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의 별이 빛나는 밤 - 고독 속 절규마저 빛나는 순간
이미경 지음 / 더블북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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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 지인들은 리뷰 써놓은 글을 보며, 언제 그렇게 책을 읽냐고 묻곤 한다. 출퇴근 시간에도 읽고, 퇴근 후에 주로 읽으며, 회사 독서동아리에서 점심시간을 이용해 함께 묵독하는 시간이나 필사모임 때 읽기도 한다. 오늘의 점심 모임에서 읽은 책은 『뭉크의 별이 빛나는 밤』 이다. 


≪에드바르 뭉크 : 비욘드 더 스크림≫전시를 다녀왔기에 전시 자문을 맡은 저자의 책이 더욱 궁금했다. 전시회에서 봤던 그림을 책 속에서 발견하는 재미에 더하여 전시회에서는 만나지 못한 작품이라도 작품들끼리 서로 연결되는 이야기들을 읽으니 더욱 좋았다. 전시회에 가기 전에도, 다녀온 후에도 읽기 좋은 책이다. 



『뭉크의 별이 빛나는 밤』 은 표현주의의 거장 뭉크((1863~1944))의 생애에 따라 크게 5장으로 나누어 뭉크의 삶과 작품을 설명하는 구조다. 뭉크가 평생을 우울과 불안, 광기에 사로잡혀 정신질환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그의 ‘인생 사용 설명서’ 라고 할까. 어린 시절과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시기는 1장에, 오슬로, 파리, 베를린를 거쳐 노르웨이로 돌아왔던 시기는 2장에서 다룬다. 3장에서는 밀리 테울로브, 다그니 율, 툴라 라스센, 에바 무도치의 뭉크의 여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에드바르 뭉크 : 비욘드 더 스크림≫ 전시에서 '생의 프리즈' 에 관련된 작품들이 참 인상 깊었었다. 


프리즈 frieze 는 건축용어로 지붕 아래 건물 윗부분을 장식하는 띠 모양의 조각이나 그림을 말한다. 뭉크는 1892년 베를린 전시에서 천장 바로 아래에 띠 형태로 작품을 전시한 바 있다. <중략> 

뭉크는 1893년 베를린 전시에서 처음으로 ≪생의 프리즈 The Frieze of Life≫를 선보였다. 최초의 ≪생의 프리즈≫는 사랑 섹션 여섯점, 즉 <목소리>, <키스>, <뱀파이어>, <마돈나>, <질투>, <절규>로 구성되었다. 

- p184


뭉크가 ≪생의 프리즈≫를 구성하게 된 것은 우연한 발견 덕분이었다고 한다. 여러 도시에서 순회전을 열면서 그림을 한꺼번에 늘어놓고 보다가, 앞뒤로 어떤 작품이 놓이는가에 따라 작품들 사이의 관계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생의 프리즈≫의 시작이었고, 관련된 전시에서는 작품에 프레임을 두르지 않았다. '황금색 프레임을 두르면 그 작품의 이야기가 프레임 안에 갇히게 되어 다른 작품들과 어울려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p185)  

책의 제목이기도 한 '별이 빛나는 밤' 에 관한 이야기가 가장 궁금했다. 사실 <별이 빛나는 밤> 을 들으면 난 고흐의 그림이 제일 먼저 떠오르니 말이다. 


서양미술사에서 밤은 시간적 배경을 설명하는 도구에 불과했다. 어두운 밤은 역사적 사건의 배경이 되고 밤의 어두운 속성은 불길함을 상징했다. 19세기 들어 예술가들은 밤의 낭만적 속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별이 빛나는 밤>이라는 작품을 처음 제작한 이는 작 프랑수아 밀레다. 밤하늘을 관찰하여 그린 밀레의 <별이 빛나는 밤>에는 별자리의 정확한 위치와 고요한 밤의 정취가 담겨 있다. 그 뒤를 이어 반 고흐와 뭉크가 차례로 <별이 빛나는 밤>을 그렸다. 

- p273


뭉크와 반 고흐가 생전에 서로 만난 적은 없지만, 비슷한 시기에 살면서 감정을 드러내는 데 색채라는 수단을 사용했으며 개인적 비극으로 고단한 삶을 살았고, 작품에 강렬한 감성을 담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뭉크가 반 고흐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반 고흐의 작품에 대해 "섬뜩할 정도로 끌렸다"라는 말로 경외감을 표시한 바(p276)도 있다고 하니 말이다. 

반 고흐의 작품은 조용한 밤의 풍경이 아니다. 활발히 움직이는 별 무리에서 오히려 밤에 깨어 활발히 활동하는 반 고흐의 야행성 생활 습관을 엿보기도 한다. 고흐에게 밤은 활동하는 시간이자 영감이 가장 활발하게 떠오르는 시간이었다. '그의 밤은 낮보다 더 화려했다'


뭉크는 밤하늘의 풍경이 아니라 외롭고 우울한 밤의 본질을 그렸다. 1893년 처음 그린 후, 모두 여섯 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남긴다. 뭉크의 작품은 우리 안의 내밀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여섯 점의 작품에는 뭉크의 삶과 내면의 변화가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뭉크는 예술은 진실해야 하고 진실하다고 믿었다. 뭉크의 <별이 빛나는 밤>에는 뭉크가 노쇠하고 병들어가고 나약해지는 과정이 진실하게 담겨 있다. 밤하늘에서 빛나는 것은 뭉크 자신이었다.'(p288) 


나름 여러 책을 읽고 전시회에 다녀왔지만, 『뭉크의 별이 빛나는 밤』 를 읽고 나니 다시 직접 그림을 보고 싶어졌다. 사진 촬영이 가능했던 전시라 찍어왔던 사진을 보며 책 속 내용을 확인해보지만 역시 직접 보는 것이 최고다. 이래서 N차 관람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실존의 고통을 형상화한 뭉크의 대표작 ‘절규’를 떠올리며 그를 광기의 화가, 고독과 절망의 화가라고 생각한다” 면서 “하지만 뭉크는 고통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여 예술로 승화시켰고, 살아 있는 거장으로 인정받으며 81세까지 장수하며 무려 2만 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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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자일스의 나환자 캐드펠 수사 시리즈 5
엘리스 피터스 지음, 이창남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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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자일스의 나환자』 는 많은 영미권 독자들이 캐드펠 수사 시리즈 중 가장 재미있는 책으로 뽑는다. 아마도 캐드펠 드라마의 영향도 있는 듯 하다. 캐드펠 시리즈의 책을 읽어갈수록 엘리스 피터스의 중세 역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소설의 배경과 여러 디테일을 짜넣는 솜씨에 감탄하게 된다. 미스터리 플롯의 촘촘함보다는 중세의 슈루즈베리의 사람들의 삶을 여행자의 시선으로 들여다보게 하는 매력이 넘친다. 여러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삶을 최대한 즐기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저절로 시선이 가게 한다.




수도원 교회에서 예순을 바라보는 듯한 늙은 남작과 어린 고아 상속녀의 결혼식이 이틀에 걸쳐 거행될 예정이다. 결혼 행렬은 세인트자일즈 병원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저택을 지나 병원 너머의 교회로 갈 예정이다. 세인트자일스 병원에는 나환자들이 치료를 받고 있다. 나환자들의 후원 성인인 자일스가 오래전 인적이 드문 곳을 택해 나환자 집단 거주 지역을 만들었지만, 이번에는 나환자들도 호기심을 가지고 길가에 나와 구경을 하려고 한다. 병으로 힘들어하는 그들에게 '만약 젊고 사랑스러운 신부가 지나가면서 이곳 사람들을 보고 움찔하는 기색 없이 미소를 보내준다면, 저들에겐 제 보살핌이나 찜질보다도 훨씬 큰 도움이 될 것' 이라고 기대하는 마크 수사.


여기서 지내다 보니 행복이란 의미 없이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잡아낸 무언가를 모아두었다가 나중에 추억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 p22


하지만 신랑인 남작은 이들을 기생충이라고 부르며 병을 옮기지 말고 눈앞에서 썩 꺼지라고 명령한다. 결혼식(소설에서는 혼례식으로 옛스럽게 번역되어 있다.) 전날 밤 신랑이 처참하게 살해당하고, 현장에서는 누군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덫이 발견된다. 캐드펠 수사는 사건의 진상을 추적한다.

그동안의 이야기들 속에서 보여지는 캐드펠 수사의 특징은 호기심이 많고 관찰력이 뛰어나다는 점, 기본적으로 성실하고 사람을 신뢰하며 배려심이 많다는 점이다. 수도원에 들어오기 전의 세상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의 행동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논리적으로 사건을 조사하며, 죄에 대하여 경직된 판단을 내리지 않고, 가끔은 규칙을 어기기도 한다. 또한 그가 해결해왔던 지금까지의 사건들은 비슷한 패턴으로 진행된다.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의심받는 사람이 등장하지만 범인은 아니고, 다소 경솔하고 성급한 결론을 내리려고 하는 행정관이 등장하며, 작품마다 한 쌍 이상의 연인이 등장하여 로맨스적인 요소가 추가된다.

이번 작품도 비슷한 공식으로 전개된다. 남작의 시동 중 한 명이 의심받는데, 그는 신부와 사랑하는 사이였다. 신부는 자신의 상속 재산을 노린 삼촌과 숙모의 강요로 남작과 결혼할 수 밖에 없었던 것. 캐드펠은 그가 유죄라고 믿지 않고 진짜 살인자를 찾아나서고, 수사 과정에서 남작의 비밀스러운 삶을 발견한다. 초반에 등장했던 세인트자일스 병원이 어떻게 관련 되는지 추측하고 확인해보는 것도 이번 권의 또다른 재미 포인트다.

범인은 누구일까. 그리고 두 연인의 사랑은 이루어질 것인가. 책 속에서 직접 확인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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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이웃
서수진 지음 / 읻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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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이웃』 은 '시드니의 크리스마스가 보통 그러하듯 그해의 크리스마스 역시 무더웠다' 로 시작한다. 호주인과 결혼해 현재 호주 시드니에 살면서 한국어를 가르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작가의 이력을 알고 있었기에 이번에도 전작들처럼 경계인, 이방인의 삶을 작품에 담았을까 궁금해하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시드니에 살고 있는 한인 여성인 한나, 애슐리, 미아, 도은. 이 4명의 삶이 12월 25일의 'Christmas Day' 부터 1월 1일 'New Year's Day' 까지의 8일 동안 교차한다. 4개월에 걸쳐 리모델링을 마친 도은의 집에 이들이 모인다. 부부 동반 파티였지만 도은의 남편인 후이는 보이지 않는다. 도은은 후이의 행방에 대한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는다.


가족과 친구를 떠나온 이민자들은 '한국인은 한국인이 등쳐먹는다'라는 말을 들으며 주위를 경계하는 시기를 거친다. 거기다 외국까지 와서 한국인과 어울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해져 현지 친구를 사귀려 애쓴다. 그러나 언어와 문화가 다른 현지인과는 친구가 되기 어렵다는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렇게 타국에서 덩그러니 혼자 남는다. 



외롭다. 그때 조금이라도 마음이 통하는 한국 사람을 만나면 처음의 결심은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만다. 한국인의 마음을 아는 한국인밖에 없다고 생각을 180도로 바꾼다. 그간의 실패와 고독이 불쏘시개가 되어 단박에 둘도 없는 사이가 되어버린다. 어렵게 얻은 친구를 놓치기 싫은 나머지 그를 바다 건너 두고 가족을 대체할 존재로 승격해 버린다.


 - p42



주변 이웃들이 독일로, 말레이시아로,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그들 또한 소설 속의 문장과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맞물린다. 불안하고 외로운 타국살이에서 가장 쉽게 모일 수 있는 곳이 교회란 이야기도 떠올랐다.

후이의 빈자리로 시작된 미묘한 어긋남 속에 4명의 이야기가 각각의 시선으로 서술된다. 그들이 다른 이들을 바라보았던 시선과 함께 다른 이들에게 숨겨왔던 진실, 그리고 서로가 외면했던 진실들이 서서히 드러난다. 그러면서 한달 전 토요일, 애슐리가 한나의 생일이라며 가까이 지내는 부부들을 모두 초대했던 장면이 교차된다.



자신의 생일도 아닌 친구의 생일을 축하하려고 며칠간 음식을 준비했을 애슐리, 아이처럼 순수하게 좋아하는 한나. 기쁜 소식을 감추면서도 행복을 숨기지 못하는 미아. 우리가 이렇게 친구로 지낼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누구에게도 진심을 내보이면 된다고 말하는 이민 사회에서 좋은 친구를 가진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 p145



네 명은 베트남인, 호주인, 한국인의 남편과 함께 하고 있다. 결혼을 한 이도 있지만 사실혼 관계인 커플도 있으며 각 가정은 저마다의 말못할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야이를 임신한 미아의 동거인인 에이든은 결혼을 원하지 않고, 마약에 절어있다. 그가 하는 마약의 출처는 도이의 동거인인 후이다. 아름다운 외모의 애슐리의 남편은 오픈 메리지를 주장하며 외도를 일삼는다. 도이의 남편인 후이는 애슐리에게 이틀에 한 번꼴로 문자를 보내며 스토킹을 벌인다. 한나의 남편인 경환은 도박 중독이다. 이런 배경에서 한달 만에 이 '다정한 이웃'들에게 벌어지는 일들은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한다. 각자 외면해왔던 어떤 것들이 크리스마스 이후 일주일 사이에 터지면서 그들의 일상이 산산조각 나고 만다.

장편소설 『코리안 티처』로 2020년 한겨레 문학상 수상한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다음 소설에서는 호주를 살아가는 한국인의 삶에 대해 그려보고 싶어요. 욕심을 부릴 수 있다면 가능한 한 많은 삶을 담아낼 수 있다면 좋겠어요. ‘코리안 티처’처럼 여러 여성들의 이야기로 구상하고 있는데, 다양한 형태로 호주를 살아가는 여성들이 어떻게 자기 정체성을 찾기 위해 분투하며 살아가는지 그려보고 싶어요." 라고 이야기 했었다. 『다정한 이웃』 이 그렇게 탄생한 것이 아닐까.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의 시작에는 시드니 한인 목욕탕의 세신사가 있었다. 세신사로부터 시작한 이야기에서 세신사가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소설은 몇 번이고 뒤집혔다' 라고 이야기하면서 '작가에게도 편집자에게도 쉽지 않은 책이었지만 독자들에게는 쉽게 읽히기를 바란다' 라고 전하던 작가. 세신사로 시작했던 소설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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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 한 구가 더 있다 캐드펠 수사 시리즈 2
엘리스 피터스 지음, 김훈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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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의 제목에는 '유골'이란 단어가 들어가더니, 2권에는 '시체' 란 단어가 들어간다. 제목만 봐도 추리 소설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가. 캐드펠 수사의 주변에는 계속 사건이 끊이지 않을 예정이라는 것도.




1138년, 왕위를 둘러싼 사촌 간의 혈전이 한창인 잉글랜드가 배경이다. 캐드펠 수사 시리즈는 영국 역사를 알면 더 재미있는 소설이다. 신성 로마 제국 잘리어 왕조의 마지막 황제 하인리히 5세의 황후였으며 모드 황후라 불리는 마틸다와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으로, 노르만 왕조의 마지막 국왕인 스티븐 왕 사이의 무정부 시대 내전을 배경으로 한다. 책 속에서는 소설의 끝에 각주 페이지를 두어 두 인물을 포함하여, 소설 속의 건물, 허브 등에 대하여 자세히 서술해놓기도 해서 이해하기가 편하다.


전장의 역한 피비린내와 매캐한 연기는 슈루즈베리 바로 코 앞에까지 육박해왔다. 전쟁의 위협이 죽음의 그림자처럼 성과 마을에 드리웠다. 스티븐 왕은 자신에게 반기를 들고 저항하는 슈류즈베리 수비군을 무찌른다. 그리고 헤스딘의 아눌프를 포함하여 포로 아흔네명을 모두 처형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수도원장은 그들이 어떤 범죄나 잘못을 저질렀든 간에 그들은 저마다 영혼을 가진 존재들이요, 적절하게 매장될 권리를 가진 존재라는 것을 왕에게 청원하고, 시신들을 수습을 캐드펠 수사에게 맡긴다. 대학살의 현장에 도착해 시신을 수습하던 캐드펠 수사는 시체가 아흔다섯 구임을 발견한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두 손을 결박당하지도 않고, 교수형을 당하지 않은 시신 한구를 찾아낸다. 더 이상의 추문을 피하려는 이들은 서둘러 시신을 매장해 진실마저 묻어버리려고 하지만 캐드펠 수사는 살해당한 불쌍한 젊은이를 위해서 반드시 범인을 밝히려고 한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탐문과 추리 과정에서 캐드펠 수사가 불쑥 뱉는 말들은 인간과 삶에 대한 통찰이 담겨있는 듯 했다. 수도원에 들어오기 전에 십자군 전쟁에 참전한 영국의 전직 군인이면서 약제학 전문가로 나오는 그는 전쟁을 겪은 후 신에게로 귀의했기에 그런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더욱 관조적인 태도를 보여주기도 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추악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지 알게 되면 신이 인간에게 행하실 정의와 자비에 대한 확신에 그늘이 드리울 수 있으니까. 시간이라는 잔혹한 불의가 시야에서 사라져 늘 영원 속에 거하는 경지에 이르려면 인생의 절반은 지나보내야 해.(p71)"


등장인물들간의 로맨스는 소설의 또 다른 재미가 된다. 두 커플이나 탄생한다는! 현란한 트릭은 없는 추리 소설이지만, 범인을 밝히려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휴 베링어라는 인물과의 끝 없는 신경전 또한 매우 흥미롭다. 캐드펠 수사는 그를 호적수로 인정한다.


망나니야 말로 호적수고, 녀석을 다른 상대와 바꾸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중략> 우리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책을 통해 배우며 살아가기 마련이지! 


- p291



캐드펠 수사는 스티븐 왕 편도 모드 황후편도 아니었다. 양 진영으로 나뉜 사람들을 보며 '그들 모두 현재의 무정부 상태와 내전의 상처를 벗은 미래의 잉글랜드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BBC 드라마 <캐드펠>의 원작인 이 시리즈는 중세 역사 미스터리의 팬이라면 꼭 봐야할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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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긴 방 마르틴 베크 시리즈 8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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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긴 방』 은 두 가지 사건이 별개의 사건인 것처럼 수사가 진행된다. 첫 번째 사건은 연쇄 은행 강도 사건으로, ‘불도저 올손’ 검사의 지휘 아래 조직된 특수수사대가 조사하는 사건이다. 국가경찰청장의 지시에 따라 은행 강도 건을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경찰은 이전 사건에서 다친 상처를 회복하고 막 복귀한 마르틴 베크를 제외하고 전부 은행 강도를 잡는 데 투입되지만 사건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른다. 이 사건에 투입된 콜베리와 군발드 라르손이 드디어 동료애를 보이는 장면이 등장한다. 각 캐릭터의 변화는 이 시리즈의 숨겨진, 깨알같은 재미이기도 하다.


콜베리와 군발드 라르손은 원래 서로 볼일이 없는 사이였다. 하지만 최근 동안 이런저런 일을 함께 겪으면서 상황이 조금 바뀌었다. 친구라고 부르거나 경찰서 밖에서도 만나자는 생각이 정도는 결코 아니었지만, 서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경우가 점점 잦아졌다.


- p93


두 번째 사건은 창문은 안에서 잠기고 문에는 이중 삼중의 잠금장치가 걸린 ‘잠긴 방’에서 한 남자가 총에 맞아 살해된 채로 발견된 사건으로 몇 달의 시간이 흐른 뒤에 발견된 시신은 심각하게 변형되었다. 이 소재는 추리 소설의 '밀실 살인 사건' 유형을 떠올리게 한다.

15개월만에 복귀한 마르틴 베크는 "그는 경찰관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국가범죄수사국 살인수사과의 과장을 맡은 경감이었다(p37)" 라고 생각하며 경찰의 감을 되찾고자 애쓴다. "경찰관으로 스물여덟해를 산 덕에 익힌 기술 중 하나는 보고서를 읽으면서 반복과 사소한 세부사항을 재빨리 걸러내는 능력이었다. 그 속에 어떤 패턴이 존재한다면 그것을 알아차리는 능력도. (p48)" 그는 차근차근 단서를 수집하고 곱씹으며, 얼마없는 단서 속에서 사건을 해결할 실마리를 찾기 위해 분투한다. 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서사에 익숙한 독자는 두 사건이 어떻게 연결될 지 눈에 불을 켜고 읽게 된다. 역시나 결말에서 탁월한 아이러니로 얽힌다는 것!

두 번째 사건의 초동수사를 맡은 수사관은 잘못된 판단으로 수사를 초반부터 망쳐놓았다. "요즘은 수사를 시작할 때 먼저 경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부터 수사해야하는 경우가 잦았다. 이것이 실제 사건 해결보다 더 어려운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p69)" 라고 한탄하는 마르틴 베크.

복지사회의 이면을 고발하고자 하는 의도를 담았기에 시리즈 특유의 사회 비판이 장면들과 등장인물들의 독백에 담긴다. "명색이 복지국가에 아프고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이 많다는 것, 그들이 누구의 돌봄도 받지 못하고 겨우 개 먹이로 연명하다가 서서히 쇠약해져서 쥐구멍 같은 거처에서 죽어간다는 것 (p53) " 라는 식이다.


마이클 코널리는 책의 서문에서 “(‘마르틴 베크시리즈는) 범죄가 해결되는 과정보다 훨씬 많은 것을 보여준다. 아름다운 구성과 짜임새와 연출을 가진 책들은 우리에게 어떻게 범죄가 발생하는가, 그리고 종종 어떻게 도시와 국가와 사회가 공모자가 되는가를 보여준다 부연하며, 독자들이 소설을 통해 자연스럽게 사회의 부조리한 면을 있도록 저자들의 의도를 설명했다.


- 소개 중에서


사건의 해결과 별개로 아내와 이혼했던 마르틴 베크가 새롭게 만난 인연은 다음 권을 더욱 궁금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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