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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산책 ㅣ 말들의 흐름 4
한정원 지음 / 시간의흐름 / 2020년 6월
평점 :
제목의 끝말 잇기로 다음 책을 펴내고 있는 출판사의 기획이 재미있다. <영화와 시>라는 책이 있고 그 다음이 <시와 산책>, 그 다음이 <산책과 연애> 이런 식이다. 각각 다른 작가에 의해 쓰여져 시리즈로 묶였다.
한정원. 처음 듣는 이름이지만 소개글에 의하자면 시를 쓰고, 영화에 출연, 연출한바 있으며, 현재 열세살된 고양이와 함께 읽고 걷는 날들을 보내며, 수도자가 되진 못했지만 수도자처럼 살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은 그런 날들의 기록이다.
-온 우주보다 더 큰
-추운 계절의 시작을 믿어보자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
-과일이 둥근 것은
-회색의 힘
-진실은 차츰 눈부셔야 해, 등등,
책속의 소제목들만 읽어봐도 마치 싯구 같다.
'온 우주보다 더 큰'이라는 제목은 페르난두 페소아의 시에서 따온 제목이다. 저자는 온 우주보다 더 큰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보았다. 사랑하는 것을 잃었을때의 사람의 마음이라고. 사랑을 잃었을때 사람의 마음에는 바다도 있고 벼랑도 있고 낮과 밤이 동시에 있어서 어디인지 도무지 알 수 없고 그래서 아무데도 아니라고 여기게 된다고.
어느 책에서 봤는지 기억나지 않는 이야기 하나. 겨울에 말을 타고 언 강 위를 지나간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듬해 봄에 강이 풀리고 나자 그곳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강이 얼어갈 때 소리도 같이 얼어 봉인되었다가, 강이 풀릴 때 되살아난 것이다. 말도 사람도 진작에 사라졌지만, 그들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소리가 남은 것. 눈을 감고 그 장면을 상상하면 울컥할 만큼 좋았다. (18쪽)
인용해놓은 시들도 그렇고 그 시를 해석하는 저자의 관점도 시간과 공간의 구분없이 드나드는 느낌을 준다. 삶에는 환상의 몫이 있고 상상은 도망이 아니라 믿음을 넓히는 일이라는 저자의 설명이다.
눈 속에서 귀 기울이는 자,
그 자신 무가 되어 바라본다.
거기 없는 무, 거기 있는 무를.
월러스 스티븐스라는 시인의 싯구인데 마치 동양의 선 사상을 이야기하는 듯 하다.
언 강에서 겨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운에 대해서 말했는데, 이 책의 느낌이 그런 것 같다. 언 강에서 듣는 겨울 목소리같은 느낌말이다.
산책이 일상이고 삶의 한 부분이며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버팀목이기도 한 것 같은 저자의 이야기를 읽으며 안그래도 그 책을 떠올렸는데 마침내 인용이 되어 나온다.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자>이다.
산책에서 돌아올 때마다 나는 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 지혜로워지거나 선량해진다는 뜻이 아니다. '다른 사람'은 시의 한 행에 다음 행이 입혀지는 것과 같다.
산책을 사랑했고 산책하던 중 숨을 거둔 로베르트 발저도 말한 바 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지만, 바로 그런 이유에서 다시 나 자신이 되었다. (26쪽)
책 제목과 내용과 저자에 대한 느낌이 책 전반에서 이렇게 시종일관 어울릴 수가 없다.
나도 근래에 숲으로 야산으로 산책을 자주 다니지만 다음과 같은 상상을 해본 적이 없다.
나는 11월의 숲에서 이런 장면을 그려보기도 한다. 아주 다른 장소에서 서로를 모르고 살던 잎과 땅이 만난다. 잎은 땅에게 공중에서 사는 일의 위태로움과 새가 주는 떨림과 가지에서 떨어져 나오는 아픔에 대해 말해준다. 땅은 잎에게 짐승과 인간의 발밑과 깊은 곳까지 스며드는 피에 대해 말해준다. 소곤소곤한 이야기가 낮과 밤을 이을 동안, 잎은 썩어서 형태를 잃고 땅은 잎을 안고 기다린다. 마침내 하나가 될 때까지. (39쪽)
11을 살며시 눕혀보면, 하늘을 보고 나란히 누운 사람처럼 보인다고도 했다. 11월에 읽으니 더 실감난다.
불처럼 화끈한 뜨거움은 없지만 불 대신 빛이 있을지 모른다는 상상, 자신을 일컬어 보내지 않으려고 아무것도 들이지 않는 사람이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성찰을 하는 저자는
라는 세사르 바예호 시인의 싯구를 귀하게 여긴다고 했다. (68쪽)
일부러 작정하고 쓴 글이라기보다는 저자의 방에 가면 이런 글이 가득한 노트가 쌓여 있을 것만 같다. 드러내고 싶은, 그러면서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로 가득한.
앞으로는 나를 뺀 이야기를 써나가고 싶다고 그녀는 말했지만, 언강에서 겨울의 목소리를 듣듯이 그녀가 어떤 글을 쓰든 우리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