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수기의 전문가들
김한민 지음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첫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눈을 떼지 않고 단숨에 읽었다. 그림이 들어가있고 글자는 드문드문 있는,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그래픽 노블 쯤으로 생각했는데, 제목을 보고 알아차렸어야 했다. 그림이 들어가 있고 글자가 드문드문 있는 것은 맞지만 가볍게 읽을 내용만은 아니라는 것을.

몇년 전 일을 손에서 놓은 후 지금까지 다시 일을 찾지 못한 상태이고 그런 기간이 길어져가는 생활에 적응하고 있는 나로서는, 이제 내 인생의 성수기는 끝나고 비수기에 들어가나보다 라는 생각을 자주 하고 있는게 사실이다. 그리고 더 울적한 것은 그 비수기가 언제까지나 계속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때이다. 아마도 나처럼 인생의 비수기를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러 있을테지만 이 책의 저자처럼 비수기의 "전문가들"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다. 저자는 확실히 남들과 다른 구석을 가진 사람, 남들과 다른 구석을 숨기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고수하고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남이 보기에 비수기로 사는 삶 같은 그 생활이 저자 자신에게는 곧 성수기의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과 호랑이의 비교로 시작하는 첫 페이지부터 저자의 독특함에 빠져들어간다. 곰은 마늘과 쑥을 먹으며 인내한 끝에 사람으로 변했는데 못참고 뛰쳐나간 호랑이는 과연 그 후로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내용이다. 끝까지 사람이 되리란 믿음을 의심하지 않고 버텨낸 곰은 주류가 되었고 호랑이처럼 바깥 세상으로 뛰쳐나간 존재는 비주류가 되는 것일까 저자는 의문표를 던지면서, 이런 호랑이와 같은 인간형을 '호모 티게르'라고 명명하였고 자기가 그런 사람을 한 명 발견하는데 성공했다고 했다. 이후의 내용은 그 호모 티게르, 어쩌면 저자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독백 형식으로 하고 있다. 그는 도망자이기도 하고, 시인이기도 하며, 초심자, 성자, 아이, 등등 여러 가지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한번은 인적 드문 동굴까지 찾아온 보따리 행상이 있었다.

내 발명품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시 쓰고 앉았네."

흥정 끝에 그 표현을 사들였다.

그렇게 시를 만지기 시작했다.

싸고, 짧아서. (17쪽)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면세점을 경멸했다.

이토록 많은 물건 중에 갖고 싶은게 단 한 개도 없다면 면세점과 나, 둘 중 하나는 잘못된 거다.

나 같은 사람이 많았다면 자본주의는 진작에 멈췄겠지. (31쪽)

여기도 그런 사람 하나 있는데 한 명 더 보탠다고 자본주의가 멈추진 않겠지요 작가님.

 

그가 살던 나라는 유난히 비슷비슷한 사람들이 많았고,

갈수록 더 늘고 있었어.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걸 보고, 같은 이야기를 하고, 같은 걸 좋아하고, 같은 반응을 하고, 같은 걸 먹고,

그 무수한 같음을 위해 기꺼이 우르르 줄 서는 사람들. (44쪽)

그가 살던 나라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나라.

 

미친 듯이 갈구한 자유

정작 주어지면 피운 딴전 (54쪽)

 

고통의 영화관

가만히 앉아서 재미 보겠다는 사람들이 훌륭할 인품을 지녔을 리 만무하다. (77쪽)

가만히 앉아서 재미 보겠다는 사람들이라는 말에 움찔.

 

제도권 사회뿐만이 아닙니다. 주류를 지양한다는 이들도 '탈주', '가로지르기', '지평 확장'등 말은 잘하지만, 구체적인 삶에서는 절대로 호랑이를 키우지 않습니다. 조금 다른 곰, 약간 다른 동굴을 추구할 뿐입니다. (...) 철학자, 작가, 시인, 비평가라는 자들도 입으론 호랑이 정신을 부추기지만, 그들 역시 자기 주변은 곰들로 채우고 안온한 동굴을 확보한 후, 그제서야 추위에 대해, 곰이 아닌 것들에 대해 씁니다. 그렇습니다. '쓸'뿐, 살진 않습니다. (83쪽)

'읽을'뿐, 그렇게 살진 않습니다 라고, 책 읽는 나에게도 적용시켜 말해본다.

 

뻔뻔하면 스타일이고 쭈뼛쭈뼛하면 먹잇감이라고 했으니 (111쪽), 이제부터 뻔뻔할 것.

느린 자살, 컴마하고 '삶'이라고 하였다. 느린 자살이 곧 삶이라는 뜻일것이다.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 말고 돌아가지 않는 세상의 원리를 알고 싶다고 한 호모 티게르, 아니 작가 김한민.

그는 비수기의 전문가가 아니라 이 자체로서 성수기의 삶을 살고 있는게 아닐까.

그렇게 인정받을 수 있는 세상이 아쉬워서 이 책을 쓴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에게 이 책이 너무 특별하고 재미있게 읽혔다는 것, 어렵지 않게 공감하며 읽혔다는 것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하나.

 

(참고로, 얼마전에 역시 재미있게 읽은 책 <비숲>을 쓴 긴팔원숭이박사 김산하는 저자의 친형)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목나무 2019-05-03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김한민 작가를 그저 페소아 번역가로만 알고 있었고, 직접 그림과 글을 쓴다는 건 알았지만 별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에이치나인님 글보니 문득 김한민 작가 본인의 글을 보고싶어졌어요! 덕분에 아침부터 김한민 작가의 이런저런 책들을 구경하고 있습니다. ^^ 더불어 <비숲>도 궁금하구요.

hnine 2019-05-03 12:19   좋아요 1 | URL
여러 가지 다양한 일을 하고 있던데 번역도 그 중 하나이고요.
말씀하신대로 김한민 작가 본인의 글을 읽어보신다면 이 분의 독특함을 아시게 될거예요. 공감하셔도, 그렇지 않으셔도, 한번 읽어보실만한 책이라고 추천하고 싶은데요.
김산하 박사의 <비숲>도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이것도 추천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