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트 만드는 일은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장기, 단기, 평일, 주말, 바쁜 날뿐 아니라 한가한 날은 한가한 날대로 모처럼 생긴 여유를 어떻게 보내야 아깝지 않을까 더 고심하며 리스트를 만들었다.
제일 촘촘한 리스트를 만들게 된건 고3 수험생 시절이 아니라 아이엄마 타이틀을 달고 난 후였다. 아이 중심의 일정을 먼저 적어넣고서 그 사이사이에 요령있게 내 스케쥴을 끼워넣어야 하기 때문에 내 일은 한 단위가 아니라 늘 조각조각 나뉘어 들어가야했다. 아마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리스트 작성은 시간관리의 기본이고 핵심인 것은 사실이지만 누구나 언젠가는 이런 리스트 없이 살아보길 꿈꾸지 않는가?
눈뜨면, 아니 잠들기 전 다음날 할 일 리스트를 만들어놓고 그것에 따라 임무 수행하듯이 살아온 수십년.
작년 여름 이후 나는 직업이라고 해오던 일을 어찌어찌 해서 그만두게 되었고, 내 일정의 중심에 있던 아이도 고등학생이 된 후로 내 역할은 아이 일정을 쫓아 다니는 대신 아이가 스스로 자기 할일을 알아서 하게 '지켜봐주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굳이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 해야할 일 리스트를 작성할 필요가 없어졌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은 어디일까. 울적했다. 아직도 가끔 울적할 때가 있다.
하지만 이 얼마나 복에 겨운 생각인지 깨닫고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때를 그리고 바라며 일하고 있을텐데. 리스트가 굳이 필요없는 하루 말이다. 그런 시간이 주어졌는데 (자의든 타의든) 그걸 우울의 이유로 삼아 늪으로 끌고 들어갈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한 것이다.
버킷리스트를 만들지 않는 이유는 만약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미래의 어느 시간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희망사항으로 리스트에 올려놓고 나중에 저절로 이루어지길 바라게 되는 것은 아닐지. 또는, 희망사항이 어느 순간 숙제의 일종, 해야만 할 일로 둔갑해버리는 것은 아닐지.
난 그냥 오늘 하루, 가능한 범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 것이다.
소.확.행.
그말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