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하루중 죽음을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은 아침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어제 밤 눈 감고 잠이 든 이후로 다시 살아있음을 깨닫는 첫 순간이기 때문이다. 내 경우엔 그렇다. 이 책의 저자가 아침에 죽음을 생각하는 근거는 죽음을 적어도 두가지 종류로 보기 때문이다. 사회적 죽음과 육체적 죽음. 자신의 인생을 정의하던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어 삶의 의미가 사라졌을 때 사회적 죽음이, 자신의 장기가 더 이상 삶에 협조하기를 거부할 때 육체적 죽음이 온다고 했다. 육체적 죽음은 아직 맞지 않았을지라도 사회적으로 죽음을 맞은 상태, 즉 사회적 죽음과 육체적 죽음 사이의 길고 긴 연옥 상태를 '사라지는 중'에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저자는 죽음을 개인 차원에서만 본 것이 아니라 사회, 국가, 공동체, 제도, 사상 등에도 적용하였다. 개인의 육체는 살아있을지라도 개인이 속한 사회의 상태에 따라 결정되는 사회적 죽음은 개인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이러한 독특하고 예리한 관점은 계속된다.
행복의 계획은 실로 얼마나 인간에게 큰 불행을 가져다주는가. (23쪽)
우리가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개 잠시의 쾌감에 가까운, 오래 지속될 수 없는 잠깐 기분 좋음에 불과한 것인데, 그것을 새해 목표로, 인생 목표로 계획하고 바라게 되면 그 덧없음을 깨닫고 났을때 사람을 오히려 불행하게 할것이기 때문에 저자는 차라리 소소한 근심을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고 했다. 독특하나 공감 못할 바도 아니다. 아니, 내가 말로 표현 못하던 것을 정확하게 짚어주는, 우리가 에세이를 읽는 목적을 이렇게 달성시켜주고 있다.
<위력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저자는 다른 나라로 공부하러 떠나게 된 계기가 된 일에 대해 썼는데, 처음으로 논문 심사를 받던 날, '해탈에 재차 실패한 부처 지망생들처럼' (이 표현을 보시라) 앉아 있던 심사를 맡은 교수들의 첫 질문이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자, 자네 논문을 한번 간략하게 요약해보게."
요약이 끝나자 몇 가지 질의응답이 오가기 시작했고, 난 곧 깨달았다. 이 선생님들께서 내 논문을 읽지 않고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을. 선생이 논문을 채 다 읽지도 않고 심사를 하려 드는 것은 학생이 논문을 채 다 쓰지도 않고 심사를 받으려 드는 일만큼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나는 웃는 돌처럼 무기력하게 앉아 있었다. 국권 피탈의 순간에도 시간은 유유히 흘렀던 것처럼. 나는 목례를 하고 걸어 나왔고 마침내 논문은 심사를 통과했다.
그리고 이날의 일은 오랫동안 수치의 기억으로 남았다. (130쪽)
'아무튼 논문은 통과했으니' 라고 안심하기 보다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야하지 않았을까, 지금도 수치스럽고 분노를 일으키는 기억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시공간이 일상적으로 떠먹여주는 무기력을 더는 삼킬 수 없을 것 같아서 다른 나라로 공부를 하러 갔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 일상적으로 떠먹여주는 무기력에 안주하면서 살고 있지 않나.
이 책을 읽기 전엔 몰랐지만 알고 보니 저자를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게 한 글이 있었나보다. <추석이란 무엇인가 되물어라>, 지난 해 인터넷과 SNS에서 유명해진 칼럼이라고 한다. 이 책에도 실려있어 읽어보니 이 책의 다른 글들에 비해 특별히 더 튀는 편도 아니다.
추석을 맞아 모여든 친척들은 늘 그러했던 것처럼 당신의 근황에 과도한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러한 질문은 집어치워주시죠'라는 시선을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친척이 명절을 핑계로 집요하게 당신의 인생에 대해 캐물어 온다면, 그들이 평소에 직면하지 않았을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게 좋다. 당숙이 "너 언제 취직할 거니?" 라고 물으면, "곧 하겠죠, 뭐"라고 얼버무리지 말고 "당숙이란 무엇인가?" 라고 대답하라. "추석 때라서 일부러 물어보는 거란다"라고 하거든, "추석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엄마가 "너 대체 결혼할거니 말 거니?"라고 물으면, "결혼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거기에 대해 "얘가 미쳤나?" 라고 말하면, "제정신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정체성에 관련된 이러한 대화들은 신성한 주문이 되어 해묵은 잡귀와 같은 오지랖들을 내쫓고 당신에게 자유를 선사할 것이다.
칼럼이란 무엇인가. (61쪽)
저자의 글쓰는 공력이 벌써부터 평범한 에세이 수준을 넘어섰다는 것은 신춘문예 영화평론 당선 경력으로도 짐작되거니와 실제로 이 책에 실려있는 그의 영화평론 글들을 읽어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그 깨달음은 깨달은 자를 한층 더 좌절케 하는 종류의 깨달음이다. 그는 햄릿처럼 자기자신에 대한 더욱 깊이 있는 인식에 이르렀으므로 더 이상 행동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삶에 대한 보다 심오한 통찰에 근거하여 행동의 불가능성을 확인한 이에게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재량하여 성취해나가는 기획자는 더 이상 영웅이 아니다.
인생의 심오한 인식에 이른 자는 더 이상 행동할 수 없다. 성격의 우유부단함이 행동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진실이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는 진정한 행동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아는 자는 행동하지 않고, 모르는 자는 돌진한다. 이것이 인생 아니던가? (296, 300쪽, 영화 '고스트독' 평론 중에서)
철학적 사유를 담고 있는 위의 인용문은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제일 오래 마음에 남을 문장 같다. 행복을 목표로 해서 사는 것의 모순, 자기자신에 대한 인식이 지나치면 행동하지 못하게 된다는 모순. 죽음을 생각하여 살 힘을 얻는다는 모순. 모순이 진리가 되는, 이 또한 모순이라고 해야할까?
뭐니뭐니 해도 극점은 전도연과 짜라투스트라를 등장시켜 쓴 '책이 나오기까지'라는 후기 아닐까?
사회과학 교수로서 인문과학에도 관심이 많아서 김민정 시인과의 인터뷰를 보면 <논어>를 새로 번역하고 있다고 하더니 얼마전 새로운 책으로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전 중의 고전인데, 나와있는 여러 판본을 그냥 읽는 게 아니라 새로이 번역할 생각을 했다니, 누가 시켜서 할 일은 아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 양분된 의견 중 한쪽을 택하고, 일상적으로 떠먹여주는 무기력에 안주하여 살던 중 이런 논객들의 튀는 글을 읽는 것이 즐겁다. 그리고, 즐거운데서 그쳐야 할까 생각하니 마음이 좀 무거워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