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이름에게
김이설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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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인물들이라고 할때 그들은 파격적 인물들일때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이책 속 네 여자는 파격적 성격도 아니고 파격적 행동을 저지르지도 않는다. 오히려 평범한 범주에서 살아왔고 평범에서 지나치지 않는 미래를 계획했을 인물들이다. 네 여자는 각기 다른 인물들임에도 읽다보면 마치 한 여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같은 정신과를 다닌다는 것과 울고 있는 누군가에게 휴지를 건네거나 건네받는 행위로써 작가가 이 여자들을 연결시켜놓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환」근주는 건강검진에서 자궁경부암 추가 검사를 받으라는 통보를 받는다. 살던 곳을 떠나 지방 신도시로 이사온 후 적응하느라 불안과 초조, 스트레스로 인해 감정 기복이 심해지고 갑자기 무섭게 살이 쪄버린 그녀는 정신과를 찾아가 항우울제를 먹고 있는 중이었다. 여기에 자궁경부암 가능성은 그녀를 더욱 불안하게 하는 가운데 마침내 자궁경부암 검사 결과를 들으러 병원에 가는 길, 잠시 들른 카페에서 카페 직원이 실수로 엎지른 커피 세례를 받은 어떤 중년 여성에게 자기가 가진 티슈 뭉치를 건넨다. 이 중년 여성이 다음에 오는 작품「기만한 날들을 위해」의 선혜이다.

「기만한 날들을 위해선혜는 일찍 결혼해서 아들과 딸을 두고 있는 중년의 여자이다. 연년생 두 아이 키우는 일에 집중하며 보낸 세월이 어느 덧 23년째이다. 남편의 습관적 비정상적 생활을 알고서 속으로 분노가 쌓여가지만 이 분노를 남편을 향해 터뜨리기보다는 자기도 모르게 아이들을 향해 터뜨릴 때가 많아 딸의 원성을 사기도 한다. 아들이 입대하고 딸도 대학에 들어가 기숙사 생활을 시작한 후로 선혜는 우울증이 심해지고 감정 기복과 폭식의 문제 등으로 정신과를 찾아가게 되는데 마침내 선혜가 선택한 방법은 정신과에서 처방하는 약물이 다가 아니었다. 훨씬 더 직격탄을 떠뜨리는 방법을 선택한 그녀가 정신과 진료 차례를 기다리던 어느 날 하염없이 울고 있는 옆자리 여자에게 티슈를 내민다. 그 티슈에는 어느 브런치 카페 로고가 찍혀있다 (앞의 작품「우환」에서 근주가 티슈를 건네주었던 사람이 이 작품의 선혜). 진료를 받고 한여름 뜨거운 햇빛 아래 집으로 돌아가는 길, 머리속에는 오늘 또 어떻게 남편과 지치지 않고 싸워야할지 막막한 심정이다.

「미아」소영은 결혼 후 남편의 직장이 있는 중부지방 신도시로 이사해왔지만 낯선 도시에서 고립감과 소외감은 웬만해서 해소되질 않는다. 아직 젊은 나이이지만 깜빡깜빡 잊는 일이 잦아지고 어떤 일에도 의욕이 없으며 남편과 공감대를 찾지도 못한다. 몇달 동안 온종일 집에서 한 일이라곤 과자만 먹으며 4백편의 영화를 본 일. 남편의 권유로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기로 하는데, 의사의 처방은 어느 한편으론 효과가 있는 듯 하지만 증상이 재발되기도 하며 근원적인 소외감은 여전하다. 

남편과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터져버린 눈물이 멈추지 않자 곧바로 다시 정신과를 향한 소영, 새로운 약을 처방받고 진료실을 나와서도 눈물이 멈추지 않는데 그것을 본 진료실의 중년 여성이 핸드백에서 티슈를 꺼내 건네준다 (기만한 날들을 위해」의 선혜가 티슈를 건네준 사람이 이 작품의 소영). 그리고 다 알겠다는 눈빛을 건넨다. 이후로 소영은 그 중년 여인이 건네준 카페 티슈를 만지작거리기를 반복해본다. 그리고 성실하게 약을 먹고 하루 세끼를 챙겨먹고 집안 일을 밀리지 않고 하며 집 안에 식물을 들여 키우기 시작하는 변화를 만들어간다. 

「경년」의 ''는 중학생 아들과 초등학생 딸은 둔, 소위 갱년기에 접어든 중년의 여자이다. 중학교 학부모 모임에 참석했다가 자기의 중학생 아들이 사귀지도 않는 여자애들과 섹스를 일삼는다는 말을 전해들은 나는 기겁을 한다. 하지만 정작 중학생 아들은 그것이 왜 문제가 되냐,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하는 다른 행위들과 무엇이 다르냐, 오히려 숨기고 하는 짓보다 더 떳떳하지 않느냐며 당당하고, 남편 마저 그게 뭐 그리 호들갑 떨 일이냐, 정상적인 남자로 크는구나 라고 생각하면 되는 일이라고 아내를 핀잔한다. 암담한 나. 마침 초경을 겪게 된 딸 아이는 초경이 뭔지,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 배워서 다 알고 있지만 막상 닥치니 두렵다면서 엄마를 찾고, 그런 딸을 안고 나는 눈물을 흘린다. 


네 여자의 나이를 이미 지났거나 비슷한 나이인 입장에서, 그들과 똑같은 경험을 하진 않았어도 전혀 남의 이야기라는 느낌 없이 읽었다. 소설을 읽는다는 느낌보다 수기를 읽는 느낌이랄까. 이 네 여자는 어쩌면 한 여자일 수도 있다. 또한 나일수도, 작가일수도.

깊은 숨을 쉬게 하는 이야기들. 잃었다는 자각을 했으면 거기가 끝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깊은 숨 쉬기를 몇 차례 반복하고 겨우겨우 생각한다. 우환의 근주는 꿋꿋하게 치료를 받으며 다음을 위한 토대를 다져야 하며, 기만한 날들을 위하여의 선혜는 빈둥지 증후군 대신 이 시기야말로 주부로서의 꿀보직 기간이라 여기며 새로운 생활에 눈돌려보길 바라고 미아의 소영은 남편과의 소통 따위로 연연하기 보다 남편 외의 다른 것에 눈길을 돌려보며 보람을 찾는게 더 먼저라는 얘길 해주고 싶고, 경년의 나에게는 이제 시작하는 딸의 앞날을 위해 엄마인 내가 무너지면 안된다는 각오를 다졌으면 좋겠다. 

잃었다는 그 지점이 곧 자각의 지점이 되어 더 큰 발걸음, 아니 작은 발걸음이라도 계속할 수 있으려고 우리는 책도 읽고 생각도 하며 살아온 것이니까.

마시지도 못하는 술잔을 들고 누군가와 건배라도 외치고 싶은 마음이다. 이 책을 읽은 다른 독자님들? 아니면 작가님?

우리 모두 건재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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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티나무 2020-11-04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에 이어 이 책도 사게 될 것 같습니다.
저랑 건배해요! 아직 안 읽었지만.. ㅎㅎㅎ

hnine 2020-11-05 05:55   좋아요 0 | URL
이 책에 실린 네 작품 주인공들의 공통적 문제점 하나가 ‘소외감‘이 아닐까 싶어요. 소통의 상대로 가장 먼저 기대하는 남편이 일단 소통의 상대가 전혀 되지 않았고, 나의 고유 영역 없이 가정과 자식들 중심으로 살면서 점차 나의 이름은 쓸모 없어져가는데 아무렇지도 않을 사람 없을거예요. 그래도 작가는 다시 출발하는 여지를 보여주며 이야기를 맺더라고요. 작가에게 고마웠어요. 잃어버린 내 이름, 내 자아를 찾기 위해 작은 움직임이라도 해보는 주인공들에게 응원을 보내는 마음은 바로 저 자신에게 보내는 응원이겠지요?
함께 건배해줄 상대가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아요. 저랑 건배하자고 해주시는 분이 계셔서 마음 따뜻해지고 용기가 생기는 새벽입니다.

2020-11-06 23: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1-07 04:5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