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모르는 낙원 - 무루의 이로운 그림책 읽기
박서영(무루) 지음 / 오후의소묘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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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이유를 아직 다 모른 채로 좋아하게 되는 이야기들이 있다. 이때 부사 '아직'에는 어떤 낙관이 있다. 명료한 이해로 가두지 않는 세계, 끝까지 알 수 없는 아름다움, 틈새의 발견, 넘나듦의 경험, 나를 한 칸 더 넓히는 기쁨이 있으리라는 기대가 그 속에 있다.

- p5 프롤로그



책의 제목은 왜 『우리가 모르는 낙원』 일까. 책을 펼치면 프롤로그에서 그 궁금증이 금방 풀린다. 

읽고 쓰는 동안 우리가 함께 다다르고 싶은 장소들이 많았다. 모두 다른 풍경이었다. 그래서 알았다. 낙원이란 도착하는 장소가 아니라 도착하려고 길을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 벽이 놓인 곳에서 더 나아가 보라고 어떤 이야기들이 내게 말해주었다. 벽이 놓인 곳에서 더 나아가 보라고 어떤 이야기들이 내게 말해주었다. 등 미는 손길이 내내 다정했다. 

- p7 프롤로그 중에서 

작가는 익숙한 일상 속에서 우리가 무심히 지나친 풍경들을 조용히 짚어낸다. 작가가 전하는 것처럼 낙원은 '도착하려고 길을 만드는 일' 이었고, 어쩌면 우리의 삶은 ‘낙원’에 가까웠는데, 너무 가까워서 알아차리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책은 총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마다 두 권의 그림책들에 관한 에세이가 포함된다. 총 20권의 그림책을 만날 수 있는 셈이다. 에세이 속에 등장하는 그림책들을 함께 찾아 읽으니 저자의 이야기가 더욱 가깝게 다가온다. 


'고독', '사랑' 에서 부터 '연대' 에 관한 이야기나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까지 그림책에서 건져낸다. 무루의 글은 ‘책 소개’가 아니라 ‘책과의 대화’에 가깝다. 그림책은 그녀의 내면 풍경을 비추는 거울이 되고,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자기 마음의 결을 만져본다. 그리고 독자인 우리에게 조심스레 그 조각들을 내어준다. 


저자의 이야기들은 내 기억과 감정 속으로 흘러들었다.  "이 세계의 남성들을 불신하고 적대하게 되었던 최악의 경험은 모두 20대에 일어났다.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늦은 밤 골목길에서 빈번하게 일어났던 추행과 위협, 술자리에서 은근하거나 노골적으로 건네졌던 추파들..(p163)" 저자의 말처럼 나 또한 "매 순간 내가 여자라서 이것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또렷이 자각했다".  저자는 쥘리 델포르트의 그래픽 노블 『여자아이이고 싶은 적 없었어』 를 소환한다. 아직 읽어보지 못한 책이라 읽어야 할 목록에 추가해두었다. 



이 세계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일에 관한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어떻게 싸울 것인가' 만큼이나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 p165, 8장.자매들의 실뜨기,  함께 추는 춤 - 『여자아이이고 싶은 적 없었어』


따뜻하고 다정한 글들은 각자의 삶에 내재된 결핍과 이상함,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태도를 조용히 응원하고 있다. 그리고 전작에서부터 이야기해왔듯 '자신의 가장자리를 한 칸씩 넓혀가며, 서로에게 다정한 얼굴이 되어주는 세계'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믿음을 전하는 듯하다. 낯선 조각을 품은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작은 낙원이 되어줄 수 있음을 조용히 일깨워 준다. 이 책 속 이야기 속에서 누구나 한 권쯤 자신만의 그림책을 떠올리게 되리라. 그림책은 이야기보다는 오래 남는 감정의 기억일 테니 말이다. 

표지를 비롯하여 책 속의 페이지에는 폴란드의 주목받는 아티스트 요안나 카르포비치의 '아누비스Anubis' 연작 그림 열 점이 펼침면 가득 실려있다. 고대 이집트에서 죽음의 신으로 불렸던 자칼 형상의 아누비스를 평범한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계 곳곳에 머물도록 그려낸 일러스트들이다. 그림책에 관한 이야기 속에서 또 다른 그림책을 만나는 기분이다. 책의 후반부에는 각 장별 대표 그림책을 비롯하여 함께 읽으면 더욱 좋을 그림책들을 추천해두고 있어서 더욱 좋다.

그림책은 아이들만의 책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깨닫는다. 어른들도 그림책을 통해 삶의 다양한 결을 경험하고, 자신이 몰랐던 감정이나 생각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모르는 낙원』은 그림책을 좋아하는 이에게는 멋진 '선물'로, 그림책에 익숙하지 않은 이에게는 친절한 '마중물'로 다가간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자신만의 속도로 세계를 탐색하는 이들에게 건네는 다정한 위로이자 응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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