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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 신부 1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6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민음사 / 2023년 10월
평점 :
전쟁을 연구하는 역사학자인 토니는 과거의 임의의 순간을 선택하여 지니아의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한다. 토니에게 '수수께끼이자 엉킨 매듭'이기도 한 지니아. 토니 자신이 학생들에게 강의를 시작했던 말인 '어떤 실이든 골라서 잘라봐요. 그러면 역사라는 매듭은 풀리게 되어 있어요.' 를 떠올리며 두 친구 캐리스, 로즈와 점심을 먹던 어느 날을 풀어낸다. 지니아가 저승에서 돌아왔던 어느 날.
『도둑 신부』 는 세 친구 토니, 캐리스, 로즈에 대한 이야기가 현재를 시작으로, 지니아와 얽힌 과거, 그리고 더 오래 된 유년 시절의 과거의 일화가 차례 차례 등장하는 구성이다. 각 인물들의 서사 초입에 지니아란 인물이 죽었다는 소식에 각 인물들이 느꼈던 감정을 읽다보면 그들이 왜 지니아를 싫어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얽혔을지 궁금즘이 높아질 수 밖에 없다. 나는 지니아가 그들을 숙주로 삼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 첫번째 대상이었던 토니는 지니아의 장례식에서 누군가의 피와 고통과 죽음이 필요한 것 아닌가 떠올린다.
지니아는 조화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화를 보면 비웃었을 것이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한 사발의 피였다. 한 사발의 피와 한 사발의 고통과 누군가의 죽음. 그 정도면 지니아도 잠잠히 묻혀 지낼 것이다.
오년 전, 죽은 줄 알았던 지니아가 한 달에 한번 모이는 그녀들의 모임 장소에 나타난다. 억지로 외면하지만 세 인물들의 마음은 복잡해진다. 매클렁 홀이라는 여자 기숙사에 함께 있었던 셋 중에서 지니아와 제일 먼저 친구가 된 사람은 토니였다. 여학생들 틈바구니에서 만난 것이 아닌, 유일하게 그녀가 전쟁이라는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던 상대였던 친구 웨스트를 통해 만났다. 왼손잡이였고, 다른 여학생들과는 다른 분야를 좋아했고, 글의 문장을 거꾸로 뒤집어 읽고 쓰는 그녀를 인정해주는 웨스트를 사랑했지만, 웨스트는 이미 지니아와 깊은 관계였기에 친구로서 옆에 있었다. 이후 지니아가 웨스트를 버리고 떠난 후 그와 결혼하게 된다.
지니아와 나누는 우정은 매우 갑작스럽게 시작됐다. 그녀는 전속력으로 달리는 모터보트에 밧줄로 묶여 사방에서 튀는 파도를 온몸으로 맞고 환호성 때문에 먹먹한 귀를 달래 가며 뒤에서 끌려가는 듯한 심정이다. 아니면 핸들도 없고 브레이크도 없는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요란하게 내려가는 듯한 심정이다. 어떻게 손쓸 도리가 없다. 그런가 하면 이상할 정도로 바짝 긴장하고 있다. 팔과 목덜미의 작은 솜털들이 죄다 곤두서 있는 듯하다. 여기가 위험한 바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째서 위험할까?
1권에 나오는 토니의 이야기에서도, 캐리스의 이야기에서도 지니아는 대상의 약점을 교묘하게 파고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일지 거짓일지 알 수 없는 자신의 약한 점을 맞춤형으로 내보이고, 대상에게서 동질감을 이끌어내고 있다. 토니도, 캐리스도 마음을 열고 지니아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다. 지니아는 그들이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고, 내면을 건드려 원하는 것을 취한다. 고아로 사니 '남들에게 좋은 소리 들으려고 애쓸 필요 없다는 것', '원래 내 모습으로 살 수 있다는 거' 란 좋은 점 한가지가 있다며 토니에게 이야기하는 식이다. 그 가운데 독자들도 토니와 캐리스의 어릴 적 상처들을 목격하게 된다. 치유되지 않고 그저 닫아두었던 그 상처들를 지니아는 교묘히 이용했던 것일까.
지금까지 토니는 지니아가 자기와 전혀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비슷하다. 둘 다 고아가 아닌가. 둘 다 전시에 태어나 어머니 없이 바구니 하나 옆에 끼고 혼자 힘으로 헤치며 터벅터벅 앞으로 걸어가고 있다. 그 바구니에 든 것은 그들의 유일한 재산이다. 머리. 그것 말고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토니는 지니아가 엄청나게 존경스럽다. 특히 그 태연함이 존경스럽다. 예를 들어 지금만 해도 다른 여자들 같으면 눈물을 흘릴텐데 지니아는 웃고 있다. 토니를 보며 살짝 비웃는 듯이 웃고 있다. 토니는 이것을 가슴 뭉클한 용기, 역경에 맞서는 강철 같은 의지로 해석한다.
지니아는 토니와 캐리스에게서 남자를 빼앗고, 유희가 끝나면 다시 팽개치고 떠나버린다.
그는 대여받은 남자에 불과했다. 그는 지니아에 중독되어 있었다. 그녀를 한번 입에 대면 다시 사라질 것이다. 그는 인간의 귀에는 안 들리는 초음파 호루라기에 반응하는 개와 같았다.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면 달려갈 것이다. - p361
토니는 겪었기 때문에 안다. 빌리는 마법에 걸린 것과 비슷한 상태일 것이다. 하지만 지니아는 이내 싫증을 낼 것이다. 빌리는 너무 시시한 먹잇감이었고, 캐리스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너무 쉬운 상대였다. 토니는 지니아에 대해 연구한 결과 모험을 좋아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문을 부수고 들어가길 좋아하고, 남의 것을 빼앗길 좋아한다. 빌리는 웨스트처럼 사격 연습 상대에 불과했다. - p527
세 친구들이 서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눈여겨보게 된다. 냉철한 역사학자 토니, 요가와 텃밭 가꾸기를 즐기는 몽상가 캐리스, 당차고 밝은 사업가 로즈, 이 세 명이 단지 공동의 적이란 이유만으로 뭉치게 된 사이인 것일까 궁금해하면서 말이다. 영적인 능력이 있는 것처럼 묘사되는 캐리스의 시선에서 바라본 토니와 로즈의 모습을 보면 토니는 '서늘함'으로, 로즈는 '반짝임'의 기운으로 표현된다.
등장인물들의 중심 서사에 더하여 중간 중간 서술되는 복잡다단한 내면은 작품의 여성주의적 주제의식을 드러낸다. 남성의 편견은 물론, '여적여' 프레임을 떠올려보게도 한다. ‘여적여’가 남성 중심 사회가 악용하는 신화라는 관점을 알고 있지만, 마거릿 애트우드의 작품을 읽다보면 타협할 수 없는 간극을 보여주는 ‘여적여’ 또한 여성들간 관계의 일종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남성 사학자들은 그녀가 자기들 영역을 침범한다고 생각한다. 창과 화살과 투석기와 긴 창과 칼과 총과 비행기와 폭탄을 건드리지 말고 자기들 몫으로 남겨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누가 언제 뭘 먹었고 봉건 시대 가족들은 어떤 식으로 살았는지 하는 사회사학이나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얼마 되지도 않는 여성 사학자들도 똑같은 생각을 하지만 이유는 다르다. 그들은 그녀가 탄생을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죽음이나 전투 계획, 패주, 궤주, 대학살 연구라니 안 될 말씀이다. 그들은 그녀가 여자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사장 노릇은 골치 아프다. 여자들이 그녀를 상사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문제다. 여자들은 그녀를 자기와 똑같은 여자라고 생각하고, 언제쯤 떨어져 나갈지 궁금해한다. 그들의 섹시 전략이 그녀에게 먹히지 않고, 그녀의 섹시 전략도 그들에게 먹히지 않는다. 크고 파란 눈이 더 이상 무기가 되지 못한다. 여직원들은 그녀가 자기네 생일을 잊어버리면 손가락질하고, 그녀가 호통을 치면 남자 상사를 대할 때처럼 화장실로 달려가지 않고 눈앞에서 당장 울음을 터뜨리며 힘든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동정을 바란다. 그런 그들에게 커피라도 한잔 얻어 마시려고 했다가는 이보세요,자기 일은 자기가 해야죠라는 반응이 나온다. <중략> 그랬던 여자들이 남자 상사에게는 군소리 없이 커피를 대령한다. 아내에게 줄 생일 선물도 사다 주고, 애인에게 줄 생일 선물도 사다 주고, 커피도 끓여 주고, 슬리퍼도 입으로 물어서 갖다주고, 야근을 시켜도 아무 소리 하지 않는다.
1권에서는 로즈와 지니아가 얽힌 사연이 풀리지 않았다.캐리스가 '반짝이고 활기 넘치는' 이라고 표현하지만 로즈가 회사와 가족 속에서 보이는 모습은 애써 밝은 모습을 가장하는 것처럼 보여서 아슬아슬했다. 로즈의 사연도 매우 궁금해진다. 2권을 곧바로 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