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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음식의 언어 - 국어학자가 차려낸 밥상 인문학 ㅣ 음식의 언어
한성우 지음 / 어크로스 / 2016년 10월
평점 :
ᆞ단어 하나에서 시작해 여러 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오가며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고수, 만난 적 있으세요? 저는 만났습니다. 바로 이 책 <우리 음식의 언어>(어크로스, 2016)에서요. 음식에 대한 이야기라면 무조건 읽고 싶은 제게 이 책은 와, 뭐랄까, 언어 수집가가 몇십 년간 모아놓은 노트를 한 권으로 압축한 사전 같았어요. 상세한 레시피 같은 건 없고요, 맛깔 나는 음식 묘사도 없습니다. 이 책의 방점은 ‘음식’이 아니라 ‘국어학자가 차려낸’에 있거든요. 한반도는 물론 중국의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을 넘나들며 언어를 조사하고 연구해온 국어학자가 음식이라는 주제를 만나면 순식간에 음식 언어의 지도가 촤르르 펼쳐진다는 걸 이 책을 보면서 느꼈어요.
ᆞ‘밥’의 뜻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밥’이라는 목적어와 어울리는 동사를 거쳐, ‘밥’을 뜻하는 지역의 방언들을 지나, 1890년대의 주막집 밥상으로, 지난 100년의 밥그릇 크기의 변화로, 죽과 미음으로, 삼시 세끼와 며느리밥풀꽃으로, 끝나지 않을 것처럼 퍼져나갑니다. 드라마 <대장금>에 나온 표현 ‘징까루’에서 시작된 밀가루 이야기는 이효석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을 거쳐, 동요 ‘밀과 보리가 자란다’와 만나기도 하고요. 하나의 음식 언어가 세상 어디까지 닿게 될지 도저히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밤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목숨을 지켰다는 <아라비안나이트> 속세헤라자드 처럼, 한성우 작가님을 통과한 음식 언어 이야기는 끝을 모르고 이어집니다.
ᆞ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며 읽다가는 머리가 아파질 수도 있어요. 너무 방대한 자료가 압축되어 있으니까요. 호기심이 많고 새로운 지식을 배우는 데 즐거움을 느끼는 독자라면 어느 장을 펼쳐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나실 테고요. 한때 민속학과 방언학을 공부하고 싶었던 저는 언어학적 설명들이 자주 나오는 점이 무척 좋았습니다. 하지만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만큼 여지를 남겨두는 점도 좋았어요. 예를 들면 이런 식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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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58쪽) “볶음밥 역시 ‘볶은 밥’인데 같은 기제에 따라 ‘볶음밥’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인다. ‘비빔밥’의 ‘비빔’은 점차 ‘비빔국수’, ‘비빔냉면’ 등으로 세력을 확장해나간다. 이왕 ‘비빔’으로 굳어졌으니 ‘비빈’이 아닌 ‘비빔’으로 쓰이는 것에 대해 굳이 뭐라 할 수는 없다. 그렇게 굳어지고 그렇게 쓰이는 것이 말이다. 국어학자들이나 매달릴 어원 논쟁이나, 욕심 많은 지자체들이나 우길 원조 논쟁은 이제 그만하고 맛있게 비벼 먹으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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ᆞ이 책을 읽고 나니 한성우 선생님이 너무 궁금해져서 다른 저서는 없나 검색해봤어요. 2016년에 출간된 이 책 <우리 음식의 언어> 말고도 2권의 책이 더 있더라고요. 2018년에는 '유행가에서 길어 올린 우리말의 인문학'이라는 부제로 <노래의 언어>를, 2019년에는 '다음 세대를 위한 요즘 북한 말, 북한 삶 안내서'라는 <문화어수업>을 쓰셨대요. 세상에. 음식에서도, 유행가에서도, 북한 말에서도 이야기를 길어 올릴 수 있다니. 역시, 국어학계의 세헤라자드가 맞았어요... 2020년에는 또 어떤 주제로 언어를 수집하고 이야기를 엮고 계실지 무척 궁금한데요, 만물박사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밤새 듣고픈 손녀의 마음으로 저는 이제 <노래의 언어>를 들으러 갑니다! :)
+ 아참, 이 책의 단점은 읽다 보면 배가 고프다는 것... 음식 언어가 너무 많이 나와서 맛깔난 묘사 없이도 자꾸 배고파요... 음식 사진도 다 흑백이지만 아는 맛이 무서우니까... 그러니까 배고플 땐 읽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