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면허 - 이동하는 인류의 자유와 통제의 역사
패트릭 빅스비 지음, 박중서 옮김 / 작가정신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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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한해의 반이 지나갔다. 출퇴근길에 이글거리는 태양을 마주하고, 가열된 열섬의 공기를 마시며 휴가를 떠올리게 되는 계절이다. 언제부터인가 비행기표를 먼저 찾아보게 되는 여행 패턴. 국내가 아닌 이상 여권 유효기간부터 확인하게 된다. 그러고보니 여권이라는 것이 언제부터 생겼을까.




『여행면허』는 파라오 시대의 이집트와 한나라 중국에서부터 현대의 여권 심사대와 난민 캠프에 이르기까지, 여권의 기원을 추적하며 그 문화적·정치적 의미를 다각도로 조명하는 책이다. 특히 저자는 단순히 제도적·법적 측면에 머무르지 않고, 예술가, 작가, 영화감독 등 다양한 인물들의 경험과 문학·영화·예술 속 여권의 모습을 통해 여권이 인간의 삶에 미친 영향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여권이라는 이 일상적이면서도 필수적인 문서를 통해 인간의 이동, 정체성, 국가 권력, 그리고 자유의 의미를 깊이 있게 생각해보게 하는 흥미로운 책이다. 세계사 혹은 문화사적 탐구서, 혹은 사회학 서적 그 어딘가에 머무는 책.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각 부는 다시 1~3장으로 나뉘어 서술된다. 1부는 여권의 일종의 ‘선사시대’로, 여행 허가증의 초기 형태와 그 사회적 맥락을 다룬다. 2부에서는 여권 제도의 본격적 등장과 제도화 과정을, 3부는 오늘날 여권이 갖는 의미와 여전히 남아 있는 배제와 통제의 문제를 다룬다. 예를 들어, 20세기 초 모더니스트 작가 앙드레 지드와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친구를 만나기 위해 겪었던 ‘여권의 번거로움’을 편지에서 토로하거나, 슈테판 츠바이크가 1914년 이전에는 ‘지구가 모두의 것이었다’고 회상하는 대목 등은 여권이 개인의 자유와 이동성에 미친 영향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여권이 국가 행정체계 안에서 어떻게 서류적 정체성을 구축해왔는지에 관해서도 다룬다. 서류 속의 우리는 실제의 우리가 아니라, 정부가 인정한 이름과 사진, 생년월일, 국적 등의 데이터적 주체다. 이런 점에서 여권은 오늘날 디지털 신원 확인 시스템이나 생체 인식 ID와도 궤를 같이한다.

문학적이고 유려한 문체, 폭넓은 사례, 그리고 예술적 감수성이 어우러진 이 책은 여권을 둘러싼 역사와 문화를 새롭게 바라보게도 한다. 예술가와 지식인, 작가, 음악가 등의 다양한 여권에 대한 경험이나 여권이 등장하는 문학, 영화적 장면들이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부분은 단순한 제도사나 정치사와 달리, 인간의 경험과 감정, 예술과 사유의 영역까지 아우르며 여권이 어떻게 현대 세계와 인간성을 정의해왔는지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헤밍웨이의 여권 신청서에 "writer(작가)" 대신 "waiter(웨이터)"로 오기되었던 일화, 다다이즘 예술가(다다이스트)였던 시인 폴 엘뤼아르가 독일 화가 막스 에른스트에게 여권을 보내줘 국경을 넘을 수 있던 사연, 거트루드 스타인의 『자서전』 과 공식적인 여권의 관계 등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그 외에도 난민의 절박한 탈출, 예술가의 국경 통과, 여행자와 망명자의 불안과 기대 등은 여권을 둘러싼 감정의 스펙트럼을 드러낸다. 여권이 단순한 행정적 문서를 떠나 인간성을 정의하는 문화적 매개체가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저자는 여권이 "다른 어떤 역사적 문서보다도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라고 전한다. 내 여권에 찍힌 도장, 사진, 만료일, 내 국적등은 모두 내가 지나온 길과 앞으로 가고 싶은 곳,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겪은 감정과 경험을 상기시키는 단서가 될 수 있다. 여권에는 내가 어디를 다녀왔는지, 왜 갔는지, 어디에 가지 못했는지, 어떤 경계에서 멈추었는지 등, 개인의 선택과 한계, 그리고 그때 느꼈던 감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나의 개인적 여행경험이 결코 사소하지 않다는 것도 말이다. 여권을 들여다보는 짧은 시간이 어쩌면 내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도 깨닫는다.

여권이라는 일상적인 사물 하나로, 근대국가의 작동방식, 국가와 개인의 관계, 행정기술의 역사, 인종과 젠더의 편견, 그리고 자유와 감시의 딜레마까지 짚어내는 지적 여정을 떠나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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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병과 마법사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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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인 윤해는 왕의 조카로 태어났지만, 숙부이자 폭군인 ‘영위’ 왕의 견제와 감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제일 안쪽 방에 처박혀서 십오 년 넘게 책만 읽었다고. 멋진 날개를 달고 태어났는데 펼쳐본 적이 없어. 접혀서 몸에 딱 붙어있는 것만 같아.(p30)“ 라며 괴로워한다. 권력에서 밀려나 숨죽이고 있는 그녀의 아버지는 윤해를 정치적 도구로 삼아 정략결혼을 시키려 한다. 그러나 윤해의 약혼자인 종마금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고, 오히려 몰래 암살하려고 한다. 죽음의 위기 속에서 윤해는 알 수 없는 목소리를 듣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마법의 힘을 각성하여 곰처럼 크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곰개’를 소환해 목숨을 구한다. ”윤해가 운명으로부터 자신을 구한 날이었다.(p45)“






윤해의 마법 각성 과정은 단순히 특별한 능력을 얻는 사건이 아니라, 그녀의 정체성과 자유의지, 그리고 세계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상징하는 듯했다. 억압과 위기의 순간, 자신도 알지 못했던 내면의 힘을 깨우며 곰개를 소환하는 과정은 외부의 강요와 통제(정략결혼, 암살 위협, 왕의 견제) 속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자각하고, 운명에 맞서기 시작하는 변화의 출발점으로, 주인공이 더 이상 타인의 의지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삶과 미래를 스스로 선택하는 성장의 계기인 셈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윤해는 궁에서 쫓겨나듯 북방의 변경, ’술름고리‘ 라는 곳으로 떠나게 된다. 경작인 세계와 마목인 세계의 경계에 자리한 슬름고리 성은 경작인 성주가 마목인 군장에게 명령을 내려온 곳이다. 그곳에서 기병 달낙현을 만나게 된다. 전장에서 오래 살아남은, 슬름고리 방어군 좌기대대감인 달낙현의 이름은 마목인으로서는 ’다르나킨‘이라고 발음된다. 초원의 다른 마목인 부족들이 성을 계속 공격해오고, 윤해는 책에서만 보던 병법이 아닌 실제 전쟁을 통해 병법을 배워간다.

국내 판타지 소설들은 대체로 중세 유럽식 귀족 사회, 유럽식 마법 체계, 기사와 마법사, 공작·백작 등 서양적 계급 구조를 반복적으로 차용한다. 그러나 『기병과 마법사』는 전형적인 중세 유럽식 판타지와 거리를 두고 대신 몽골 기병을 연상시키는 군대와 전투 스타일, 초원 국가 구조, 초원 한가운데 우뚝 솟은 ‘거문담’이라는 인공 요새 등 동아시아적인 요소를 소재로 삼아 독창적인 설정으로 세계관을 차곡차곡 쌓는다.

다르나킨과 함께 하며 윤해는 자신이 세상을 구해야 할 운명을 지녔음을 깨닫고, 점차 자신의 힘과 세계의 진실에 다가선다. ‘예언된 종말’이라는 낡은 설정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을 얼마나 감각적으로 비틀고 확장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야기 속에서는 ‘1021’이라는 숫자 등 신비로운 미스터리와 상징이 등장하며, 권력과 자유, 기억과 진실에 대한 흥미로운 요소들이 씨실과 날실로 엮이며 서사의 스케일을 확대해간다. 하이판타지라는 외피를 두르고, 여러가지 질문들이 하나의 ‘숫자’, 하나의 ‘예언’, 하나의 ‘기억’에 수렴되며, 읽는 이들을 끝까지 붙잡는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윤해의 ’마법‘이 존재한다. 그녀의 마법은 세계를 지배하거나 전장을 뒤엎는 ‘힘’이라기보다는 억압되었던 주체가 스스로의 내면을 인식하고 선택하게 되는 일종의 ’자각의 힘‘으로서 위력을 더욱 발휘한다. 마법은 주문을 외울 때가 아니라, 주인공이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믿은 순간에 일어났으니 말이다. 언젠가 묻힌 목소리는, 결국 가장 절실한 순간에 다시 피어나는 것처럼.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이 소설을 위해 ’한반도 지역의 기병에 관한 논문을 30편 정도 읽었다‘ 라고 이야기하면서, ”궁지에 몰린 사람이 그 위기를 깨고 새롭게 거듭나는 이야기“인 이 소설은 ”자기 자신을 구함으로써 어지러운 세상을 구하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또한 재앙이 닥쳐오는데도 누구도 그 사실을 모르는 소설 속 세계를 통해, 기후 위기, 인공지능, 저출생 등 현대 사회의 위기와 무관심에 대한 경고를 담고자 했다고 한다.

작가는 독자들에게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각자가 변화의 주체가 되어야 함을 전하고자 했던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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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주의 인사 소설, 향
장은진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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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와의 관계가 끝났다고 해서 정말 모든 게 끝난 걸까. 때로는 이별 이후에야 비로소 관계가 자란다. 이별한 남녀의 재회를 다룬 장은진 작가의 신작 『세주의 인사』는 그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조용하고 섬세하게, 마치 오래 말리지 않은 꽃잎처럼 눅눅한 감정을 꺼내 보이듯이.



이야기는 스물여덟의 동하가 퇴근 후 낯선 냉장고와 화분, 그리고 ‘세주’라는 이름으로부터 온 메모를 발견하며 시작된다. 냉장고를 열자 그 안에는 얼음 대신 세주가 즐겨 읽던 책들이 가득했다. 동하는 한 권 한 권 읽어나가면서 과거에는 알지 못했던 세주의 단면과 마주하게 된다. 철 지난 계절의 책 속에서, 동하는 세주의 내면을 처음으로, 천천히, 정독한다. 세주가 사랑했던 문장들을 읽어가며 과거의 그녀를 다 아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단어 하나하나를 놓치고 있었음을 그제서야 깨닫는다. 작가의 섬세한 시선과 서정적 문체가 돋보이는 장면이었다. 그 장면 속에서 "오늘 읽은 책 모두 마음에 스며들었다(p23)" 과 "기분 나쁘지 않은 덫(p23)" 이라는 문장이 좋아 필사를 해보기도 한 시간. 


문득 내 곁의 관계들도 어쩌면 아직 다 읽지 못한 책처럼 느껴진다. 이제라도 한 장씩, 천천히 펴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세주는 동하와 6개월간 교제하다 헤어진 지 1년이 지난 인물로, 자신의 물건들을 지인들에게 나눠주고 사라졌었다. 1장 <냉장고를 부탁해>가 동하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2장 <모든 세계의 끝에는> 에서는 세주의 이야기가 서술된다. 세계의 끝을 보고 돌아온 세주는 자신의 물건을 나눠준 지인들의 집을 차례로 방문한다. 동하의 집은 그녀가 방문한 마지막 집으로, "세주는 동하의 집으로 첫발을 내디디며 다른 친구들의 화분처럼 상태가 좋지 않으면 그냥 나오기로 마음먹었다.(p51)" . 집에 들어서자 튼튼하고 아름답게 자란 '문샤인 산세베리아'를 발견한다. 동하가 없는 그의 공간에 잠시 머문 세주는 자신이 몰랐던 동하의 감정과 습관을 되짚는다. 사소한 것들이 그에 대해 말해주는 것들을 비로소 듣는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없는 자리에서 서로를 다시 읽는다.


하여튼 동하에게 책과 냉장고를 준 건 대단한 속뜻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의미라면 책보다는 오히려 숨을 쉬고 보살핌이 필요한 화분에 있었다. 생명을 책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그런데 동하가 이토록 훌륭하게 화분을 돌봐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 p56


문샤인 산세베리아는 이야기 속 상징적인 소재다. 동하는 그 식물을 정성껏 돌보고, 마침내 꽃을 피운다.단순한 화분의 개화가 아니었다. 그의 마음, 그녀의 마음, 그리고 관계라는 이름의 무언가가 조용히 변화하고 있었던 것을 상징하는 소재가 아닐까. 문샤인 산세베리아의 꽃말은 '관용' 이다. 꽃말 또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1년 반이 지난 후 재회하게 된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며 관계의 본질과 회복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게 된다. '결국 다시 만난다' 라는 드라마틱한 재회의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사이의 시간들, 그 공백 속에서 서로를 향한 이해가 자랐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우리는 종종 관계의 중심에서 상대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 사람이 없는 공간, 시간이 흐른 후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세주의 인사』는 그런 부재의 시간을 ‘이해의 시간’으로 바꾸는 과정을 조용히 따라간다. 그런 면에서 제목 속 '인사' 라는 단어는 중의적인 의미가 된다. 이별의 인사이자, 다시 건네는 첫 인사. 작가는 이 ‘인사’라는 짧은 단어를 통해 관계의 문턱에서 문을 열고 닫는 섬세한 손짓을 보여주고 있다. 


장은진 작가는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당신의 외진 곳』 등에서 내면을 섬세하고 애틋한 문체로 그려온 작가다. 내 책장 속에는 작가의 소설이 한 권 더 꽂혀있었다. ( 무려 09년 초판 작품! ) 이번 작품에서도 일상의 감정을 담담하게 풀어내며 깊은 여운을 남겼다.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상대의 세계에 다가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일지, 관계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에게 더욱 추천하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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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모르는 낙원 - 무루의 이로운 그림책 읽기
박서영(무루) 지음 / 오후의소묘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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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이유를 아직 다 모른 채로 좋아하게 되는 이야기들이 있다. 이때 부사 '아직'에는 어떤 낙관이 있다. 명료한 이해로 가두지 않는 세계, 끝까지 알 수 없는 아름다움, 틈새의 발견, 넘나듦의 경험, 나를 한 칸 더 넓히는 기쁨이 있으리라는 기대가 그 속에 있다.

- p5 프롤로그



책의 제목은 왜 『우리가 모르는 낙원』 일까. 책을 펼치면 프롤로그에서 그 궁금증이 금방 풀린다. 

읽고 쓰는 동안 우리가 함께 다다르고 싶은 장소들이 많았다. 모두 다른 풍경이었다. 그래서 알았다. 낙원이란 도착하는 장소가 아니라 도착하려고 길을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 벽이 놓인 곳에서 더 나아가 보라고 어떤 이야기들이 내게 말해주었다. 벽이 놓인 곳에서 더 나아가 보라고 어떤 이야기들이 내게 말해주었다. 등 미는 손길이 내내 다정했다. 

- p7 프롤로그 중에서 

작가는 익숙한 일상 속에서 우리가 무심히 지나친 풍경들을 조용히 짚어낸다. 작가가 전하는 것처럼 낙원은 '도착하려고 길을 만드는 일' 이었고, 어쩌면 우리의 삶은 ‘낙원’에 가까웠는데, 너무 가까워서 알아차리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책은 총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마다 두 권의 그림책들에 관한 에세이가 포함된다. 총 20권의 그림책을 만날 수 있는 셈이다. 에세이 속에 등장하는 그림책들을 함께 찾아 읽으니 저자의 이야기가 더욱 가깝게 다가온다. 


'고독', '사랑' 에서 부터 '연대' 에 관한 이야기나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까지 그림책에서 건져낸다. 무루의 글은 ‘책 소개’가 아니라 ‘책과의 대화’에 가깝다. 그림책은 그녀의 내면 풍경을 비추는 거울이 되고,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자기 마음의 결을 만져본다. 그리고 독자인 우리에게 조심스레 그 조각들을 내어준다. 


저자의 이야기들은 내 기억과 감정 속으로 흘러들었다.  "이 세계의 남성들을 불신하고 적대하게 되었던 최악의 경험은 모두 20대에 일어났다.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늦은 밤 골목길에서 빈번하게 일어났던 추행과 위협, 술자리에서 은근하거나 노골적으로 건네졌던 추파들..(p163)" 저자의 말처럼 나 또한 "매 순간 내가 여자라서 이것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또렷이 자각했다".  저자는 쥘리 델포르트의 그래픽 노블 『여자아이이고 싶은 적 없었어』 를 소환한다. 아직 읽어보지 못한 책이라 읽어야 할 목록에 추가해두었다. 



이 세계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일에 관한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어떻게 싸울 것인가' 만큼이나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 p165, 8장.자매들의 실뜨기,  함께 추는 춤 - 『여자아이이고 싶은 적 없었어』


따뜻하고 다정한 글들은 각자의 삶에 내재된 결핍과 이상함,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태도를 조용히 응원하고 있다. 그리고 전작에서부터 이야기해왔듯 '자신의 가장자리를 한 칸씩 넓혀가며, 서로에게 다정한 얼굴이 되어주는 세계'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믿음을 전하는 듯하다. 낯선 조각을 품은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작은 낙원이 되어줄 수 있음을 조용히 일깨워 준다. 이 책 속 이야기 속에서 누구나 한 권쯤 자신만의 그림책을 떠올리게 되리라. 그림책은 이야기보다는 오래 남는 감정의 기억일 테니 말이다. 

표지를 비롯하여 책 속의 페이지에는 폴란드의 주목받는 아티스트 요안나 카르포비치의 '아누비스Anubis' 연작 그림 열 점이 펼침면 가득 실려있다. 고대 이집트에서 죽음의 신으로 불렸던 자칼 형상의 아누비스를 평범한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계 곳곳에 머물도록 그려낸 일러스트들이다. 그림책에 관한 이야기 속에서 또 다른 그림책을 만나는 기분이다. 책의 후반부에는 각 장별 대표 그림책을 비롯하여 함께 읽으면 더욱 좋을 그림책들을 추천해두고 있어서 더욱 좋다.

그림책은 아이들만의 책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깨닫는다. 어른들도 그림책을 통해 삶의 다양한 결을 경험하고, 자신이 몰랐던 감정이나 생각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모르는 낙원』은 그림책을 좋아하는 이에게는 멋진 '선물'로, 그림책에 익숙하지 않은 이에게는 친절한 '마중물'로 다가간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자신만의 속도로 세계를 탐색하는 이들에게 건네는 다정한 위로이자 응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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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일기
소피 퓌자스.니콜라 말레 지음, 이정순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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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다는 건, 늘 무언가를 흘려보낸다는 것이 아닐까. 감정은 흐르고, 순간은 지나가고, 말은 머물지 않는다. 그래서 어쩌면, 나는(어쩌면 우리는) 기록한다.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을 잠시나마 머물게 하기 위해.

소설가, 화가, 철학자 등 다양한 직업과 배경을 가진 87인의 일기가 빼곡하게 수록되어 있는 『내면일기』 를 읽으며 나는 내 일기의 모습을 떠올렸다. 책 속의 각 인물들은 저마다 다른 시대와 공간에서 살았지만, 사랑, 애도, 삶의 위기, 고독, 자기성찰, 역사적 사건, 여행 등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을 일기로 기록했다. 누군가가 쓴 일기를 읽다 보면 그 사람이 텍스트 너머의 사람이 아니라 실제로 삶을 살아낸 인물이라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된다.




무언가를 걱정하고, 기대하고, 다짐했던 그 마음.그 순간의 체온이 문장 너머로 전해지는 『내면일기』 에는 내게 익숙한 유명 작가들뿐 아니라, 이름이 생소한 역사적 인물들의 일기까지 포함되어 있다. 책은 3부로 나뉘는데, 1부는 <내밀함>, 2부는 <시선>, 3부는 <여행>에 관련된 일기들이 나뉘어 수록되어 있다. 각각의 부는 주제에 포함되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2~3개의 장으로 다시 나뉜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일기는 1부의 1장 <사랑>편에, 프란츠 카프카와 버지니아 울프의 일기는 1부의 3장 <고독과 자기성찰> 편에 수록되어 있는 식이다.

각 페이지는 작가와 예술가들의 일기에서 발췌한 주요 텍스트와 필사본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은 한 인물의 일기에서 발췌한 텍스트와 그 인물의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글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앤솔로지적 배열의 구성을 취한다. 각 인물들은 서로 직접적인 인간관계나 서사적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들을 하나로 묶는 유일한 연결고리는 ‘일기’라는 형식과, 내면의 경험을 기록했다는 점이다. 일기라는 문학의 의미와 가치를 조명하는 해설이 더해져, 일기라는 장르의 깊이를 생각해볼 수 있게 안내하고 있기도 하다. 나는 친숙한 인물들의 일기부터 먼저 찾아 읽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일기는 필사도 해보면서 문장을 음미해보기도 했다.

인물들은 시대, 국적, 직업, 성별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각 일기는 사랑, 상실, 창작, 고독, 역사적 격변, 자기성찰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일기 형식의 짧은 글들을 통해, 각기 다른 삶의 순간과 감정을 진솔하게 느껴보게 된다. 2부의 <시선> 편은 다양한 시선들을 만나보게 되어 좋았다. 특히 1장의 <일상 예찬>에 포함된 일기들은 내 일상의 시선들을 되돌아보게도 한다. 어떤 일기들을 통해서는 약간의 관음적 호기심을 충족하기도!

3부 <여행> 에 대한 일기들은 모험의 동반자가 된다. 3부의 일기들의 필사본에는 텍스트 뿐만 아니라 스케치들이 포함되어 있는 일기들이 또 다른 매력들을 뽐낸다. 여행 중 낯선 환경에서의 경험, 혹은 일상적인 삶의 소소한 순간들까지 여러 시선으로 세상을 관찰하고 기록한 이들의 글들을 만난다.

책의 서두에는 아니 에르노Annie Ernaux와의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으며, 필리프 르죈Philippe Lejeune의 해설이 마지막에 실려 있다. 프롤로그에서 책의 의도와 일기라는 장르의 의미를 설명하고, 본론에서 각 인물별로 일기 발췌문과 해설, 필사본 이미지를 보여준 후, 마지막 해설에서 정리한다. 책 속 인물들은 자신과 주변 세계를 관찰하고, 그 속에서 발견한 의미와 아름다움을 기록했다. 일기가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삶을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시도의 결과라는 점을 공감하게 되는 지점이다.

“나는 누구였지?” “어떤 감정을 느끼며 이 하루를 버텼지?” 하는 질문을 할 때가 있다.그때, 일기 속에 써둔 문장을 읽어본다. 아무도 모르게 적어둔 나의 말. 눈물이 그렁했던 날, 너무 좋아서 말없이 웃었던 밤, 혹은 이상하게 쓸쓸했던 아침. 그 문장을 다시 만나는 순간, 나는 ‘그때의 나’와 다시 연결된다. 그건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내가 내 삶을 제대로 통과했음을 확인하는 일이다. 『내면 일기』 를 통해 책 속 인물들의 삶과 잠시나마 연결되는 느낌을 받았던 이유다.

백과사전처럼 다양한 인물들에 대해 엿볼 수 있지만, 각 인물의 이야기가 짧게 스쳐 지나가 깊이 있는 서사에 목마름을 느끼기도 했다. 결국 그 인물들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되는 선순환이 반복된다. 화가의 그림을, 작가의 책을, 역사가의 역사적 사건들을 찾아보다보면 책이 책을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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