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무진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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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여행'을 읽으면서 김 훈의 문체와 분위기를 알게 되었기는 하나, 그의 소설로는 처음인 이 책을 읽으며 좀 더 그의 글의 분위기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심각하고 진지하고 무겁다.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무표정의 표정을 하고 있을 것만 같다.

이 책에 실린 여덟편의 소설들.
'배웅', 헤어짐이다. '화장', 죽음이다, 즉 더 갈수 없는 이별, '항로표지', 떠남이다, '뼈', 폐허로 남겨짐이다, '고향의 그림자', 상처와 징계, '언니의 폐경', 친숙하던 것, 대상으로부터의 이별 선언, '머나먼 속세' 타인을 무너뜨리고 일어서보려는 나, '강산무진' 시한부 선고후 출국하는 사내의 이야기, 여덟 편의 소설들이 어쩌면 다 이렇게 음울하단 말인가.
그는 인물들의 심리를 구구절절히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설명없이 그대로 드러내준다.
어떤 설명도 그렇게 적나라할 수 없을 정도로.

'배는 단애 모퉁이를 돌아서 사라졌다, 버리고 간 기저귀가 빨랫줄에 걸려 있었다. 배가 사라진 쪽으로 기저귀는 길게 나부꼈다 (126쪽 '항로표지')
'새벽 네시까지는 아득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30쪽 '배웅')
'날이 흐려서 바다는 잿빛이었고, 구름을 뚫고 쏟아지는 빛의 다발이 눈 덮인 먼 산들 위에 얼룩 무늬를 드리우고 있었다. <강산무진도>는 살아 있는 내 눈 아래 펼쳐져 있었고 그 화폭 위쪽, 산들이 잔영으로 스러지고 바다가 시작되는 언저리에서 새빨간 럭키 스트라이크 담뱃갑이 바람에 날리는 환영이 보였다. (352쪽 '강산무진') 소설의 마지막 단락들인데, 보다시피 글을 마치는 방식도 이런 식이다.

무심으로 가장하고 주위 환경과 상황을 묘사함으로써 인물의 심리 상태, 또는 그 이상을 말하고 있다. 파랑색이나 초록색, 더구나 오렌지 색도 아닌 무채색 상황에 이르러, 그래도 연고 없는 등대지기로, 취객을 태우는 택시 기사로 뿌연 잿빛 안개 속 최소한의 행보를 계속해야하는 주인공들을 통해 김 훈은 예의 그 '밥벌이'의 숭고함을 말하려 함인가, 아니면 그 지겨움을 말하려 함인가. 아니면 그의 밥벌이는 곧 '인생'의 다른 표현인가.

읽으면서자주, 이십여년 전 내가 대학생일때 대학생들의 필독서 리스트에 빠지지 않던 최 인훈의 소설들이 자꾸 떠올려졌다. '광장'과 '회색인'. 분위기가 닮았다. 작가의 문체가 어딘지 모르게 닮아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직감일까. 최 인훈은 내가 무척 좋아하던 작가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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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8-16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에게서 어두운 분위기를 많이 느꼈어요.
그래서 그다지 건강하지 않은 느낌으로 책장을 덮곤 했죠.

hnine 2007-08-16 20:32   좋아요 0 | URL
예, 읽으면서 내내, 그리고 다 읽고 난 후에도 마음이 무거웠어요. 진지하지만 무겁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