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소개한 조은의 시들은 그나마 공감하고 좋아하고 부러워할수 있는 즐거움이 있었는데 반해, 뒤이어 읽은 신용목의 시들은 부러워도 못하겠다. 시가 너무 난해해서 이해도 안되고 공감도 못하겠다면 차라리 이건 내가 좋아할 타입이 아니라고 제껴두고 말았을텐데. 그런 시집일거라 지레 짐작하고 여태 읽어볼 생각을 안하고 있었던 것을 얼마전 '노을 만평'이라는 시를 만나게 된 것을 계기로 마침내 구입하여 읽게 된 것이다.
과연 언어를 부리는 능력이 특별했다.
고생대가 데려가지 않은 은행나무 아래서 빗소리를
듣는다
버려진 그늘
-'투명한 뼈' 중에서-
한 상황에서 이 시인은 도대체 얼마나 광범위한 시간대와 단어들과 소리와 감각과 경험을 동시에 떠올릴 수 있는 것일까. 그렇게 조합되어 나오는 한줄 문장이 어찌 독특하고 세밀하고 정확하지 않으며 특별한 느낌이 들지 않을까.
통증처럼 뱉어내는 새떼/
...
바람에도 지층이 있다면 그들의 화석에는 저녁만이 남을 것이다/
...
내 각오는 세월의 추를 끄는 흔들림이 아니었다/
...
아버지의 뼈 속에는 바람이 있다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시 '갈대등본'중에서 몇 구절 뽑아본 것인데 이 시 마지막 구절이 이 시집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런데 몇번 반복해서 읽다가 생긴 의문점. 여기서 '걸어야 한다'가 다음 중 어떤 뜻으로 쓰인 것인지. walk? hang? bet?
어떤 걸 넣어도 뜻이 안통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행을 나누는 방법이 독특한 것을 모르고 잘못 교정이 된 줄 알았다.
신촌 현대백화점 앞
누에처럼 꿈틀거리는 버스들이
비 먹은 옷깃을 싣고 떠날 때
쓸모를 다한 한
장 복권이 젖는다
-'복권 한장 젖는 저녁' 중에서-
'한 장 복권'의 한 과 장을 저렇게 띄어쓸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뒤에 다른 시에도 비슷한 예가 나와서 이건 시인이 의도한 바 임을 알았다.
어둠을 길들이던 달빛이 어둠이 될 때까지
내가 깎은 내
마음의 절벽을 긁어내리는 손
톱
자
국
-'목련꽃 지는 자리' 중에서-
그래도 이 시집에서 개인적으로 제일 수작이라고 꼽고 싶은 시가 있었을까?
있다. 한번 베껴써보지 않을 수 없었던.
다비식
바위 위에 바위보다 한 발은 더 바다로 나가 석양볕에
늙은 뼈를 태우는 해송을 본다
서해 변산
물 위에,
하늘의 다비식
가지 저 끝에서 타올랐으니 그래서 어두웠으니
휘어진 허리 감고 사리 같은 달과 별 더러 나오리
날마다, 그러나 파도 끝 붉게 젖는 때
또 한 줄 바람을 긋고 갈라지는 채석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