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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사람, 하정우
하정우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평점 :
걷기를 소재, 주제로 한 책이 어디 한두권이냐 싶어 이 책의 인기를 보면서도 읽을까 말까 상태로 있던 참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읽었다. <미술이야기> 같은 책을 줄 치고 메모해가며 읽고 난 후라서 더더욱, 휙휙 책장 넘겨가며 읽는 재미를 이 책이 충분히 안겨주었다. 그리고도 헛읽었다는 여운을 남기지 않으니, 읽기를 잘 한 것이다.
예상하던 내용도 있고 예상하지 않았던 발견도 있었다.
예상하던 내용은 걷기가 주는 덕에 대한 것이다. 내 일기장 한 구석에 적혀 있는 말, "걷는데 힌트가 있다". 아마도 이 책을 읽기 시작할 때 예상했던 내용이란 내가 일기장에 적어놓은 그 힌트라는 것과 관련있을 것이다. 두 다리를 계속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는 그 반복 행위는 힘이 남을 때 하는게 아니라 힘이 들때 할 수도 있다는 것. 근래에는 마음이 힘들때는 물론이고 몸이 힘들때, 특히 몸 어딘가 무겁고 뭉쳐있는 느낌이 들때도 오히려 걸어줌으로써 뭉친곳을 풀어주고 무거움을 덜어주기도 한다는 것을 깨닫는 중이다.
저자는 2011년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남자 최우수 연기상 2연패 가능성을 두고 절대 일어날리 없다는 생각으로 국토대장정을 공약으로 걸었다가 결국 서울에서 해남까지 577km 국토대장정을 하게 되었다. 평소엔 평균 하루 3만보를 걷는다. 영화배우, 감독, 그림까지 그리는 그의 직업상 매우 자유분방한 생활을 할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의외로 그는 루틴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우선 집에 있는 러닝머신 위에 걸터앉아 잠을 깨고 걷기부터 한다는 것이다. 집에서 영화사까지 자전거도 아니고 두발로 걸어서 오고 간다는 것, 외식보다 집에서 만들어 먹는걸 좋아한다는 것, 아침 식사는 반드시 챙겨먹는 것 등.
나에겐 일상의 루틴이 닻의 기능을 한다. 위기상황에서도 매일 꾸준히 지켜온 루틴을 반복하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희미하게나마 보인다. 실제로 내가 아는 한 정신과 의사는 정신적으로 불안한 환자들에게 그게 무엇이든 루틴을 정해놓고 어떤 기분이 들든 무조건 지킬 것을 권한다. (165쪽)
육체 피로는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회복되는 수가 많지만 정신적 피로는 가만히 누워있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며 힘들땐 다음과 같이 되뇌인다고 한다.
'아, 힘들다…… 걸어야겠다.'
힘드니 걸어야겠다는 말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알리라. 힘들때 걷고 답이 안보일때 걷고 생각이 너무 동시다발로 많이 차 있을때 털어내기 위해 걷고.
이 책에는 물론 걷는 얘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배우 생활, 감독 생활, 그림그리는 사람으로서의 생활 내용으로 지면을 채우기도 한다. 성장과정에 대한 얘기로 상당 분량 채울만도 한데 그건 아니었다.
어릴 때 친구들과 소꼽놀이나 인형놀이 같은 것을 할 때 보면 내가 봐도 지루하게 비슷한 옷, 비슷한 내용의 말, 의미없는 동작만 되풀이하며 노는 아이가 있고 밥상을 차리고 옷을 갈아 입히고 일을 만들어내면서 유난히 재미있게 노는 친구가 있다. 함께 놀면서도 그런 친구는 어쩌면 저렇게 재미있게 놀까, 유심히 보게 되었던 기억이 있다. 하정우의 이 책을 읽으며 그때 생각이 났다. 자기 삶을, 자기 시간을 재미있게 만들어 채워나가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나의 고유 영역이자 특권이다. 대단한 일이 일어나서 나에게 즐거움과 행복을 안겨줄 날을 기다리며 현재를 그저 기다리고 때우는 시간으로 넘겨버리는게 아니라 남들이 대수롭지 않게 보는 평범한 일이라도 내가 내 방식으로 꾸려나간다는 것은 참 멋진 일이다. 바로 그럴 때 우리는 내 삶에 대해 자부심과 당당함을 가질 수 있는게 아닐까. 내 삶이 무료하고 시시하고 외롭고 우울하다는 생각이 스물거릴때 점검해볼 사항이다.
나 역시 매일 걷는 걸 어쩌면 읽기보다 더 루틴으로 삼고 있는 사람 중 하나임에도 한번도 하정우처럼 그것에 대해 의미를 두어본 적이 없다. 분명 걷기의 효과를 몸으로 마음으로 느끼고, 필요해서 걷기 시작했음에도 그게 이렇게 책을 낼 만한 일인가생각했을 뿐.
걷기가 아니면 어떠랴. 내 삶을 내 삶으로 꾸려나가기 위해 나는 무엇을 루틴으로 하고 있는지, 푸념 말고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라고 이 책이 가르쳐준다. 이건 예상하지 않았던 발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