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 신부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6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민음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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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연구하는 역사학자인 토니는 과거의 임의의 순간을 선택하여 지니아의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한다. 토니에게 '수수께끼이자 엉킨 매듭'이기도 한 지니아. 토니 자신이 학생들에게 강의를 시작했던 말인 '어떤 실이든 골라서 잘라봐요. 그러면 역사라는 매듭은 풀리게 되어 있어요.' 를 떠올리며 두 친구 캐리스, 로즈와 점심을 먹던 어느 날을 풀어낸다. 지니아가 저승에서 돌아왔던 어느 날. 




『도둑 신부』 는 세 친구 토니, 캐리스, 로즈에 대한 이야기가 현재를 시작으로, 지니아와 얽힌 과거, 그리고 더 오래 된 유년 시절의 과거의 일화가 차례 차례 등장하는 구성이다. 각 인물들의 서사 초입에 지니아란 인물이 죽었다는 소식에 각 인물들이 느꼈던 감정을 읽다보면 그들이 왜 지니아를 싫어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얽혔을지 궁금즘이 높아질 수 밖에 없다. 나는 지니아가 그들을 숙주로 삼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 첫번째 대상이었던 토니는 지니아의 장례식에서 누군가의 피와 고통과 죽음이 필요한 것 아닌가 떠올린다.  

지니아는 조화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화를 보면 비웃었을 것이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한 사발의 피였다. 한 사발의 피와 한 사발의 고통과 누군가의 죽음. 그 정도면 지니아도 잠잠히 묻혀 지낼 것이다. 

-p32, 토니



오년 전, 죽은 줄 알았던 지니아가 한 달에 한번 모이는 그녀들의 모임 장소에 나타난다. 억지로 외면하지만 세 인물들의 마음은 복잡해진다. 매클렁 홀이라는 여자 기숙사에 함께 있었던 셋 중에서 지니아와 제일 먼저 친구가 된 사람은 토니였다. 여학생들 틈바구니에서 만난 것이 아닌, 유일하게 그녀가 전쟁이라는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던 상대였던 친구 웨스트를 통해 만났다. 왼손잡이였고, 다른 여학생들과는 다른 분야를 좋아했고, 글의 문장을 거꾸로 뒤집어 읽고 쓰는 그녀를 인정해주는 웨스트를 사랑했지만, 웨스트는 이미 지니아와 깊은 관계였기에 친구로서 옆에 있었다. 이후 지니아가 웨스트를 버리고 떠난 후 그와 결혼하게 된다. 

지니아와 나누는 우정은 매우 갑작스럽게 시작됐다. 그녀는 전속력으로 달리는 모터보트에 밧줄로 묶여 사방에서 튀는 파도를 온몸으로 맞고 환호성 때문에 먹먹한 귀를 달래 가며 뒤에서 끌려가는 듯한 심정이다. 아니면 핸들도 없고 브레이크도 없는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요란하게 내려가는 듯한 심정이다. 어떻게 손쓸 도리가 없다. 그런가 하면 이상할 정도로 바짝 긴장하고 있다. 팔과 목덜미의 작은 솜털들이 죄다 곤두서 있는 듯하다. 여기가 위험한 바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째서 위험할까? 

- p259, 토니



1권에 나오는 토니의 이야기에서도, 캐리스의 이야기에서도 지니아는 대상의 약점을 교묘하게 파고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일지 거짓일지 알 수 없는 자신의 약한 점을 맞춤형으로 내보이고, 대상에게서 동질감을 이끌어내고 있다. 토니도, 캐리스도 마음을 열고 지니아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다. 지니아는 그들이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고, 내면을 건드려 원하는 것을 취한다. 고아로 사니 '남들에게 좋은 소리 들으려고 애쓸 필요 없다는 것', '원래 내 모습으로 살 수 있다는 거' 란 좋은 점 한가지가 있다며 토니에게 이야기하는 식이다. 그 가운데 독자들도 토니와 캐리스의 어릴 적 상처들을 목격하게 된다. 치유되지 않고 그저 닫아두었던 그 상처들를 지니아는 교묘히 이용했던 것일까. 

지금까지 토니는 지니아가 자기와 전혀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비슷하다. 둘 다 고아가 아닌가. 둘 다 전시에 태어나 어머니 없이 바구니 하나 옆에 끼고 혼자 힘으로 헤치며 터벅터벅 앞으로 걸어가고 있다. 그 바구니에 든 것은 그들의 유일한 재산이다. 머리. 그것 말고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토니는 지니아가 엄청나게 존경스럽다. 특히 그 태연함이 존경스럽다. 예를 들어 지금만 해도 다른 여자들 같으면 눈물을 흘릴텐데 지니아는 웃고 있다. 토니를 보며 살짝 비웃는 듯이 웃고 있다. 토니는 이것을 가슴 뭉클한 용기, 역경에 맞서는 강철 같은 의지로 해석한다. 

- p318, 토니


지니아는 토니와 캐리스에게서 남자를 빼앗고, 유희가 끝나면 다시 팽개치고 떠나버린다. 

그는 대여받은 남자에 불과했다. 그는 지니아에 중독되어 있었다. 그녀를 한번 입에 대면 다시 사라질 것이다. 그는 인간의 귀에는 안 들리는 초음파 호루라기에 반응하는 개와 같았다.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면 달려갈 것이다. - p361


토니는 겪었기 때문에 안다. 빌리는 마법에 걸린 것과 비슷한 상태일 것이다. 하지만 지니아는 이내 싫증을 낼 것이다. 빌리는 너무 시시한 먹잇감이었고, 캐리스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너무 쉬운 상대였다. 토니는 지니아에 대해 연구한 결과 모험을 좋아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문을 부수고 들어가길 좋아하고, 남의 것을 빼앗길 좋아한다. 빌리는 웨스트처럼 사격 연습 상대에 불과했다. - p527



세 친구들이 서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눈여겨보게 된다. 냉철한 역사학자 토니, 요가와 텃밭 가꾸기를 즐기는 몽상가 캐리스, 당차고 밝은 사업가 로즈, 이 세 명이 단지 공동의 적이란 이유만으로 뭉치게 된 사이인 것일까 궁금해하면서 말이다. 영적인 능력이 있는 것처럼 묘사되는 캐리스의 시선에서 바라본 토니와 로즈의 모습을 보면 토니는 '서늘함'으로, 로즈는 '반짝임'의 기운으로 표현된다. 

등장인물들의 중심 서사에 더하여 중간 중간 서술되는 복잡다단한 내면은 작품의 여성주의적 주제의식을 드러낸다. 남성의 편견은 물론, '여적여' 프레임을 떠올려보게도 한다. ‘여적여’가 남성 중심 사회가 악용하는 신화라는 관점을 알고 있지만, 마거릿 애트우드의 작품을 읽다보면 타협할 수 없는 간극을 보여주는 ‘여적여’ 또한 여성들간 관계의 일종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남성 사학자들은 그녀가 자기들 영역을 침범한다고 생각한다. 창과 화살과 투석기와 긴 창과 칼과 총과 비행기와 폭탄을 건드리지 말고 자기들 몫으로 남겨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누가 언제 뭘 먹었고 봉건 시대 가족들은 어떤 식으로 살았는지 하는 사회사학이나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얼마 되지도 않는 여성 사학자들도 똑같은 생각을 하지만 이유는 다르다. 그들은 그녀가 탄생을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죽음이나 전투 계획, 패주, 궤주, 대학살 연구라니 안 될 말씀이다. 그들은 그녀가 여자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 p47, 토니

여사장 노릇은 골치 아프다. 여자들이 그녀를 상사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문제다. 여자들은 그녀를 자기와 똑같은 여자라고 생각하고, 언제쯤 떨어져 나갈지 궁금해한다. 그들의 섹시 전략이 그녀에게 먹히지 않고, 그녀의 섹시 전략도 그들에게 먹히지 않는다. 크고 파란 눈이 더 이상 무기가 되지 못한다. 여직원들은 그녀가 자기네 생일을 잊어버리면 손가락질하고, 그녀가 호통을 치면 남자 상사를 대할 때처럼 화장실로 달려가지 않고 눈앞에서 당장 울음을 터뜨리며 힘든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동정을 바란다. 그런 그들에게 커피라도 한잔 얻어 마시려고 했다가는 이보세요,자기 일은 자기가 해야죠라는 반응이 나온다. <중략> 그랬던 여자들이 남자 상사에게는 군소리 없이 커피를 대령한다. 아내에게 줄 생일 선물도 사다 주고, 애인에게 줄 생일 선물도 사다 주고, 커피도 끓여 주고, 슬리퍼도 입으로 물어서 갖다주고, 야근을 시켜도 아무 소리 하지 않는다. 

- p175, 로즈


1권에서는 로즈와 지니아가 얽힌 사연이 풀리지 않았다.캐리스가 '반짝이고 활기 넘치는' 이라고 표현하지만 로즈가 회사와 가족 속에서 보이는 모습은 애써 밝은 모습을 가장하는 것처럼 보여서 아슬아슬했다. 로즈의 사연도 매우 궁금해진다. 2권을 곧바로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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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뉴어리의 푸른 문
앨릭스 E. 해로우 지음, 노진선 옮김 / 밝은세상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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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소설에서 '문'이라는 소재가 나오면, 나는 자연스럽게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포탈 판타지(Portal Fantasy)를 기대하게 된다. 표지부터 호기심을 자아내는 『재뉴어리의 푸른 문』 을 펼치며, 주인공은 어떤 세계와 만나는 것일지가 가장 궁금했던 이유다. 사진에서 잘 표현되지 않았지만, 주인공이 서 있는 가운데의 문은 홀로그램 처리가 되어 빛을 받으면 반짝반짝 빛난다. 포탈처럼 말이다. 책을 펼친 독자들은 표지의 포탈을 통해 책 속이라는 다른 세계에 한 발 내딛은 셈이려나. 




예기치 않은 사고로 엄마를 잃은 주인공 재뉴어리는 W.C 로크 회사의 최고 경영자이자 고고학 협회 회장인 로크의 집에 맡겨진다. 아빠는 세계 각지를 돌며 보물을 발굴하는 일로 자주 볼 수 없다. 여러 교육을 받으며 부족함 없는 생활을 하지만 로크가 요구하는 엄격한 생활 방식 때문에 저택에 갇혀 지내다시피 하는 상황이다. 재뉴어리는 자신이 복도를 장식하는 유물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주의깊게 관리되지만, 종종 무시되고, 무엇인가 미묘하게 어울리지 않는 그런 느낌. 


로크는 재뉴어리를 양딸처럼 챙기는 좋은 보호자인 것처럼 굴지만 재뉴어리의 행동을 틀에 가두려하고, 경계심을 보인다. 백인우월주의가 강세였을 1900년대 배경인 소설인지라 흑인과의 혼혈이며, 여성인 재뉴어리가 받는 관습적 압박으로 생각하기에는 무엇인가 수상하다. 소설의 중반부에서 로크의 정체와 속셈이 드러나며 의문점이 풀린다. 


들판에 너무도 외롭게 서 있는 그 너덜너덜한 푸른 문을 봤을 때 저 문 너머에 다른 세상이 펼쳐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켄터키주 나인리가 아닌 다른 곳, 전혀 본 적 없는 새로운 도시, 너무 광대해서 절대 그 끝에 도달할 수 없는 어딘가로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 p18



재뉴어리는 일곱 살에 ‘푸른 문’을 발견한다. 문은 머리 위 하늘은 마치 세상을 다 삼켜버릴 듯 깊고 영롱한 푸른색이었다. 소설 초반은 재뉴어리의 외로운 처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체제(혹은 로크)에 대한 순응 과정 등 주인공의 유년기가 잔잔하게 서술된다. '푸른 문을 발견한 후 몇 년 동안 나는 제멋대로이고 만용을 부리는 대부분의 소녀들이 거쳐야만 하는 과정을 겪었다. 덜 제멋대로이고 덜 만용을 부리게 된 것이다.(p38)' 


난 이제 허무맹랑한 헛소리와 작별했다. 소문자건 대문자건 문과도 작별했고, 은빛 바다와 회반죽을 바른 건물들의 도시도 꿈꾸지 않았다. 이야기와도 작별했다. 아마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에 내포된 교훈, 결국에는 누구나 배우는 교훈 중 하나일 것이다. 

- p35



초반부에는 긴박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지만, 주인공이 처한 상황과 주변, 심리를 묘사하는 문장들이 섬세하고, 아름답게 묘사되며, 꼼꼼하게 선택된 단어들의 중의적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고, 재뉴어리는 열 일곱살이 된다. 재뉴어리는 로크 하우스 파라오 룸의 보물 상자에서 가죽으로 장정된 <일만 개의 문>이라는 책을 발견한다. 이제 소설은 책 속의 책의 구성을 취하며 재뉴어리의 서사와 <일만 개의 문> 의 서사가 얽히기 시작한다. 


<일만 개의 문> 속 애들레이드는 미국 중심부에 위치한 시골 마을에서 나고 자란 여성이다. 라슨 가의 다른 여성들처럼 주어진 환경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기보다는 다른 세상을 경험하고자 하는 열망에 불타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낡은 오두막에서 문을 통해 나온, 다른 세상 '시티 오브 닌' 출신의 줄리언을 만난다.그리고 훗날 여행 길에서 그와 재회에 사랑을 나누었고, 삼나무 빛깔 피부색에 밀빛 눈동자를 가진 재뉴어리가 태어난다. <일만 개의 문>은 재뉴어리의 아빠가 그녀에게 남긴 책이었던 것이다. 


재뉴어리는 자신의 엄마 애들레이드처럼 새로운 경험과 변화를 갈망하면서,  식료품점 아들이자 그녀의 수호천사인 새뮤얼, 줄리언이 말동무를 하라고 보내준 여전사 제인,반려견 배드와 함께 새로운 문을 찾아 떠나는 모험을 시작한다. 이제 '문'은 다른 세계로의 '연결'에서 '변화'라는 의미로 확장된다. 



문은 틈새이자 샛길이고 미스터리이며 경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문은 변화다. 문에서 무언가가 빠져나오면 그게 아무리 작고, 아무리 찰나라고 해도 변화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 p.106


이야기 속에서 추측할 변화들은 매우 많다. 재뉴어리만 해도 혼혈이기에 유색인종에 대한 인종차별에 대해 저항하고, 얌전히 마네킹처럼 집안에만 있어야 하는 여성에 대한 강요에 저항하며 변화하려고 하지 않는가. 문이 열리면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기에 이를 알고 있던 기득권 세력들은 이 문을 닫으려고 든다. '우리는 너처럼 어린 침입자가 우리의 모든 노력을 망치도록 내버려둘 수 없고, 내버려두지도 않을 거야.(p421)' 라고 말하는 『재뉴어리의 푸른 문』 속의 '뉴잉글랜드 고고학 협회' 는 현실 속의 여러 세력들을 떠올리게 한다. 역사적인 사실들과 소설 속 판타지 서사들이 씨실과 날실로 엮인 실감나는 장면들을 마주하게 된다. 


외로웠던 소녀가 부모의 사랑을 확인하는 이야기, 외로운 사람들이 여러 세계를 가로질러 만나고 잃고 다시 만나는 이야기, 한 여성이 잠재력을 발휘하며 주체적으로 성장해가는 이야기, 악당을 물리치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이야기,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는 이야기 등 읽는 이마다 저마다의 감상으로 이 책을 표현할 수 있을 듯 하다. 로맨스, 모험, 약간의 스릴 등의 양념이 첨가된 Magical Realism 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우리가 이야기를 고고학 현장처럼 접근하고, 층층이 쌓인 먼지를 꼼꼼하게 털어낸다면 그 안에 늘 문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문은 여기와 저기, 우리와 그들, 평범과 마법이 나뉘는 분기점이다. 문이 열리고 두 세계 간에 교류가 일어날 때 이야기가 시작된다.


문은 위험하지만 반드시 필요하고, 문은 혁명이고 격변이고 불확실성이고 미스터리이고 중심축으로 온 세상이 그 축에 따라 뒤집힐 수 있다. 문은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자 끝이고, 세상 사이의 통로로 모험과 광기, 심지어 사랑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문이 없다면 세상은 침체되고 석회화되며 모든 이야기가 사라진다.

어쩌면 내가 계속 글을 쓰는 이유는 내가 자란 세상에서는 글에 힘이 있고, 곡선과 나선형 글자가 돛과 살갗을 장식하고 능력 있는 글꾼이 기회를 찾아내 현실을 재창조 할 수 있기 때문일수도 있다. 이 세상에서 글이 아무런 힘도 없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무리 횡설수설하고 근거가 없는 내용이라고 해도 기록으로 남겨둘 필요를 느껴서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내가 그토록 열심히 알아낸 진실을 다른 누군가에게 알릴 수 있도록 말이다. 

- p354



책 속의 문장에서 저자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슬쩍 짐작해보며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다. 데뷔작이 휴고상, 네뷸러상, 로커스상, 월드판타지상에 최종 후보작이 되고, 아마존 편집자가 뽑은 최고의 판타지에 선정되었으며,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베스트셀러에 등재되는 등 언론과 평단의 호평을 받은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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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바다 암실문고
파스칼 키냐르 지음, 백선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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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미술 등 다양한 예술을 소재 삼아 새로운 사고를 창출하는 작업에 특히 뛰어나다'라고 소개되곤 하는 작가 파스칼 키냐르의 작품이 늘 궁금했었다. 그는 대대로 언어학자와 음악가를 배출한 집안에서 태어나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며 자랐으며, 바이올리니스트, 첼리스트, 오페라 작곡자, 베르사유 바로크 음악 센터의 임원으로도 활동하는 등 인생에서 음악을 빼놓을 수 없는 작가로, 지금까지도 많은 작품에서 음악을 모티프로 활용해왔다. 나는 이제 그 호기심을 푼다.




키냐르는 우리가 잊고 있던 17세기의 음악가들을 소환하고, 사랑, 음악, 바다, 유혹, 죽음 등에 관한 이야기들을 이어간다. 


1652년, 류트 연주자 샤를 플뢰리 드 블랑크로셰(Charles Fleury de Blancrocher, 1605~1652)는 계단에서 떨어져 사망한다. 그의 친구들은 그를 기리며 4개의 톰보 를 바치기로 한다. 작가는 III장 <음악가들> 편에서 블랑슈로슈와 그의 친구이자 하프시코드(harpsichord) 연주자 요한 야콥 프로베르거(Johann Jakob Froberger, 1616~1667)를 등장시키며 그 이야기를 가져온다. 



야콥 프로베르거가 직접 악보 머리에 써넣은 정확한 제목은 이러하다. <블랑슈로슈 씨의 죽음에 바치며 파리에서 지은 이 추모곡은 박자에 얽매이지 않고 재량껏 매우 느리게 연주할 것.> 

p134


류트에 대한 이야기는 블랑슈로슈의 스승이었던 드니 고티에로 이어지고, 그가 등장하는 그림 한편도 소개된다. 가운데 류트를 들고 있는 인물이 드니 고티에다. 


작가는 『사랑 바다』 를 소설이라 부르지만 어느 순간 논픽션처럼 읽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실존했던 인물들에 대해 찾아보고, 음악을 찾아보면서 말이다. 그러다가 독백과도 같은 함축적인, 시적인 문장을 만나 오래 시선이 머문다. 문장이 노래하고 있는 느낌마저 든다.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몸을 발견하는 일, 불안해하거나 조심스러워하거나 수줍어하며 이루어 내는 그 발견보다 더더욱 감동적인 일은 무엇인가. 바로 우리가 익히 알고 사랑하는 몸이 다시 나타나는 걸 보는 기쁨이다. 

   이전과 비슷하고, 여전히 비할데 없이 향기롭고, 저항하기 힘들 만큼 매혹스러우며, 생생하고, 따뜻하며, 자신만만하고 숭고한 그 몸을 다시 만나는 건 행복이다. 

   그 몸에 똬리를 트는 건 황홀한 일이다. 

   어쩌면 바로 거기서 음악과 사랑이 만나는지도 모른다. 

   음악은 말하지도 않고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암호화하고 다시 찾아낼 뿐이다. 

   그것은 뇌의 그늘 깊은 곳에서 잃어버린 것을 되살려 낸다. 

   그것은 뒤로 돌아가 돌진하고, 한 악장 한 악장 천천히, 그러다 별안간 빠르게 나아가며 마음을 뒤흔든 모든 것을 되찾는다. <중략>

   음악은 특출나게 감동적인, 어딘가 미쳐 버린 인식같다. 세상 이전의 세상에 있던 것, 되찾으리라 더는 기대하지 않던 것과의 아연한 재회 같다. 

- p195



책 속의 등장 인물들은 서로 반응하고, 중첩되고 그리고 분리된다. 각 장의 시점은 불현듯 각 인물들의 시점으로 바뀌기 일쑤다. 몇 줄만 읽어도 관점이나 시간, 장소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음악에서는 류트가 사라지고, 비올라가 소멸하며 피아노가 부상한다. 요한 야콥 프로베르거가 '프랑스 모음곡' 형식을 처음 작곡한 이후 한 세기가 지나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가 그 형식을 이어받는다. '프로베르거가 이 새로운 형태의 협주 소나타를 구축한 건, 아니 부서진 듯하고 조각난 듯한 이 새로운 형태를 내놓은 건 류트 연주자 블랑-로셰, 아치류트 연주자 하튼, 리라 연주자 하노버, 그리고 빈과 로마와 아비뇽에서 그를 사사한 스승 아타나시우스 키르허의 가르침 덕이었다.' (p504)


책 소개에서는 『세상의 모든 아침』 과 『음악 혐오』를 한데 모은 것 같은 작품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두 권을 이어 읽어보면 『사랑 바다』 가 좀 더 다르게 다가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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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바닥 - 제44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이케이도 준 지음, 심정명 옮김 / ㈜소미미디어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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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이도 준의 이름을 만나면 나는 『한자와 나오키』 시리즈를 제일 먼저 떠올린다. 그만큼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이었다. ( 일드도 다 찾아서 봤다. ) 


제44회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하며 그의 데뷔작이 되었던 『끝없는 바닥』 을 펼치며 『한자와 나오키』 와 같은 기업소설( 좀더 세분화해보면 은행이 무대가 되는 소설 )의 시작을 엿볼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들썩거렸다.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 당시 “은행 미스터리의 탄생을 선언하는 작품”이라며 새로운 분야의 미스터리를 개척했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주인공인 이기 하루카는 대형 은행에서 융자 담당으로 일하는 평범한 직원다. 외근을 나가던 중 마주친 동료 사카모토는 “너, 나한테 빚진 거다?” 라는 묘한 한마디를 남긴 채 자리를 떠났는데 몇 시간 후 시체로 발견된다. 사인은 알레르기로 인한 아나필락시스 쇼크다. 동료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사카모토가 고객의 돈을 횡령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온 형사는 사카모토의 아내인 요코가 이기의 전 연인이었기도 한 터라 이기를 의심하기도 한다. 사카모토의 업무를 인계받은 이기는 이 일련의 사태에 의문을 품고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소설은 벌어진 사건의 해결을 위한 주 서사에, 돈과 권력을 좇는 인물과 그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인물의 대립구도가 강조되어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등장인물들의 대화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주인공을 보는 시선이 어떤지 금방 알 수 있다. 


회사는 너 같은 놈이 제일 다루기 힘들어. 출세에 혈안이 된 놈들이랑은 다르고, 그렇다고 해서 안온하게 월급쟁이 생활을 계속하는 것도 아니고, 조직에 달라붙어 있지 않으면 길거리에 나앉는다는 비애도 없고, 요컨대 너한테는 지킬 게 없어. 그러니까 조직 입장에서는 종잡을 수 없는 존재로 보이지. 

- p188


"그렇게 부은행장이나 부장이 중요합니까? 파벌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결국은 자기 출세를 위해 이용하고 있을 뿐이죠. 필요 없어지면 키우던 사람도 아무렇지 않게 짓밟는 놈들이에요. 선배 의견은 어떻습니까?"

"내 의견? 나는 월급쟁이야. 상사가 하는 말은 따를 수밖에 없어. 그게 기업의 논리잖아."

"비굴하네요. 비애가 느껴집니다. 그런 기업의 수장이 꼭 나쁜 짓을 하죠."

"이 새끼……. 장래가 아깝지도 않아?" 

- p277


작가는 은행에서 일하다가 소설가로 데뷔했기에, 그의 경험이 매우 전문적으로 현장감있게 녹아있다. 이 책이 처음 나온 1998년은 일본 장기 신용은행의 파산, 불량채권 등 일본이 금융위기를 겪던 시기라 더욱 이 책이 주목을 끌었다고 한다.


소설 속 사건의 시작은 은행에 관련된 일이었지만 무대는 '산업의 쌀'로 비유되는 반도체 업계로 확대되며, 연속적인 살인사건이 발생하는 하드 보일드한 감각의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 다만 오래 전 데뷔작이기에 비디오테이프 등의 오래된 아이템이 등장해서 옛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

주변의 시선으로 성격을 짐작했던 이기가 자신의 속내를 밝히는 장면에서 주인공 캐릭터에 대한 이해가 더 높아진다. 무엇인가 지킬 것을 갈망하며, 인생에서 키워갈 온기를 찾는 주인공. 


나는 다카하타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주위에서 마시고 있는 이들의 표정을 관찰하고 있었다. 즐거워 보이는 표정도 있는가 하면 가라앉아서 납빛을 한 눈을 가진 사람도 있다. 터질 것 같은 웃음도 있는가 하면 분노로 얼굴을 붉히고 뭔가를 필사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많은 인간이 있지만 집단으로 인식할 수는 없다. 있는 것은 개인이다. 도시 특유의 단절된 감각에 오랜 시간에 걸쳐 익숙해졌다는 느낌이 든다. 지금 내 가슴속에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의 추함과 허무함이 표류할 뿐이다. 


지킬 것이 필요하다. 무언가.

갈망하고 있었다. 추억이 아니라 현실에 있는 것으로서. 인생에서 키워갈 온기를 나는 갈망하고 있었다. 

-p310



이 소설 속 이기를 바탕으로, '한자와 나오키' 라는 캐릭터가 탄생하지 않았을까 추측을 해보게도 된다. 이케이도 준의 소설은 대부분 영상화가 되었는데, 이 소설 또한 2000년 2월, 후지 TV에서 와타나베 켄 주연으로 TV 드라마화 되었다. 

주인공의 끈질긴 추적으로 사건의 진실은 밝혀진다. 이 과정에서 은행과 반도체 관련 기업들이 관련된 음모, 은행 안의 복잡한 파벌 싸움을 마주하게 되고,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불의도 불사하는 비열한 상사와 정면 대결하게 되기도 하며, 살인을 저지르는 잔혹한 범죄자와도 맞서 싸운다. 


형사가 이런 말을 하면 이상하겠지만 이기 씨, 이 사건은 분명 당신이 해결해야만 하는 사건이었던 겁니다. 사카모토 씨한테서 당신이 물려받은 은행원으로서의 본능이랄까 집념이랄까 그것이 사건을 해결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 p392



소설의 제목을 다시 생각한다. 『끝없는 바닥』 . 누구의 바닥인가. 은행과 기업의 유착이 보여주는 비리의 바닥인가, 도덕을 상실하고 권력을 탐하는 인간의 바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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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끔찍한 남자 마르틴 베크 시리즈 7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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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베크 시리즈도 어느덧 일곱 권째를 펼쳤다. 일곱권을 책꽂이에 나란히 꽂아두니 책 등의 글자들이 점점 의미있어졌다. 한 글자씩 써있으니 'Martin Beck' 에서 'MARTIN' 이 완성된 후 'B'를 추가했다. 이번 편에서는 전직 경찰서장이 입원한 병실에서 살해된 채로 발견된다. 마르틴 베크는 같은 경찰관 동료를 죽인 살인자를 검거해야 한다. 



살해된 스티크 뉘만은 동료들에게도 '나쁜 경찰'이라는 평을 받는 인물이다. 콜베리는 "그는 오늘날까지도 경찰 전체의 수치야. 나로 말하자면, 그와 같은 도시에서 같은 시기에 경찰로 일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창피해(p117)" 라고 말할 정도다. "망할 연대감이라는 것이 우리의 제2의 천성이 되었단 말야. 우리는 단결심을 세뇌당했다고" 라면서 잘못된 것을 보면서도 지적할 수 없는 경찰조직에 대해 한탄한다. 마르틴 베크 또한 실마리를 찾으려 수사를 하면서 자신이 몸담고 있는 경찰 조직의 추악한 민낯을 확인할 뿐이다. 스티크 뉘만은 고위 경찰이라는 지위에서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법을 집행했으며, 그의 긴 경력만큼이나 부당한 피해를 입은 사람이 많았다. 


살인사건이 일어난 병실에서 수사를 이어가던 렌나르트 콜베리와 군발드 라르손은 갑자기 울린 총성을 듣는다. 솔나의 순찰조 크리스티안손과 크반트가 총을 맞는다. 누군가가 지붕에서 소총으로 경찰관들을 쏘고 있다. 아마도 그가 스티크 뉘만을 살해한 범인일 것이다. 그동안 범인과 대치하여 액션을 주고 받던 장면이 없었는데, 이번 편은 총알이 오고 가는 액션이 숨가쁘게 펼쳐진다. 콜베리와 라르손은 물론 마르틴 베크 또한 위험에 직면한다. 


『어느 끔찍한 남자』 는 범인이 누구인지 찾는 과정보다는 검거하는 과정에 집중하게 되는 소설이다. (범인은 다른 편들과 달리 금방 누군지 유추할 수 있다. ) 경찰을 향해 총을 겨눈 범인의 검거를 위해 최루탄을 터뜨리고 헬기도 투입되는 등 대규모 작전이 펼쳐진다. 앞선 에피소드들에서는 볼 수 없던 작전이다. 헬기 한 대는 격추되어 사상자가 발생하고, 마르틴 베크는 자진해서 건물해서 잠입한다. 장면들이 긴박감이 넘친다. 

그 짧은 순간에 마르틴 베크가 본 것은 그게 다였다. 그리고 시퍼런 사각형 총신에 큼직한 손잡이가 달린 헤메를리 권총의 기이한 생김새. 총은 작고 까만 죽음의 눈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표현을 어디선가 읽었던 게 기억났다. 하지만 주로 든 생각은 너무 늦었다는 거였다. 

- p324



등장인물의 눈을 빌려 묘사하는 스톨홀름 도심의 모습은 '쓸쓸함과 황량함'이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1960~70년대의 사회제도와 구조에 대한 가감없는 묘사는 두 작가가 범죄소설의 형식을 빌려 복지국가라고 여겨졌던 스웨덴 사회의 여러 문제점을 고발하고자 했던 의도를 담고 있다. 

지난 십년동안, 스톡홀름 도심은 대대적이고 폭력적인 변화를 겪었다. 원래 있던 동네는 모조리 철거되고 그 자리에 새 동네가 지어졌다. 도시 구조 자체도 바뀌었다. 도로가 확장되었고 고속도로가 놓였다. 그런 활동을 부추긴 것은 사람들이 어울려서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겠다는 꿈이 아니라 귀한 땅을 한 뼘도 남기지 않고 최대한 착취하겠다는 욕망이었다. 도심에서는 기존 건물의 구십 퍼센트를 허물고 기존 도로망을 깡그리 지운것만으로도 모자라 지형 자체에도 폭력적인 변화가 가해졌다. <중략>


힘없는 사람들은 교외로 추방되었고, 그들이 살고 일하던 활기찬 동네는 폐허가 되었다. 도심은 시끄러운데다가 통과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한 건설 현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서서히, 집요하게 새 도시가 솟아났다. 넓고 소란한 간선도로의 혈관, 번쩍거리는 유리와 금속의 얼굴, 죽은 콘크리트의 평평한 땅, 그리고 쓸쓸함과 황량함으로 이뤄진 도시가. 

- p82



책 속 사건은 종결되었지만, 사건이 일어나게 된 근본적 원인은 여전히 남아있다. 심지어 오늘날 현실에서도 비슷한 일은 계속되고 있다는 느낌에 씁쓸함을 느끼며 완독한 책을 다시 책장에 꽂는다. 추리소설이 아니라 사회고발소설을 읽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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