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건 부두로 가는 길 - 조지 오웰 르포르타주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아침이면 제일 먼저 들리는 소리는 돌 깔린 길을 타박타박 걷는 여공들의 발소리였다. 나는 더 일찍 깨본 적이 없어 못 들어봤지만, 그보다 앞서 공장에서는 경적을 울리는 모양이었다.

우리 침실에는 대개 네 명 정도가 함께 지냈다. 다른 방들과 마찬가지로 지독히도 불결한, 본 목적에서 벗어나는 방이었다. 몇 해 전만 해도 일반 주택이었던 이 집은, 브루커 부부가 인수하여 천엽 가게 겸 하숙집으로 바꿔놓았다. (11쪽)


우리 나라라고 생각해도 별 무리없을 대목. 이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1936년 조지 오웰은 레프트 북 클럽이라는 한 진보단체로부터 잉글랜드 북부 노동자들의 실상을 취재하여 책을 써달라는 제의를 받는다. 당시 그는 버마에서 식민지 경찰활동을 하고 돌아와 그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으로 파리와 런던에서 자발적 부랑자 생활을 하고, 그 경험을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이라는 책으로 펴낸 후였다.     

기꺼이 제의를 받아들인 조지 오웰은 두달동안 위건, 리버풀, 셰필드, 반즐리등 잉글랜드 북부 탄광지에서 탄광 일에 참여하고 그들의 숙소나 집에 머물면서 취재를 위한 조사 활동을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책이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다.

지도상에서 보면 사실 위건 (Wigan)은 내륙에 위치하고 있고 그가 머문 곳이 위건 지역만은 아님에도 제목이 위건 부두 (Wigan Pier)인 것은 위건 부두라는 명칭이 위건과 맨체스터 지역의 Leeds and Liverpool Canal 을 둘러싼 지역을 통칭하기 때문이다. 예전엔 진짜 석탄 하역 부두가 있어서 생긴 이름이었는데 부두가 붕괴된 후에도 여전히 그렇게 불리고 있다고 한다. 즉, 위건부두는 사실 위건 지역보다 훨씬 광범위한 북부 탄광 지대를 가리키는 이름이라는 것이다.


 Wigan Pier is an area around the Leeds and Liverpool Canal in WiganGreater Manchester, England, south-west of the town centre. The name has humorous or ironic connotations since it conjures an image of a seaside pleasure pier, whereas Wigan is in fact an inland and traditionally industrial town. (Wikipedia)    


맨위에 인용한 이 책 첫 문장은 조지 오웰이 묵었던 하숙집을 묘사하고 있는 내용이다. 방인지 거실인지 모를 공간을 하숙인 네명이 함께 썼는데, 지독히 불결하고 족제비 우리 같은 냄새가 코를 찌르며 식탁에서 주인과 하숙인 모두 같이 식사를 하는데 식탁 위에 아침에 있던 부스러기나 소스 흘린 것이 저녁까지 그대로 있는 것은 예사이며 식사로 제공되는 빵에는 늘 집주인 남자의 시커먼 손도장이 찍혀있었다고 했다. 여기 머물면서 조지 오웰은 탄광 막장 일에 참여하는데, 막장이란 곳이 어떤 곳인지, 어떤 환경에서 작업이 이루어지는지, 막장 안에서 그리고 막장 밖에서 광부들과 그의 가족들의 삶은 어떤지, 그들의 수입이 어느 정도되고 그 수입이 어떤 종목에 어떻게 지출되는지, 주택 구조, 주택 공급 현황은 어떠한지, 그야말로 기자가 보고서 쓰듯이 자세히, 숫자로 제시된 자료까지 첨부하여 보여주고 있다. 

침대 두개를 세 사람이 쓰는 등, 기본적인 주거 환경이 이루어지지 않고 슬럼가가 형성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정부에서는 지자체 주택을 지어 공급하기도 하였으나 노동자들은 지자체 주택으로 가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여 들어가게 되어도 곧 다시 슬럼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예도 나온다. 슬럼의 악취에서 벗어나는 것이 기쁘고 자녀들이 뛰어놀 공간이 있는게 더 낫다는 걸 알지만 도무지 편하지 않다는 것이다. 공동주택을 불결함과 혼잡함으로부터 유지하기 위한 지자체의 제제와 관리에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이다. 차라리 냄새나고 복잡할지언정 슬럼의 온기가 그리운 것이다. 이런 것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문제이다.


슬럼 거주민들을 번듯한 집으로 이주시키는 것은 대단한 업적이긴 하지만, 우리 시대의 독특한 분위기 때문에 그들이 누려온 자유의 마지막 흔적까지 박탈할 필요가 있다고 여기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96쪽)


노동 계급 가정의 가장이 실업을 당한 경우, 가족 구조 문제성도 지적되었다.


노동 계급 가정에서 주인은 남자이지 중산층 가정의 경우처럼 여자나 아이가 아니다. 이를테면 노동 계급의 가정에서는 남자가 가사의 일부를 맡아서 하는 경우를 도무지 볼 수 없다. 이런 관행은 실업 때문에 바뀌는 게 아니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좀 부당해 보이기도 한다. 남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빈둥거려도 여자는 변함없이 바쁘며, 그것도 살림이 더 빠듯해졌으니 더욱 바쁘다. 그런데도 내가 확인해본 바로는 여자들이 반발하는 경우가 없었다. 아마도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도 남자가 일자리를 잃었다는 이유만으로 '아줌마' 노릇을 한다면 사내다움을 잃는게 아닐까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110쪽)


여기서 잠깐 언급이 되었지만 뒤에 가면 경제가 나아진다고 꼭 더 인간적인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더라는 얘기가 나온다. 이것은 '학교에서 익힌 편견'이라는 장에서도 이어진다. 영국의 계급 체계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돈이겠지만 돈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며, 돈으로 이루어진 계층 구조이지만 거기에 그림자 같은 계급 제도가 스며들어 있다고 했다. 그건 아마 조지 오웰 자신이 어릴 때 장학금 혜택으로 사립학교 예비학교에 들어가서 장학금 없이도 입학할 수 있었던 다른 학생들과 차별대우를 받았던 경험이 많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직업으로 뛰어든다.

그렇게 5년 동안 인도 제국의 경찰의 신분으로 일하며 몸으로 체득한 것은 제국주의에 대해 배우는데 더없이 중요한 바탕이 된다. 그는 제국주의에 대한 강한 염증을 느꼈고 비판하였으며 그것을 뿌리뽑고 그 자리를 대신해야할 주의와 제도를 찾고 알리기 위해 글로, 행동으로 활동하는, 죽은 지식인이 아닌 산 지식인이 되고자 하였다.


나는 경찰이었으니, 압제의 실행 기구의 일원이었다. 더욱이 경찰에 몸담고 있다 보면 제국의 악행을 지근거리에서 관찰할 수 있는데, 악행을 저지르는 것과 악행으로 득을 보는 것엔 현격한 차이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형을 찬성하면서도 교수형 집행인 노릇은 하지 않으려 한다. (197쪽)


그는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지른 범인도 교수형을 언도하는 판사보다는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생각을 했고, 모든 정부는 악이며, 처벌은 언제나 범죄 자체보다 해로우며, 사람들은 믿고 가만히 내버려둬야만 점잖게 행동한다는 무정부주의 이론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영국으로 돌아와 다시는 그런 사악한 압제의 일원이 되지 않기로 결심하고, 양심의 가책때문에 속죄를 하지 않고는 견딜수 없어 스스로 밑바닥까지 내려가 억압받는 사람들 사이에 있고 싶어졌다.


당시에는 실패만이 유일한 미덕처럼 보였다.

내 마음이 영국의 노동 계급에게로 향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210쪽)


그런데, 그렇게 그가 영국의 노동 계급에 섞여들어가 발견한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들 (영국의 노동계급)은 불의에 당하는 상징적 희생자였으며, 버마에서 버마인들이 하는 역할을 영국에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국에 와보니 압제와 착취를 찾아보기 위해 버마까지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영국에, 바로 자기 발밑에, 다르긴 해도 어느 동양인 못지 않게 비참한 생활을 하는 밑바닥 노동 계급이 있었던 것이다. (201쪽)


이 책중 한 챕터는 제목이 아예 '건너기 힘든 계급의 강'이라고 되어 있다.

역시 체험을 바탕으로 그는 말한다. 간단히 부랑자가 될 수는 있었지만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내용), 건설 인부나 광부 처럼 평범한 노동 계급의 경우에는 훨씬 끼어들기가 어려웠노라고 (「위건부두로 가는 길」 내용). 평범한 노동 계급과 자기 사이의 벽은 돌담이라기 보다 수족관의 판유리 같아서, 없는 듯 대하기는 쉽지만 뚫고 지나갈 수는 없었다는 그의 고백은 얼마나 예리한가. 

그가 무정부주의를 거쳐 사회주의를 신봉한 의도는 한가지이다. 제국주의, 파시즘에 대한 진저리치는 혐오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제국주의나 파시즘은 이미 흘러간 과거 속에서나 존재한다고 생각했다가,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소름이 끼쳤다. 우리가 지금 그것을 제국주의나 파시즘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을 뿐이다. 그것은 글로벌리즘이라는 이름으로,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교묘하게 섞여들어가 있을 수 있다. 세계를 어느 한 국가의 조절과 통제하에 두고 싶어하는 명분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 나라'는 고도로 기계화 되어 있고 산업화 되어 있어서, 그런 단계가 오히려 사회주의가 실현되는 조건을 갖춘 셈이라고 저자는 생각했다. 그에게 사회주의는 전체주의, 제국주의, 파시즘으로부터 인간 사회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던 것이다. 그 나라의 미래가 궁금해진다. 

마지막 장에서 기계화가 인간의 인간다움을 어떻게 잠식해가는지 읽어가는 동안엔 절망스러웠다. 무분별한 기계화를 약물중독에 비유하여, 약이 조절되지 못하고 사용될때 어떤 결말이 올지 아는데, 기계화에 대해서는 그런 조절을 오히려 못하고 무한정 이용만 하려고 하며 발전의 척도로만 보려한다고 하였다. 1936년에 쓰여진 내용이 2021년 지금 이렇게 피부로 와닿을수 있는가.


다음엔 그의 어떤 책을 또 읽어야 할까.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말고 다른 책이 남아있던가 찾아봐야겠다. 기꺼이 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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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3-02 0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지금 버지니아 울프 시작했는데 조지 오웰을 다음 작가로 할까싶어요. hnine 님 조지 오웰 리뷰 글들 보다 보니까 자꾸 보고싶어져요. ^^

hnine 2021-03-02 09:02   좋아요 1 | URL
저도 한 작가의 책을 이렇게 연달아 읽어볼때가 많지 않았던 것 같은데, 조지 오웰의 경우엔 집에 책이 있어서 있는 책들 읽기 시작해서 없는 책은 구입해서 찾아 읽게 되었네요.
비판적인 작가가 많지만 조지 오웰은 현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였다는게 다른 점이라고 할까요. 그리고 직접 간접으로 다가올 세계에 대한 예시랄까, 그런 것이 지금 현대를 본 듯이 쓴 것 같음을 느낄때는 정말 오싹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