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ronweed’라는 원제가 어떻게 ‘내가 너를 사랑한 도시’로 번역될 수 있을까? 궁금했다. 장영희 교수의 번역에, 퓰리쳐상을 수상한 소설이라니 읽고 나서 후회할 일은 없겠지. 한편으로는 겁이 났다. 보고 싶지 않은 것들, 매일 눈에 보이지만 못 본 체 했던 그들의 모습을 책을 읽는 동안은 결코 피할 수가 없을 테니까. 결국 ‘호기심’이라는 악마의 유혹에 이끌려 지옥 같은 세상을 만나고 말았다. 맛 없고 퍽퍽한 음식을 먹다 된통 체한 것처럼 마음 한 켠이 답답하다. 그들의 어쩔 수 없는 삶에 이제는 화가 치민다.
나는 ‘내가 너를 사랑한 도시’라는 번역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런 낭만적인 제목을 붙이기에는 그 도시가 너무나 더럽고, 지독하다. 장영희 교수는 주인공들의 삶 속에서 희망을 보았다지만, 내가 본 그들은 너무 지쳐 있었다. 눈 앞에 희망이 보이지만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낼 기력조차 없는, 진이 빠져 버린 사람들. 평생을 누군가에게 쫓기고, 하룻밤 몸 뉘일 곳을 찾아 헤매며 매일 밤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 너덜너덜해진 그들의 삶에 희망이란 가치를 부여하고, 애써 의미를 찾으려는 것조차 가진 자의 사치와 오만처럼 느껴질 뿐이다.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책을 보다가 문득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로 이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오늘도 그랬다. 어제 영화 한 편을 봤다. 잊고 싶은 과거의 망령이 결국 주인공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이야기였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시간의 강 위를 떠다니는 사람. 살아있는 송장처럼 흐릿한 눈으로, 죄의식에 휩싸여 갈 곳을 잃은 주인공의 모습은 이 책의 부랑자들과 꼭 닮아 있었다. 영화를 보며 인상 깊었던 대사가 있었다. 우리의 마음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손이라서, 인간은 그 손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는. 그 대사가 암시하듯 주인공의 마음이 가장 사랑했던 여자는 그의 손에 강간당하고, 죽음을 맞는다. 영화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오늘, 이 책에서 이 구절을 만났고 순간 소름이 끼쳤다.
“그의 인생에는 그가 결코 행하고 싶지 않던 일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의 손들이 그의 결재도 받지 않고 그대로 행해 버린 일들이 많다.
지금 그가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손은 그의 마음 한구석에 살고 있는 범죄자의 사자같이 보였다. 그의 손은 그의 의지력이 미치지 못하는 운명의 명령만을 좇는 행위의 대행자였다”. (221쪽)
옮긴이의 말처럼, 사회가 발전하고 부유해져도 집 없이 떠도는 이들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부익부 빈익빈.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골은 갈수록 커지고 깊어지기만 한다. 우리는 더럽고, 냄새 나는 부랑자들을 경멸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추악하고 고약한 냄새가 나는 ‘정신의 부랑자’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너를 사랑한 도시를 그들과 배회하며 나는 이 한 가지 물음을 얻었다. 앞으로의 삶은 그 물음에 ‘아니오’ 라고 답할 수 있는 삶이어야 함을 뼈 속 깊이 새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