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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그대 서랍을 열고
민혜 지음 / 해드림출판사 / 2020년 7월
평점 :
이 책은 pek님 서재에서 보았지만 전혀 아는 분 아니고 pek님으로부터 읽기를 따로 권유받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 웬지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수필가의 책이라면 강한 주장이나 의견보다는 친숙하고 정겨운 내용이지 않을까 기대를 했나보다. 꼭 그러리란 법도 없는데 이것도 선입견이나 편견이겠지만 말이다.
책 제목도 소박하고, 표지도 소박하게 만들어졌다. 떠난 그대 서랍을 열고라는 제목은 몇 년전 먼저 세상을 떠난 저자의 남편때문인 것 같다.
저자 소개를 읽은 다음 작가의 말을 읽으면서 이 책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알게 된다. 수필가로는 1992년에 등단했고 단행본 수필집도 오래 전에 낸 적이 있지만 후속은 주저하고 있는 가운데 출판사에서 기획수필집 원고 공모를 하는데 응모하여 당선되어 책이 나오게 되었단다.
<키스에 관한 고찰> 첫 글 제목부터 눈길을 끈다. 사랑의 행위의 최고는 본격 성행위보다 키스라는 것이다. 다음 글 <마늘 까던 남자>를 읽으며 책 제목의 '떠난 그대'가 1년 전 세상을 떠난 남편을 뜻함을 알게 된다.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쓰는구나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멈추지 않고 계속 페이지를 넘기게 한다. 지금의 나이를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이라고 표현했다. 어떻게 이런 표현을 만들어낼 수 있지?
'그들을 한 형제라 불러주겠다'라고 시작한 글은 대화와 수다를 비교한 글의 첫 문장이다 <대화와 수다 그리고 위트>. 말이라는 한 어미로부터 태어난 형제 같은 대화와 수다중에 형뻘인 대화가 진중한 데가 있는 반면 수다는 체면 분수 내던지고 촐랑대길 좋아하는 아우라고 한 비교가 재미있다.
카톨릭교도인 저자의 세례명을 따서 카페 안나를 차린 얘기 <카페 안나>, 육십대 중반을 넘긴 나이지만 '끼'없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얘기 <끼>, 책의 뒷부분에 실린 글들 중에 공감가는 내용들이 많다. <썸데이>라는 제목의 글은 가상의 인공지능 휴머노이드 남편에 대한 이야기라서 깜짝 놀랐고 (가까운 미래에 가능하다는 생각에), 고양이 눈빛은 고독하다고 시작한 <고양이를 좋아하세요?>, 부부가 나이 들어가면 화도 낼 수 없다는 얘기를 읽으면서 벌써 공감이 되면 어떡하니, 나 자신에게 묻기도 했다. 얼마나 대단한 글을 쓴다고 돈도 안 되는 글을 쓰며 그렇게 유세를 떠느냐는 남편 말에 발끈하여 어떻게 복수를 해줄까 째려보던 저자,
그때 언뜻 들어온 남편의 얼굴, 고개를 숙여 더욱 탄력 없이 보이는 볼과 눈두덩, 그 추레한 모습을 대하는 순간 시퍼렇게 날이 섰던 내 감정은 파김치가 되고 말았다. 남편의 얼굴엔 그가 겪고 있는 심경이 그래프처럼 드러나 있었다. 희망과 즐거움은 하향 곡선, 좌절과 허무감은 상향 곡선. 코브라 같은 마누라가 노려보는 줄도 모르는 그의 얼굴은 영락없이 무서운 엄마에게 꾸지람을 받은 어린이의 표정이었다. 순간 내 전의와 살의는 바닥으로 무참하게 주저앉고 말았다. (281쪽)
구십을 목전에 둔 친정어머니의 이야기는 책에 몇번을 등장하는데 모두 가슴을 아프게 한다.
어머니와 함께 장에 갔다가 채소 파는 할머니와 어머니가 얘기하며 웃는 모습을 보고 쓴 대목,
인생의 마지막 고지를 가고 있는 등 굽은 저들은 삶의 백전노장들일 터, 그들이 살아냈을 평생의 파노라마가 상상으로 눈앞에 어른거렸다. 산다는 건 괴물의 잔등에다 꽃을 피우라는 임무를 부여받는게 아니겠는지. 저마다의 보따리를 풀어놓으면 그들은 모두가 아홉 대가리 괴물 히드라를 쳐 죽여야 했던 영웅 헤라클레스의 작은 분신들일 것이다.
젖은 눈매 비비며 어머니를 바라본다. 따가운 6월 햇살이 어머니 머리칼 위에서 반짝반짝 은광을 반사하고 있다. 나는 그 은광을 모아 내 어머니의 머리 위에 은관 하나 얹어드린다. (290쪽)
산다는 건 괴물의 잔등에다 꽃을 피우라는 임무를 부여받는 것. 인생을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니.
<훈장>이라는 제목의 글 중 한 부분이고 책에 실린 글 들 중 제일 맘에 든 글 중 하나이다.
사회성 없고 덕은 더구나 모자라 친구가 별로 없는 나. 그나마 가끔 만나는 친구마저 코로나 때문에 못보고 있어 대화가 그리웠던 차이다. 이 책을 손에서 못놓고 읽은 것은 그런 친구를 만난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술술 넘어간다. 정말 재미있고 말 잘 하고 예리하고 아는 것 많은 친구와 얘기를 나누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듯이.
살아온 흔적은 이렇게 남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들기도 했고 이렇게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소감을 남길 수 있는 소박한 행복도 다시 확인할 수 있어 좋았다. 이런 책 또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