련인데, 파스칼 메르시어의 언어의 무게 같은 소설을 읽으면 그런 선입관을 희석시키게 한다. 서사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소설의 품격이 높아지는데는 서사를 통해 구현되는 창의력이 전부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정말 고급스런 소설을 쓰는데는 서사보다 더한 작가 자신만의 무엇이 들어가는구나 하는 생각이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경우 그것이 무엇이라고 한마디로 딱부러지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이 내겐 부족하다. 아마도 언어에 대한 그의 타고난 관심과 재능, 언어 구사력에서 나아가 언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 정확한 언어를 뽑아내 사용하겠다는 문학적, 철학적 의지 같은 것들이 아닐까.

파스칼 메르시어라는 필명으로 소설을 발표하고 있는 그의 본명은 페터 비에리. 1944년 스위스 태생이지만 독일에서 철학을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철학 교수로 지냈다. 2004년 출간한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주인공의 직업은 대학교수, 2020년에 출간한 이 소설 <언어의 무게>의 주인공은 언어와 문학에 매진해온 번역가 사이먼 레이랜드이다. 공식 직업은 번역가이지만 어릴 때부터 언어에 남다른 관심을 가져 태평양 연안의 모든 나라의 언어들을 배워보고자 하는 생각을 감히 품는 젊은이였다. 그런 그를 알아본 대학교수인 삼촌은 죽기 전 조카 레이랜드에게 자기가 살던 집을 물려주며 그의 집, 그가 쓰던 책상에서 너만의 책을 써보라고 한다.

이탈리아 트리에스테에서 출판사를 운영하던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레이랜드는 아내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그녀에게 일기같은 편지를 써오고 있던 중 자신도 뇌종양 진단을 받는다. 자기 생도 얼마 안남았다고 여긴 레이랜드는 그동안 아내 리비아 대신 운영해오던 출판사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혼자 삼촌이 물려준 집이 있는 영국 햄스테드로 이주해온다. 그동안 해오던 모든 일에서 손을 놓고 온전히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기 위함이었다.

여기까지는 제법 평탄한 플롯 아닌가? 하지만 작가가 쓰고 싶었던 것은 이런 뼈대에 입힌 살에 있는데 그 살에 해당하는 것이 주인공 레이랜드가 직업상 만나는 작가들, 출판 관계자들, 이웃, 그리고 과거의 인물 (삼촌, 아내) 까지, 이들과의 관계, 그들을 통해서 다시 보는 자신에 대한 성찰이라고 할수 있다. 여기에서 파스칼 메르시어는 다른 어느 작가에서도 볼 수 없는 그만의 색깔, 그만의 세계를 유감없이 드러내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600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분량의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하는 흡인력으로 끌어들인다.

레이랜드가 만나는 사람들이 여럿 나오지만 여전히 레이랜드의 관심은 자기 내면을 향하고 있다.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그가 결국 대면하는 것은 (대면하고자 하는 것은) 그 자신이었으니까.

"이따금 나는 만남, 특히 첫만남은 무엇보다도 우리 스스로 알지 못하던 자기 자신과의 만남이라고 생각한다." (146)

그는 나의 감정을 표현할때 이런 것을 염두에 두는 사람.

두 사람은 에스파냐어 '펠리시다드 felicidad'가 그 시기의 행복에 어울리는 유일한 단어라고 생각했다. 이탈리아어 'felicita'은? 너무 현란하고 깊이가 없었다. 사탕 색깔이나 싸구려 젤라토 같은 울림이었다. 프랑스어 '보뇌르 Bonheur'는? 너무 평범하고 들척지근하고 향수를 슬쩍 뿌린 것 같았다. 그럼 영어 '해피니스 Happiness'? 귀엽고 레이랜드 집에 있는 장식품을 떠올리게 했다. 독일어 '글뤼크Gluck'는? 유행가 제목 때문에 돌이킬 수 없이 유치해졌다. 그러니까 에스파냐어가 정확하게 어울렸다. 레이랜드와 리비아는 단어에서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들었다. 두 사람은 자기들만의 울림과 의미 공간에, 타인에게는 닫혀 있는 지극히 사적인 공간에 산다는 생각도 가끔 했다. (156)

레이랜드가 다양한 언어 구사력을 가지고 실현하고 싶은 것은 다름아닌 더 '정확한' 방법으로 의미를 전달하고자 함이었다. 

레이랜드를 통해 독자는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과연 '현재'일까 하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한다.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대를 현재라고 정의하긴 하지만 미래에 종속된 시간, 과거에 집착한 시간을 살고 있으면서 현재를 잃어버리고 살지는 않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 일은 사람에게만 일어나요. 인생을 놓치는 것 말이에요. 어쩌면 될 수도 있는 일, 급하고 압제적이고 강제적인 시간에 복종하느라 자기 자신을 놓치지요. 동물들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요. 동물은 자기가 지금 있는 모든 순간에 충실하고 현재와 자신을 잊은 상태에 맹목적으로 빠져 있어요." (473)

미래를 생각하고 과거를 되돌아보는 인간만의 능력이 결국 인간의 삶에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인가.

문학으로, 언어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다양한 문학작품을 읽고 감상할 수 있는 것 외에 우리 삶의 차원과 질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언어가 우리 삶에 올려놓는 무게에 대한 사색과 통찰은 이 책의 제목을 추상적으로 인식하던 처음에 비해 읽어가면서 점차 또렷해져갔다. 이처럼 세밀하고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특히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채우고 있는, 레이랜드가 자기 자신의 책을 쓰기로 작정하고 쓰기 시작하는 부분은 너무나 마음에 드는 결말이다. 어느 누구든 어느 만큼 생을 살아왔다면 어떤 내용이 되었든 책 한권 쓸 만큼의 무언가를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평소 내가 혼자 하던 생각이기도 하다. 그럴려면 다른 사람을 따라 살지 않고 나의 생을 내 생각대로 용기있게 살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비록 성공 일색이 아니라 실패 일색이라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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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2-11 20: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딘데 이렇게 멋진가요?
커피 넘 많이 드시는 거 아닌가요? ㅋ
책 두껍네요. 야간열차 읽어야 하는데 이 책은 언제 읽을지 모르겠네요.ㅠ

hnine 2024-02-11 20:32   좋아요 3 | URL
동네 카페랍니다. 커피는 제 것과 남편 것 ^^
빈 컵은 제가 벌써 다 마셔서 그렇고요.
멋모르고 읽었던 리스본행 야간열차보다 저는 이 책이 더 오래 기억에 남을 듯 합니다.
책 두꺼운 것에 비해 읽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2024-02-12 0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2-12 07:3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