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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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뜨거웠던 사랑도 시간이 지나면 기억으로 남는다. 헤어졌든 계속 만나왔든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오래전의 기억을 더듬는 경우가 있다. 때때로 아프고 때때로 미소를 짓기도 한다. 아팠던 사랑도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되는 것처럼 좋았던 일들만 떠오른다. 그러고보면 이상하다. 아팠던 기억들은 다 잊는 모양이다. 헤어지는 순간만 아플뿐 함께했던 좋았던 일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기억속에서 살아숨쉰다.

 

몇십 년 전의 일들을 떠올리게 되면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기억나는 경우가 없다. 노트에 메모를 남기지 않는 한. 드문드문 기억나는 일들에서 누군가와 처음 맞닥들인 순간은 영원히 지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열아홉 살의 폴이 엄마 아빠의 권유로 테니스를 치러 갔을 때 스무살 이상 차이 나는 수잔을 보았을 때의 그 순간을 말이다. 복식으로 한 조가 되어 테니스 경기를 하게 되며 소위 사랑에 빠진 걸 알았다. 열아홉 살의 폴이 마흔여덟 살의 수잔에게 반했던 것이다. 수잔에게는 폴 또래의 딸이 두 명 었었고 술에 절어사는 남편까지 있었는데 말이다.  

 

순전히 기억에 의존해서 쓴 글이다. 총 3부에 걸쳐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리는데, 폴이 가장 사랑에 빠져있었을 때의 기억은 1인칭 시점이다. 기억이란 게 기억하는 자의 입장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순전히 자신의 의도대로 수전과의 일들을 떠올린다. 수전의 집에서 저녁을 먹고 가는 경우도 많았고, 수전의 남편 고든이 정원사 인줄 알 정도로 그의 존재는 미미하게 비춰졌다.

 

소설은 본격적인 사랑에 빠진 시기를 다룬 1부와 2부에서는 함께 살면서 알코올 중독에 빠지는 수전을 바라보게 되는데 이때는 1인칭 시점과 2인칭 시점을 넘나든다. 자신이 바라보는 감정과 어느 정도 거리를 떨어져 바라보게 되는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3부에서는 급기야 3인칭 시점으로 기억들을 소환한다. 멀리 떨어져 마치 타인의 기억인듯 그렇게 떠올린다.

 

첫사랑은 늘압도적인 일인칭으로 벌어진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압도적 현재형으로, 다른 사람들, 다른 시제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137페이지)

 

 

 

기억은 기억하는 사람의 요구에 따라 정리되고 걸러진다. 우리의 기억이 우선순위를정하는 알고리즘에 접근할 수 있을까? 아마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내 짐작으로는, 기억은 무엇이 되었든 그 기억을 갖고 사는 사람이 계속 살아가도록 돕는 데 가장 유용한 것을 우선시하는 듯하다. 따라서 행복한 축에 속하는 기억이 먼저 표면에 떠오르게 하는 것은 자기 이익을 따르는 작용일 것이다. (39페이지)

 

 

한 사람의 시선으로 기억되는 일은 종종 답답함을 일으킨다. 상대방의 마음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아들 뻘인 남자와 사랑에 빠져 집을 뛰쳐 나온 수전의 마음은 알 수 없다. 내내 폴의 기억속에서만 소환될 뿐이다. 스캔들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폭행을 당해도 폴에겐 아무말도 하지 않으며 둘이서 도주하기로 했을 때도 묵묵히 그를 챙길 뿐이었다. 때로는 하숙집 주인처럼, 아들처럼, 조카처럼 혹은 대자처럼.

 

젊었을 때는 미래에 아무런 의무가 없는데, 나이가 들면 과거에 의무가 생긴다. 하필이면 자신이 바꿀 수도 없는 것에. (301~302페이지)

 

 

사랑했던 기억들은 시간이 지나며 희미해진다. 그토록 뜨거웠던 사랑도 기억속에서 간간이 떠올릴 뿐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자신에게 오래된 사랑이 있었음을 떠올린다. 소중했던 기억마저 퇴색되어간다. 알코올중독에 빠지고 기억을 잃어가며 점점 자신을 놓는 여인을 바라보는 폴의 심정과 닮았다.

 

오래된 사랑의 기억들은 하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바꿀 수 없는 과거의 기억들 속에서 사랑과 슬픔, 고통들의 기억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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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1 13: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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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1 14: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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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 산사 순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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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추석 연휴 끝자락. 여동생네와 함께 안동으로 출발했다. TV에서 나왔다는 숙소를 예약해 도착했더니 명절이라 손님이라곤 우리밖에 없었다. 주인장 또한 친구분들을 만나러 시내로 나가시면서 우리에게 오늘 도착할 손님 방을 안내하라는 전갈을 남기셨다. 그때 여행했던 곳이 안동의 하회마을, 안동 봉정사, 영주 부석사 그리고 영화 촬영지인 단양의 새한서점이었다. 2박 3일 간의 짧은 여행이었는데도 굉장히 깊은 의미가 있었다. 영화속에서 본 숲속에 자리한 헌책방의 모습이나 답사기에서 보았던 영주 부석사의 배흘림기둥을 본다는 건 감동이었다. 배흘림기둥을 한없이 바라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 곳에서 사진을 찍고 목조건축물로는 가장 오래되었다는 봉정사에서도 몇 시간을 보냈다.

 

흔히 산사를 종교적 의미로 보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의 문화유산으로 바라보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 그냥 바라보아서는 모른다. 문화유산을 소개하는 책을 먼저 읽고 바라보면 더 깊은 의미로 다가온다. 예를들면 가까운 거리에 있는 순천 선암사를 꽤 여러번 다녔었다. 외울 정도로 다닌 곳이었는데 유홍준 교수가 쓴 책에서 선암사의 다리 승선교를 논한 것을 보고 다시 선암사를 찾았었다. 교수가 한 설명을 기억하며 승선교를 바라보고 걷는데 그 느낌은 이루말할 수 없다.

 

아마 나 뿐만 아니라 많은 독자들이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읽고 우리 문화유산을 찾아 여행을 떠날 것이다. 책이 나오면 바로 읽고, 여행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읽으면 그 느낌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만큼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생각을 바로 일깨워주는 이가 유홍준 교수일 것이다. 올해 우리나라 산사 7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를 기념하여 저자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언급한 산사를 가려 뽑아 책으로 내었다. 아직 그가 답사하지 못한 산사도 있지만 그는 머잖아 산사를 향해 떠날 것 같다. 우리가 애타게 기다리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므로.

 

 

먼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산사는 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 봉정사, 부석사, 통도사 등 7곳의 절이 '산사, 한국의 산지공원'으로 등재되었다. 산사라는 말을 발음 그대로 사용해 그 의미를 알게 했고, 우리나라의 독특한 자연환경을 가진 불교유산이라는 설명을 실었다.

 

 

 

 

 

엊그제 주말의 일이다. 우리는 주로 여동생 가족과 함께 여행을 다니는데, 좋은 곳을 가면 꼭 사진을 찍어 연락하는 습관이 있다. 이는 다음에 오자는 소리인데, 이번에 그들이 간 곳은 해남 대흥사였다. 대흥사는 목포에 살 때 수없이 다닌 곳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거의 가보지 못했고, 3년전쯤 친구들과 함께 가볍게 다녀온 게 다였다. 명절에 해남 대흥사앞 유선관이란 여관에서 1박을 하자는 것이었다. 흔쾌히 오케이를 하고 이미 예약된 상태다. 이후 해남 대흥사 편을 읽는데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유홍준 교수가 설명해 주는 대흥사 편을 속속들이 외우리라 다짐을 할 정도였다.

 

우리가 한국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 문화유산의 우수성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외국인이 아름답다는 감탄사를 한 후에도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다. 이는 우리가 가진 것보다 우리가 접해보지 못한 다른 아름다움을 찾기 때문일 수도 있다. 우리나라의 산사야 흔한 게 아니던가 했단 말이다. 지금이야 어떨지 모르지만, 나 어렸을 때 수학여행을 가면 거의 불국사, 석굴암등 거의 절이 많았다. 왜 자꾸 절에만 다니는지 그때는 이해를 하지 못했다. 아마 역사 교과서에 수록된 사진 속의 문화유산을 실제로 보게 해주려는 의미였을텐데 그때의 우리는 그걸 알지 못했다는 게 문제다.

  

 

 

 

내가 역사를 좋아하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꾸준히 읽는덕에 아이들 어렸을 때도 경주며 부여, 우리의 유물이 있는 곳을 자주 찾았으나 아이들은 그걸 싫어했다. 오죽하면 걷기 힘들다고 '박물관병에 걸렸다'고 했을까. 그러고 보면 나도 극성 엄마였다. 지금은 다 컸지만 아이들은 빼고 어른들끼리만 자주 여행을 다니는데,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이 적어 그나마 낫다고 해야겠다.

 

산사의 미학은 건물 자체보다 자리앉음새에 있고, 산사의 답사는 진입로부터 시작된다. (361페이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 산사 순례』는 총 20 곳의 산사를 수록했는데, 우리가 가보지 못하는 금강산의 표훈사와 묘향산의 보현사가 수록되어 있다. 세계유산에 등재된 마곡사와 속리산 법주사는 최근에 다녀와 만약 다음 답사기에 수록된다면 또한번 방문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산사의 고즈넉함이 좋다. 위의 발췌글에서도 나타났다시피 산사는 산사를 향하는 진입로에서부터 경건함을 느낀다. 절을 향해 나아가는 진입로를 걷다보면 저절로 사색에 잠기게 된다. 커다랗게 쭉쭉 뻗은 나무들과 좁은 길 틈새를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며 걷는 길은 그야말로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다.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석등이나 오래된 목조건물의 수수함에 발길이 머물고 만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산사를 바라보는 즐거움과 등재되지 않았지만 그 아름다움과 기품이 서려있는 산사가 수록되어 있어 책 읽는 즐거움을 더한다. 유홍준 교수의 답사기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아마 쉽게 쓰여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려운 학문을 알지 못해도 그저 그가 설명한 대로 따라보다보면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안목이 생기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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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도둑 가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6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장선정 옮김 / 비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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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마니아 층을 거느리고 있는 감독 중 한 명이 바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다. 우연히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한 번 이라도 그의 영화를 보고 나면 반해버리는 작가 중의 한 명.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그의 작품이 상영될 때마다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 중의 하나에 나도 포함된다. 최근에 개봉한 「어느 가족」이란 작품도 그래서 챙겨본 영화이기도 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꽤 많은 영화에서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피로 이어져 있던 가족이든, 전혀 상관없는 가족이든 가족의 끈끈함과 애정에 대한 깊이있는 시선을 바라볼 수 있다. 다양한 방법으로 가족을 고찰하는 그의 영화가 가진 특색이다. 문학을 전공한 작가라는 사실을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영화를 먼저 만들고 소설을 나중에 쓴. 그래서 영화를 두 번 보는 느낌이랄까. 영화 속 사람들의 내면에 깊게 다가선 것이 이 소설이 가진 역할이었다.

 

한 가족이 있다. 할머니, 엄마, 아빠, 이모, 아들로 보이는 다섯 식구. 그런데 추레한 옷을 입은 아빠와 아들이 한 마트에 가서 특유의 손짓을 하고 아빠는 직원의 시선을 가리고 아들은 배낭에 물건을 떨어뜨려 담는다. 집으로 돌아와 샴푸가 없다는 이모와 맥주를 들이키는 할머니. 좁은 집에 여러 명이 모여살고 있다. 집에 오는 길 아빠와 아들은 추운 날씨에 밖에서 떨고 있는 여자 아이를 보았다. 아이가 안쓰러워 집에 데려와 음식을 먹이고 집에 데리고 갔으나 아이 엄마와 아빠로 보이는 사람들이 물건을 집어던지며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 아이한테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퍼부으며 말이다.

 

 

아이를 데려다 주려고 했으나 그 장면을 목격한 엄마와 아빠는 여자애를 다시 업고 집으로 돌아온다. 말을 하지 않는 아이, 몸에 여기저기 멍을 달고 있는 아이였다. 부모가 싫다면야 굳이 데려다 줄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아이를 거두기로 하고 유리라는 이름을 얻었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그때 그때 마트에 가서 집어 오고 옷은 대충 걸치고 다닌다. 유리에게 여자애다운 옷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는 옷가게에 가서 노란 수영복부터 차례대로 입혀 나올 정도로 좀도둑이 생활화된 가족이랄까. 일하기 싫은 핑계로 다리를 다친 아빠, 대형 세탁점에서 손님들의 물건을 슬쩍하는 엄마, 가슴을 흔들며 돈을 버는 이모, 아빠에게 물건을 훔치는 기술을 배운 아들, 그 오빠에게서 역시 물건을 훔치는 방법을 배우는 딸.

 

뭐 이런 가족이 다 있을까 싶다. 이들 가족은 피로 이어진 가족이 아니었다. 서로의 필요에 의해 맺어진 가족이었다. 비록 새 옷을 마음껏 사주지 못하고 먹고 싶은 걸 마음껏 하지 못했으나 무엇보다 피로 이어진 가족보다 더한 끈끈함이 있었다. 

 

 

가족을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떨까. 가족은 선택할 수 없는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들처럼 가족을 선택할 수 있다면. 굳이 그 사람이 나쁘고 좋고가 아니라 필요에 의해 선택되었더라도 진짜 가족보다 더한 행복함을 느낄 수 있다면 된게 아닐까. 자기의 연금을 가로채려고 들어왔지만 그 가족들과 함께 바닷가에 갔을 때, 비록 아무도 듣지 못했지만, '고마웠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 말이다.

 

 

여느때처럼 익숙한 스토리였다. 하지만 진짜 가족보다도 더한 가족이 이들 가족이 아닐까. 가족이 와해되었을때 가족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없어 안타까움을 내비쳤던 것처럼. 다시 이전처럼 돌아간 주리의 삶도 어쩌면 가짜 가족보다 못한 거였다.

 

고레에다 히로가즈의 가족을 바라보선 시선이 좋다. 특별할 것 없는 내용이지만 그 무엇보다 특별함을 나타낸 영화, 그에 속한 소설이었다. 감독은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읽은 다음 영화를 다시 한번 볼 것을 강조했다. 나 또한 영화를 먼저 보았고 소설을 읽었더니 다시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영화를 보며 울음을 삼켰던 나와 똑같은 소설을 읽으며 더한 눈물을 흘렸던 나는 이들 가족의 와해가 너무도 가슴이 아파서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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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30 12: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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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30 17: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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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비주얼 클래식 Visual Classic
제인 오스틴 지음, 박희정 그림, 서민아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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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작품을 몇 번이고 읽는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다. 더불어 원작 영화가 있는 경우 영화와 함께 보면 시각적인 효과까지 있어 더욱 감동적인 작품이 된다. 내게는 제인 오스틴의 작품이 대부분 그런데 『오만과 편견』 같은 경우 영화와 함께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른다. 그만큼 좋아한다는 말이다. 그런 내게 위즈덤하우스에서 나온 일러스트 판본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읽지 않고는 못배긴다는 표현을 써도 될까.

 

아무래도 매튜 맥퍼딘과 키이라 나이틀리 주연의 영화의 잔상이 깊게 남아있는 내게 일러스트는 때로는 비슷하게 때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도 느껴졌다. 아마도 영화의 잔상 때문이리라. 특히 다아시 씨가 그런 경우인데,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상당히 멋질 캐릭터이긴 했다. 잘생긴 외모와 부를 거머쥔 오만한 남자를 표현하기에 딱 맞았다고 해야 할까.

 

 

지금으로부터 200여년 전에 탄생한 『오만과 편견』은 로맨스 소설의 고전으로 불린다. 여성들의 사랑과 결혼에 대하여 아주 시시콜콜할 정도로 묘사했는데, 결혼 상대자의 최고 조건은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틀리지 않다. 오히려 꼭 닮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잘생긴 외모면 더욱 좋고, 재산을 어느 정도 가졌느냐에 따라 결혼 상대자로서의 최적의 조건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남성 뿐만 아니라 여성도 마찬가지였는데, 재산을 많이 가진 여자가 남자들의 결혼 상대자로서 우대를 받았다.

 

하트퍼드셔, 롱번의 베넷가에는 다섯 명의 딸이 있다. 아름다운 제인, 미모가 뛰어나지는 않지만 현명하고 지혜로운 엘리자베스, 그리고 메리, 철이 없는 리디아와 키티가 그들이다. 속물적인 베넷 부인은 네더필드 저택이 빙리 씨가 임대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무도회를 열어 자신의 딸들 중 한명과의 결혼을 바랐다. 무도회가 열리는 날, 빙리는 제인을 마음에 들어 했고, 그의 친구인 다아시는 빙리 양과 춤을 추었을 뿐, 춤을 기다리는 다른 여자들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고 무뚝뚝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빙리에게 엘리자베스에 대해 말하기를 '그럭저럭 봐줄만은 하지만 자기 마음에 들 정도로 매력적이지는 않다'고 했다. 그말을 들은 엘리자베스는 다아시의 오만함에 그에게 호감을 느낄 수 없었고, 오랜 시간 동안 편견에 쌓여 있었다.  

 

 

 

좋은 가문과 많은 것을 가졌으나 친하지 않은 사람과는 말을 하지 않는 다아시의 오만함과 친구가 좋아하는 여자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어머니와 다른 여동생들의 행동을 자기 친구의 결혼 상대자로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던 남자의 변화된 모습을 나타냈다. 또한 첫 만남의 편견으로 인해 다아시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지 않으려고 했다가 그가 하는 행동들, 저택 관리자 혹은 친구들에게 들었던 그에 대한 것들에서 분별력을 기르게 되어 호감을 갖기에 이르렀고 사랑을 깨닫게 되는 엘리자베스의 변화를 그린 작품이었다.

 

로맨스 소설의 모든 조건을 갖춘 작품이었다. 일단 빙리나 다아시의 조건을 보자. 연간 5천파운드와 만 파운드의 막대한 자산을 가졌기에 딸을 둔 많은 어머니들에게 사윗감으로, 여자들에게는 남편감으로 부족함이 없는 존재로 일컬어진다. 남자의 오만함이 여자들에게는 매력적으로 비춰지고 잘생긴 외모까지 갖춘 남자들이었다. 반면 소설 속에서 사랑받는 여자들은 아름답긴 하지만 많은 재산을 가지지 못했으나 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돕는다는 사실이다.

 

 

 

사실상 오만함은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이고, 인간이란 지극히 오만에 빠지기 쉬운 존재이며, 실제로든 착각으로든 자기가 지닌 이런저런 장점에 대해 자기만족에 빠지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이야. (35페이지)

 

"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게 하고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든다."

 

 

 

 

나는 특히 영화 속에서 무도회 장면을 좋아하는데, 여러번을 돌려봐도 늘 즐겁다. 음악과 함께 절도있는 동작으로 춤을 추는 장면은 압권이다. 드레스를 입고 어떤 남자가 자신에게 춤을 청할까. 춤을 추는 동안 다른 사람은 없고 둘만 있는 듯한 느낌을 갖는 것도 아름답다. 초록이 물든 정원을 산책하는 키이라 나이틀리의 모습 또한 아름답다. 사랑을 깨닫는 순간의 그 표정들과 서로에게 고백하는 순간의 눈빛은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아쥐게 한다. 물론 입가에는 미소를 담고 말이다.

 

일러스트가 삽입된 이 책을 읽고나서 다시 영화를 보았다. 다아시 역할의 매튜 맥퍼딘과 키이라 나이틀리, 제인으로 분한 로자먼드 파이크의 아름다움과 함께 여전히 설레는 영화라는 거였다.

 

 

언제 봐도 사랑스러운 영화. 언제 읽어도 사랑스러운 작품이 『오만과 편견』이다. 오래도록 사랑받는 작품은 이유가 있다. 언제 읽어도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하며, 여러 번 읽어도 설렘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감동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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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늑대의 피
유즈키 유코 지음,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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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관련 영화가 우리나라에 많은데 비해(물론 내가 일본 영화를 많이 보지 않았을 수도 있다), 경찰 소설은 일본에 압도적으로 많은 것 같다. 내가 읽은 것과 읽지 않은 것의 차이일 수도 있다. 미스테리 소설이라고 하면 한국 추리문학 보다는 일본문학 혹은 유럽, 영미 문학을 더 읽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걸 밝혀두고 싶다.

 

제목부터가 고독한 형사의 뒷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책 속 표지는 여성의 모습이 아련해 보이지만, 이 소설 속 내용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다고 본다. 다르게 생각하면 어울릴수도 있겠다. 내가 크게 관심갖지 않고 보았던 어떤 관계를 나타낼 수도 있다는 거.  

 

구레하라 동부경찰서 폭력단계 신참 형사 히오카가 새로 왔다. 그의 선임은 오가미 형사. 폭력단계에서 잔뼈가 굵은 경찰서 내에서도 함부로 건들수 없는 형사다. 또한 야쿠자로부터 돈을 받아 수사비로 쓴다는 비리 형사로 찍히기도 했다. 그와 함께 야쿠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을 조사하게 되는 게 이 소설의 골자다. 우리나라도 오래전에 폭력단체를 대대적으로 일망타진한 적이 있었다. 1990년대 노태우 대통령이 '범죄와의 전쟁' 을 선포했던 것 같은데 이 소설 또한 비슷한 시기다. 1988년 우리나라로 치면 88 올림픽이 일어나던 해의 폭력단과의 전쟁을 다뤘다.

 

야쿠자를 일망타진하려면 야쿠자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구조를 알아야 하고 사람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제대로 기억해야 한다. 즉 형사들은 기억력이 좋아야 제대로 된 수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오가미를 따라 다니며 수사 방법을 배우는 히오카. 부당한 수사 방법을 사용하지만 문제 제기를 할 수 없었다.

 

야쿠자 산하의 대부업체 직원이 실종 신고 되고, 그가 소속된 구레하라 금융을 치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의 거대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 중간에서 그들을 상대로 자유자재로 어느 누구를 치게 하고, 어느 누구를 지키게 하려는 오가미의 행동이 마치 본인이 야쿠자에 소속된 듯 하다. 우리나라 형사들도 폭력배의 뒷배를 봐주기도 하고, 그곳에 정보원을 심어 두고 정보를 캔다고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일본의 형사 또한 다르지 않다.

 

어떤 야쿠자의 부두목 같은 경우는 학교 친구인 적도 있어 야쿠자의 돈을 받는 듯한 장면을 포착한 히오카의 의심을 사게 된다. 그러거나 말거나 히오카를 자신의 수제자처럼 데리고 다니며 형사로서의 모든 수사 기법등을 알려주려고 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와중에 14년 전 미결 사건의 용의자로 오가미를 지목하는 투서가 날아들고 신문사의 기자가 오가미의 뒤를 캐기 시작한다. 소설은 새로운 급물살을 타게 된다. 오가미가 아키코의 남편을 죽인 가네무라를 죽인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가네무라를 죽인 것인가. 우리나라 같은 경우 폭력단이 쇠파이프를 가지고 세력 다툼을 하는 걸로 나와 있는 데, 소설 속 일본 야쿠자들은 총을 휴대하고 있다가 발포를 하기도 했다. 사람 죽이는 걸 우습게 알며 두목을 위해 아랫사람이 감옥에 가는 걸 영광으로 아는 건 우리나라와 다르지 않았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영화로 나왔던 '범죄와의 전쟁'의 일본 버젼 같기도 했다. 물론 그들을 일망타진하려는 경찰들의 이야기라는 게 다르다는 것일 뿐. 소설 중간에 히오카의 사건 일지가 챕터별로 삽입되어 있는데, 이는 소설의 결말 부분에 가서야 일지의 향방이 드러난다. 생각지 못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다. 소설은 다시 시작되고 있음을 알렸다. 고독한 늑대 시리즈의 탄생이랄까. 고독한 늑대 이야기가 계속 될 것이고 그는 또 폭력단계에서 새로운 면모를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했다.

 

꽤 탄탄한 경찰소설이었다. 경찰 소설의 백미로 일컬어지는 사사키 조의 경관 시리즈를 보는 느낌이었다. 여성 작가인데 남성 작가처럼 여겨지는 글을 썼다. 작가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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