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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라는 진지한 농담 -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품위를 지키는 27가지 방법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 지음, 이상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21년 9월
평점 :
제목부터 취향이다. ‘어른이라는 진지한 농담’ 이라니. 살면서 느껴왔던 ‘진지한 농담’ 의 무게를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단어들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어른이라는 진지한 농담
Die Kunst Des Lassigen Anstands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품위를 지키는 27가지 방법
알렉산더 폰 쇠부르크 지음
추수밭
저자는 이 시대를 ‘어른이 사라진 시대’ 라고 운을 떼며 책을 시작한다. 어른이 사라진 시대에 어른으로 살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상으로 삼을 만한 좌표조차 없어진다면 내가 지금 서있는 곳을 가늠할 수 없게 되고, 나아가 오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된다는 가능성조차도 사라지기 때문(p27)’ 이라며, 우리에게 원칙, 기준, 좌표체계는 삶을 살아내는 데 매우 중요한 가치임을 강조한다. 저자가 27가지의 오래된 덕목을 책으로 정리한 이유이기도 하다.
27가지의 덕목들을 키워드만 정리해본다.곧바로 와닿는 명사들도 있고, 함께 있는 문장을 읽어야 내용을 유추해볼 수 있는 것들도 있다. 어떤 것은 내가 추구하는 것과 결을 같이 하기도 하고, 어떤 것은 포기하고픈 덕목이기도 하다.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도 전에 목차의 키워드만으로도 여러가지 생각을 떠올기게 되는 순간이다.
현명함, 유머, 열린마음, 자족, 격식, 겸손, 충실, 정조, 동정심, 인내, 정의, 스포츠맨십, 권위, 데코룸, 친절, 인자함, 솔직함, 관후함, 절제, 신중함, 쿨함, 부지런함, 극기, 용기, 관용, 자부심, 감사함
나는 친절한 사람이 좋다. ( 그렇다고 해서 내가 ‘친절한’ 사람인지는 자신있게 말하지 못한다. ) ‘아직 살만한 세상’ 등의 제목을 단 기사들을 좋아한다. 여러 덕목 중 ‘친절’ 이 가장 먼저 눈에 띈 까닭이기도 하다. 저자의 주장처럼 ‘친절이란 덕목은 타인과 관련된 것이기에 이기심으로 가득한 오늘날 특히 매력적으로 다가온(p259)’ 것일지도 모르고.

가장 단순한 차원에서 친절은 타인을 ‘알아차린다’는 것을 뜻한다.
- p259
읽는 순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문장이다. 크나큰 ‘관심’ 까지 아니더라도 내 주위에 누군가 타인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친절의 시작이라는 것.
그렇다면 우리는 왜 존중과 관심을 받으면 행복감을 느낄까.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마크 리어리 Mark Leary는 사회적 거부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류사에서 인간의 생존은 집단의 사소한 호의에 좌우되어 왔다. 여기서 배척당하는 일은 작은 죽음처럼 느껴질 뿐 아니라, 공동체부터의 추방은 오랜 시기에 걸쳐 실제로 죽음을 뜻했다.
- p266
저자는 고전의 문장과 다양한 연구자료들을 인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들고, 각 장의 마지막에는 해당 덕목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하는 결론을 정리해두고 있다. ‘친절’ 에 관해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마주한 사람에게 미소를 지어보자
의식적으로 상대방 눈을 바라보는 연습을 하고, 그 순간 잠깐이라도 좋으니 인간적으로 통해보자. 그리고 불친절한 대접 따윈 담아두지 말고 태연하게 넘기자. 무례는 상대방의 잘못이지 당시의 잘못이 아니다.
- p266
책의 본문은 화려한 컬러를 배제하고 검은색 계열로 통일되어 있다. 페이지의 동그란 점과, 그 아래에 찍힌 또 다른 점은 잉크 한 방울이 책을 타고 흐른 것처럼 시선을 앗아간다. 모든 페이지에 방점을 찍은 듯한 느낌이랄까.

페이지 중간중간 Q&A 형식의 페이지를 두어 해당 장의 덕목과 관련된 질문과 답이 수록하고 있다. 어떤 이에게는 정답이 아닐 수도 있는 답변일지 모르지만 저자의 일관된 생각의 흐름을 확인할 수 있기도 하다. 동서양의 가치관의 차이를 엿볼 수 있는 부분도 보인다. 한국이라는 나라에 사는 우리에게 ‘당연한’ 것( 혹은 그렇게 보이는 것)들이 담겨있기도 하다.

일을 진행함에 있어 약간의 ‘완벽주의’ 가 있는 나는 종종 스트레스를 받고는 했다. 이는 타인과의 협업에 있어서 종종 트러블의 원인이 되고는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보다는 남탓을 해왔다고 고백해본다. 책 속에서 이 문장을 만나는 순간, 보는 이도 없는데 혼자 얼굴을 붉혀야했다. ‘기승전 육아’ 모드로 돌변하여, 일 뿐만 아니라 혹시 아이에게도 그래왔던 것은 아닌가 떠올려보기도.
타인에게 엄격한 잣대는
스스로에 대한 과대평가에서 비롯된다.
- p267 , 인자함
인자함에 대한 이야기를 위해 중세 전성기 유럽기사들의 덕목인 ‘밀테 milte’(인자함, 관대함) 과 일본 무사들의 ‘무사의 정’ 을 비교하여 설명하는 것도 흥미롭다. ‘유럽의 기사제도가 본래의 로마 사상과 기독교에 의해 변주된 로마 사상의 잔재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일본 봉건계급의 도덕률은 불교와 유교, 신도로부터 그 양분을 공급받고 있다. 즉 불교로부터는 생에 대한 초연함을, 유교로부터는 몇몇 매력적인 도덕적 가르침을, 신도로부터는 스스로에 대한 과대평가를 물려받았다. (p270)‘
‘쿨함’ 이라는 덕목에 쓰인 ‘사춘기에서 벗어났으면 태연함과 무심함을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라는 제목에 웃음이 터졌다. 사춘기 초입의 허세뿜뿜하는 아이가 떠올라서다. 과연 ‘쿨함’은 정말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앞에서 이야기했던 ‘ 쿨함과 친절함, 즉 고대의 차갑고 균형잡힌 영웅상과, 인자함이 중요한 구실을 하는 고대 이후의 이상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가’ 라는 질문으로 되돌아간다.
저자는 해당 질문에 대한 답을 위하여 스토아주의를 끌어오고, <카라마조프 형제들> 의 내용을 인용하며, 토마스 아퀴나스를 소환한다.
‘너무 부지런하기에 게으름에 빠진다’ 는 장 또한 흥미롭다. 솔직히 ‘부지럼함’ 이라는 덕목은 내게 있어 가장 자신없는 덕목이다. 마리 폰 에브너 에셴바흐의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아니라 미뤄둔 일이 우리를 피곤하게 만든다.” 란 말에 격하게 공감한다. (미뤄둔 일이 너무나도 많다!!) 이 장에서는 고전보다는 다양한 자기계발서들의 주장이 발췌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게으름에는 네 종류가 있다. 가장 확실한 것은 육체적 게으름이다. <중략>
그 다음에는 정신적 게으름이다. 이는 오늘날 만연한 현상으로, 어떤 주제에 대해 겨우 30초 생각한 뒤 최종 판단을 내리고 거기에 해시태그를 다는 식이다.
도덕적 게으름도 있다. 도덕적 질문과 결정을 외면하고, 저항이 가장 적은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중략>
가장 끔찍한 형태의 게으름은 정신적, 영적 게으름이다. 보다 원대한 것을 추구하기를 멈출 때 정신은 불안과 공허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 p351
나는 어떤 게으름에 빠져있는가.
1969년에 유서 깊은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베를린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는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베를린판 편집자와 <쥐트도이체 자이퉁>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독일문학에서 ‘진지한 이야기를 우아하면서 가볍게 전달할 줄 아는’ 이로 알려져있다.
“ 일상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높이가 그가 살아온 인생을 말해준다 “ 라고 했다. 연휴동안 450여페이지의 제법 두꺼운 책을 읽으며 스스로의 모습을 반추해봤다. 난 ‘진짜 어른’ 인 것일까. 슬프게도 자신있게 ‘그렇다’ 라고 대답하지 못한다. 그러나 끊임없이 나를 돌아보며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고 믿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