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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1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평점 :
우리가 가령 가난한 연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써본다고 하자. 가난을 직접 겪어보지 못했다면 듣고 본것에 의지해서, 상상을 가미해서 쓸 것이고 그 상상도 그리 새로울 것 없을, 십중팔구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를 지어내는데 그치지 않을까. 몸소 가난을 뼈저리게 경험한 사람이라면 너무 사실적이고 고발적인 이야기로 빠지기 쉽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읽는 사람의 동정심을 불러 일으킬까 머리를 쥐어짜며 말이다.
이 소설에서 가난한 40대 남자와 가난하고 병약한 20대 여자는 서로 편지를 주고 받는 형식으로 그들이 가진 모든 걸 보여준다. 남이 쓴 글을 옮겨적는 일을 하는 하급 관리 마까르 제부쉬킨. 일 자체도 단순하고 보잘것 없는데다가 그나마 정기적으로 일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서 돈이 떨어지면 그야말로 먹고 입는 것도 제대로 못하는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다.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다. 오로지 편지를 주고 받는 바르바라 외에는.
마까르 제부쉬킨이 유일하게 소통하는 여자 바르바라는 나이로 보자면 제부쉬킨의 딸 격인 20대, 병약하고 가난한 여자이다. 이미 부모를 모두 여의었고 혼자 마음 속으로 좋아하던 첫사랑까지 병으로 먼저 떠나보낸 일을 겪은, 마음에 상처가 많은 아가씨이다. 집도 없고 변변하게 수입이 될만한 일을 못하니 궁핍하게 살고 있지만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문학적 소양을 갖추고 있어 여러 모로 제부쉬킨과는 달라보인다. 그녀는 끊임없이 제부쉬킨에게 이책 저책을 권하며 읽어보라고 하고 제부쉬킨은 읽으려고 노력하지만 그가 더 관심있는 것은 소위 3류 소설이라고 하는 단순한 책들이다. 또한 바르바라가 책을 읽으며 정신적 빈곤을 벗어나려 하고 다른 사람이 자기와 자기의 가난한 생활을 어떻게 보는가엔 비교적 신경쓰지 않는 자존심을 지키고 있는 반면 제부쉬킨은 자기가 그렇게 가난하여 제대로 행색을 못갖추고 능력없고 비루해보이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알아채고 무시하고 대수롭지 않은 사람으로 여기며 깔보는 것에 대해 무척 신경을 쓴다. 또한 자신도 도움을 받아야할 처지이면서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그냥 보아넘기지 못하고 무리를 해서 그들을 도와주려고 한다. 물론 여기에는 바르바라도 포함된다. 바르바라는 이런 제부쉬킨의 행동에 대해 그러지 말것을 당부하기도 하지만 제부쉬킨은 자기가 좀 더 도와주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할 뿐 멈추지 않는다. 옮긴이 석영중 교수는 해설에서 이런 것들이 둘 사이의 좁혀질 수 없는 차이를 만들고 있다면서 비극적 결별을 예고하는 것이라고까지 했다.
결말에서 바르바라가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는 대목은 이제까지의 어떤 가난한 상황보다 더 비극적이다. 그 선택의 배경에는 자신의 극도의 가난도 가난이지만 그대로 있다가는 자기때문에 제부쉬킨의 파멸까지 초래할지 모른다는 자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그 선택이 제부쉬킨을 파멸에서 구제했을까 하는 것은 의문이다.
가난을 묘사하는 도스트예프스키의 능력이랄까, 정말 탁월하다. 우연히 지나다 듣게 된 옆집 남자의 흐느낌, 상사 앞에 서 있는데 하필 입고 있던 낡은 옷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단추가 눈 앞에서 떨어져 버리는 장면, 그것에 대한 제부쉬킨의 심리 묘사등은 도스트예프스키가 이 작품을 겨우 25세때 처녀작으로 발표하였음에도 일약 문단의 주목을 받게 한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누구는 태어날때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돈 자루로 실컷 먹고 마시고 즐겨라, 누구는 입맛이나 다시거라 너는 그거면 충분하느니라 알겠느냐 너는 그런 인간이란 말이다'라는 생각을 한다는 제부쉬킨의 말에서도 보이듯이 그당시 자본주의 사회로 급변해가는 과도기 러시아 사회를 고발하는 문장도 여기 저기서 엿볼 수 있다.
천재들이란 그 업적이 당대에서 빛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로 계속 그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들이다. 도스트예프스키의 영향을 받은 문학가나 철학자들은 계속 있어왔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쏟아지는 신간에도 눈이 가지만 가끔 이렇게 오래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어볼 때가 있다. 세번까지 읽어본 책이 있는데 앙드레 지드의 <지성의 양식>이었고 도스트예프스키의 이 책은 이번이 두번째. 다락방님의 글을 읽고서이다.
영어에서처럼 러시아어에서도 가난이란 단어가 불쌍하다는 뜻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가난한 사람들은 도스트예프스키가 살았던 그 시대에만 있지 않다. 지금도 여전히, 어쩌면 더 극빈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우리 옆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