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순 - 진실, 세상을 바꾸는 힘 한국의 저널리스트 시리즈
김학순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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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살 이후로 계속 한겨레를 구독해서 보고 있지만, 어느 순간부터 '가장 괜찮은 신문'을 꼽으라 말하면 주저없이 '한겨레'를 꼽지 못하게 되었다. '경향신문'이 오버랩되었기 때문이다.

한겨레를 읽다보면, 그들의 정치적 지향과 사회적 가치에 대해서 눈뜰 수가 있게되는 순간이 오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것들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분명 예전 어떤 날들에는 한겨레를 '가장 진보적인 신문' 그리고 '가장 열심히 만드는 신문'이라고 생각했었겠지만, 이제는 그 자리는 최소한 '경향신문'에 넘겨줘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한겨레에서 가장 주의깊게 읽게되는 것은 사설.칼럼 란의 내가 좋아하는 명사들의 글이 되었고, 문화면과 Esc 정도를 열심히 읽게 되었다. 정치면은 이제 더 이상 만지고 싶지 않을 지경으로, 내 생각으로 용인할 수 있는 틀을 넘어서고 있다.

사실 이 책의 저자 김학순을 잘 알지 못한다. 경향신문을 그렇게 꼼꼼하게 요즘 읽지 못하는 까닭이다. 부대에서 구독할 수 있는 신문 중에 '경향신문'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겨레는 반입이 된다. 난 처음에 까닭을 몰랐으나, 사실은 간단한 이유였다. "보는 사람이 없어서" 부대에서 보급소에 출입인가를 내주지 않은 것이다.

난 경향신문의 장점이 '단단함'이라고 생각한다. 발로 정말 열심히 뛰고, 현안들에 대해서 자신들의 관념으로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Fact' 그리고 'Truth' 그 자체를 위해서 발로 뛰어 기사를 쓴다는 느낌을 강하게 주는 것이다.

이 책에는 김학순이 썼던 칼럼들, 그리고 자신이 썼던 기사와 그에 대한 술회, 마지막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언론인들에 대한 촌평이 있다.

책의 마지막에 리영희 선생이 김학순에게 쓴 편지가 있는 데 다시금 읽어보게 된다.

"경향신문 편집국 김학순 부국장.

오늘 신문의 "부시의 '마니교 정치학'"도 잘 보았으며, 경향신문의 x리와의 국제면 기사의 선택, 평가, 논평과 해설면 구성... 의 계몽적 역할에 찬사를 보냅니다.

특히 미국정부, 그 수뇌는 그리고 미국의 국가적 대외정책, 전략의 본질에 관한 공정하고 정확한 인식과 비판의 수준 높은 제시는 언제나 돋보입니다. 특파원 보도와 xx 국제부 기자들은 "인간의 목숨값도 국력차"(김재중 기자)도 좋은 시각이었습니다.

참고로 1970년대 초 베트남 전에서 민정 캄보디아 마을사람들에 대한 소위 "오폭"의 1人당ㄴ 보상(목숨값)은 $37이었지오! 수고하세요. -리영희"

김학순의 책에서의 글 들 중 돋보이는 것은, 부시 행정부의 전략전술을 읽어내는 국제기사, 그리고 노무현 정부가 지향했던 방향과 그 결과들이 결국에는 괴리가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한 명탁월한 분석들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오로지 '공부하고 뛰'었기 때문이다.

언론인이 되려한다. 경향신문의 이대근 에디터나 김학순 같은 기자가 되려면 얼마나 많은 책을 읽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사회가 꿈틀거리는 방향을 바라봐야하는 지에 대해서 고민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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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된 언어 - 국어의 변두리를 담은 몇 개의 풍경화, 개정판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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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자 고종석

'자유주의자 고종석'. 이것이야 말로 고종석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말이 될 것이다. 사람들도, 그리고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자유주의자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따라서 우리는 그 화자의 정치적 성향 혹은 오리엔테이션이 된 배경을 추측해 볼 수 있다.

Liberalist 자유주의자를 '보이지 않은 손'에 대한 예찬을 퍼붓는 사람, 즉 국가의 개입의 최소화를 이야기하는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 화자를 '자유주의자 - 우파'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반면 Liberalist 자유주의자를 '진보주의자'로 해석할 여지도 있는데, 이럴 경우 개인의 정치적 자유에 대한, '다수'의 폭력에서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소수'에 대한 존 스튜어트 밀의 입론과 비슷한 입장이 된다.

고종석은 어떤 포지션에 있는 걸까? 예전의 서평에서도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http://blog.aladin.co.kr/hendrix/1715157) 그는 정치적 자유주의자에 가깝다. 그가 말하는 자신의 자유주의에 대해서 들어보자.

   
 

 말하자면 복거일이 내게 가르친 것은 반공주의도 아니었고, 자유주의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딱히 개인주의도 아니었다. 그가 내게 가르친 것은 보편주의였고, 나는 그 보편주의를 통해서 내 반공주의, 내 자유주의, 내 개인주의를 짓누르고 있던 수치심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나는 본래의 나를 찾았다(p.107).

 내가 이해하는 자유주의자는 만인이 파시즘을 옹호하고, 만인이 볼셰비즘을 지지해도 이를 수락하지 않는 정신의 이름이다. 그 자유주의자는 비판을 통해서, 그리고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을 때는 폭력에 호소해서라도 전체주의를 분쇄할 각오가 돼 있는 사람이다. 그는 사상의 자유시장을 옹호하지만, 그 사상의 자유시장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사상에 대해서만은 너그러울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자유주의자는 때때로 반민주주의자다(p.110).

 
   

이런 고종석에 대해서 예전부터 갖고 있던 느낌은 '파리지앵' 같은 도회적이면서도 어쩔 때는 '풍류랑'같은 품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고종석이 한국어에 대한 책을 썼다는 것에 대해서 처음엔 이해가 가지 않았고, 내가 아는 한에서는 기껏해야 '한국어'에 관한 책들이라는 것이 비분강개하여 외래어가 범람하는 세태에 대한 비난조의 것들이었기 때문에 "왜???"라는 물음을 갖고 이 책을 집어봤다. 혹여, 기자준비에 도움이 되는 '글쓰기'나 혹은 '한글 용법'이라도 나올까봐서 말이다.

신화에서 벗어나야 하는 한국어

이 책에 있는 글들은 주로 계간지에 썼던 소논문들이다. 신문의 시평보다는 깊지만, 전문 학술지에 올라오는 글들보다는 대중적이다. 여기에 나오는 글들은 모두 한국어와 관련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어에 관한 논의들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민족주의'에 대한 논의도 관련이 된다.

그의 주된 주장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1. 우리는 흔히 한국어를 '국어'라 말하고, 또한 '한글'과 '한국어'를 혼용해서 사용하지만, 이 용법들은 모두 틀렸다. 공평성을 위해서는 '국어'라는 표현보다 '한국어'라는 표현으로 바꿔 사용하는 것이 우리의 '정치적 올바름'을 위해서 필요한 일일테고, '한글'이 없던 시절에도 '한국어'는 존재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명확히 구분해서 써야한다(다만 이것들을 강제할 수는 없는 데, '용법'이라는 것은 언제나 관행으로 굳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우리는 7세기의 신라의 말과 글이나, 15세기의 초창기 한글로 쓰여진 말과 글, 그리고 현대의 말과 글 쓰임새를 같은 선상에 놓고 모두 '한국어'라고 묶지만, 기실 언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사소통'인데 과연 세가지의 '한국어'가 섞였을 때 우리는 같다고,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민족주의'로 해석하는 역사를 읽음으로써 '한국어'의 동형성만을 강조하지만, 사실 '한국어'는 역사를 살펴볼 때, 여러 족속들의 이질적 요소들이 섞여서 구성되어온 '감염된 언어'였고, 지금도 감염되고 있고, '감염'은 정당한 것이 된다. 따라서 순수한 '한국어'를 찾는 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신화추적의 행위에 불과하다. 만약 찾을 수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유아적 표현 이상이 안된다.

3. 결론적인 이야기지만, 한국어는 언제나 열려있어야 할테고, 완고한 '순수한 한국어'로의 지킴은 오히려 한국어 자체의 진화를 방해하고, 어쩌면 한국어 자체를 약화시키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영어 공용화론, 복거일

매번 고종석의 글들을 읽을 때, 부딪히는 난점이었지만, 그의 '복거일'에 대한 예찬은 이해하기 어렵웠다. '순수한 시장주의자'이자, 모든 것을 시장으로 환원한 나머지 '장기거래'마저 시장메커니즘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복거일에 대해서 왜 그리도 고종석이 예찬하는 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의 변이다.

   
 

 복거일은 내 스승이다. 나는 그에게서 반공주의가 부끄럽지 않은 신념이라는 것을 배웠고, 소수의 옹호가 힘들지만 값진 실천이라는 것을 배웠다. 또 나는 그에게서 집단의 이름으로 추구되는 '선'이 그 집단을 이루고 있는 개인들에게 흔히 파멸적이 된다는 것도 배웠다(p.106)

 앞으로 내가 어떤 글을 쓰든, 그 글들에는 스승의 그림자가 어른거릴 것이고, 스승의 목소리가 메아리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늘 내 자랑으로 남을 것이다. 카뮈가 그르니에에 대해 그랬다던가, 아무튼 나는 과거에도, 무슨 말을 하다보면 어느 새 스승의 말투로 말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카뮈가 자기 목소리에 담긴 그르니에의 목소리를 자랑스러워했듯, 나 역시 내 목소리에 섞인 스승의 목소리가 자랑스럽다(p.108).

 
   


하지만 나는 여전히 복거일에 대한 고종석의 예찬을 찬성할 수가 없다. 이러한 복거일은 언제나 '자유주의'의 간판을 들고 나타나지만, 대체로 보면 언제나 노조에 대한 '자유주의적 비판'은 있었으나, 재벌에 대한 '자유주의적 비판'은 없었고, 재벌을 키워준 '자유주의적 독재정권'에 대한 예찬은 있었으나, 제도적으로 자유주의를 완성시켜 시스템으로 '자유화'를 완수한 '개혁진보'에게 그는 과감하게 '좌파'라는 딱지를 붙여대는 편향되고 부당한 발언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감염된 언어>가 1999년에 나온 것을 감안하면, 아마 지금쯤은 고종석의 생각이 변했으리라고 가정해본다.

또 하나 논쟁적인 포인트는 '영어공용화'론에 관한 것인데, 영어공용화를 복거일이 주창하자 한동안 '지식사회'에는 난리가 났었는데, 고종석은 기실 논쟁의 포인트를 모르고 '반대론자'들이 논쟁을 벌였다 이야기한다. 사실 복거일이 바라는 논쟁의 구도는 '민족주의 vs 세계화주의'였고 자신의 대답은 '세계화' 시대에 있어서 가장 합리적인 대안으로서의 '영어공용화'론이었는데, 그와 상관없이 복거일은 '공용화론자'들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방법으로의 민족주의자로 불리기도 했었다는 것이다.

나 역시 민족주의에 대해서 굉장히 비판적이고, 아니 이제는 '퇴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지만, 한켠에는 '민족주의'에 물들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공용화론'이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책을 덮고서 좀 생각을 해보고서야 내 입장이랄 것에 대해서 떠오를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한국어'에 대해서 처음으로 딴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걸 이제 깨달았다는 것에서 내 무지를 잠시 탓했고, 또 한편으로 굳이 '번역투'나 '외래어 사용'에 자꾸만 마뜩찮아 하면서 불편해 할 필요가 없다는 해방감을 갖게된 것에 만족한다. '순수한 한국어'가 없는 이상, 중요한 것은 '윤문'일 뿐, 순수한 '순우리말'일 필요는 없게 되는 것 아닌가?

 

사족. 영어공용화론에 대한 내 반론

치사하지만 영어는 생존수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는 언제나 동적이고 '영어' 위주의 지배체제가 지속성을 가지고 얼마나 갈지는 장담을 못하겠다. 고종석의 말마따나 그 중국인들이 쉬이 그들의 문자체계를 포기할 지가 의심이 되고, '미국'의 패권이 얼마를 갈지 난 장담을 못하겠다. 요즘 '서브프라임'사태를 봐서도 그렇고... 미국 중심의 '영어'의 잔영은 물론 오래가겠지만, 그것이 영구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영어의 필요성이란 것은 그 자체가 '생존'이 되는 이에게 최대치, '교양'으로 여기는 이에게 최소치로 다가갈 뿐이다.

게다가 '번역'의 수준이라는 것이 점차 '사람의 손'을 타지 않고도 쉽사리 이루어지기 때문에 '정보화시대'의 '컨텐츠 경쟁'사회에 있어서 '정보 조직력' 혹은 '정보 이용능력' 등의 능력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요즘이기에 난 공용화론의 '실효성'을 잘 모르겠다. 모든 사람이 '영어'를 알아야 하는가?? 난 유보적이다.

이에 대해서 고종석은 '계급적 함의'를 들면서 공용화론을 옹호한다. 영어가 공용화되지 않는 것이 주는 계급적 함의를 말이다. 하지만 영어가 공용화된다해도 그것의 파급을 동시적으로 이룰 수 있다고 믿을 수는 없으며, 오히려 그것들은 '세월'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에 그 동안 벌어진 '계급적 균열'에 대한 대안 없이 사실 '계급'을 들먹거리는 것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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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스트가 되기 위한 공부의 첫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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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 위에 오른 밥상 - 건강한 사회를 위한 먹거리의 대반란
우석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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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의 첫번째 퍼즐, 도마 위에 오른 밥상

우석훈의 글들이 나에게 영감을 주고,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주고 있는데, 내가 읽은 우석훈의 저작은,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 -> <88만원 세대> ->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 -> <아픈 아이들의 세대> 순이었다. 그의 블로그를 들락날락 거리면서 '퍼즐'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이제야 조금 알 것같다. 그의 <음식국부론 - 도마 위에 오른 밥상>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의 <음식국부론 - 도마 위에 오른 밥상>과 <아픈 아이들의 세대>가 현상들을 통해서 그 근원에 어떤 문제가 있는 지를 추측하게 하는 퍼즐 조각이라면, <한미FTA...>는 그 경향을 촉진할 수 있는 퍼즐 그림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사실 정확한 인과관계는 아니고, 수십개의 조각으로 구성된 퍼즐의 조각조각을 통해서 그림을 그리는 것과 동형적이라 할 수 있겠다. <88만원 세대>가 그 결과물들이 그려내는 세상에서의 10대와 20대의 지금을 말한다면, <샌드위치 위기론 ...>은 지금의 기업들이 당면하는 '본질적' 위기에 대한 다시 바라보기가 될 것이다.

<도마 위에 오른 밥상>은 우리의 음식, 식단에 대한 이야기다.

우석훈이 가진 강력한 재능은 '박학다식함'이 신문 스포츠면 수준의 평이한 수준의 글로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책은 10대도 읽을 수 있고, 가정집의 가사노동을 하면서 잠시 밖에 짬을 낼 수 없는 한국의 주부들도 읽을 수 있다. 이 책에서도 그러한 장점은 유감없이 드러난다.

'한살림'이나 'coop' 등의 생협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는가? 요 몇년 새, 주부들의 입소문을 통해서 퍼지기 시작한 운동의 결과물 들이다. '아픈 아이들'이 늘어나고 그에 대한 원인 조차 알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대응인데, 아토피가 그런 흐름들에 크게 기여했다. 난 아직 결혼을 하지도, 아이를 가져보지도 않았고, 아토피를 앓아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크게 공감할 수 있을 지 장담을 못하지만, 밤새 가려워 긁는 '티없이 맑은 아이'의 울음을 듣는 엄마가 아이 만큼 마음 아파했으리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우석훈은 '아빠들의 입맛'과 '엄마들이 차려주는 밥상'의 괴리를 이야기하는 데, 밖의 식당에서 조미료에 버무려져버린 음식을 먹어버릇하여 길들여진 입맛을 가진 아빠들이 집에서 "왜 이리 싱거워?"를 연발하면서 엄마들은 조미료를 더 넣기 시작하고, 그걸 같이 먹는 아이는 '조미료'가 주는 영향권에 그대로 포획되게 된다. 결과적으로는 그런 입맛을 가진 아이들이, 지속적으로 '얕은 맛'에 노출되고, 외식을 즐겨하게 되며, 설탕과 조미료로 가득한 식단을 추구하게 되며, 아토피가 아니더라도 '비만'에 노출되는 것이 지금의 우리 식습관이 만들어낸 사회의 모습이다.

된장이 한동안 천대받다가 '항암제'로 추앙받기 시작하였고, 김치가 '세계인의 식품'이 되었다. 둘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단순하다. 오랫동안 먹어왔기에 검증되었다는 점, 그리고 '발효'라는 혁신적인 맛의 기법에 의한 음식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진보'에 대해서 매번 강변하지만, 기실 음식에 대해서 '보수'적인 것이 오히려 사회적인 혁신을 추동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음식 국부론

이런한 음식 이야기에 끝에 '음식국부론'이라는 제목에 대해서 생각할 문제들을 던지는데, 미국의 농업형태, 축산형태에 대해서 알려주는 부분이다. 우리는 미국에 대해서 자유주의적인 방법에 의해서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는' 방식의 영농정책이, 그리고 축산정책이 집행되리라 생각하지만, 미국은 그들에게 '생계비 형태'의 보상을 통해서 농업을 육성하고 있다. 그리고 대규모 원조를 통해서 세계인의 입맛을 길들이고 그것을 통해서 수요를 창출하면서(대규모 곡류 메이저 기업들) 이익을 보전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농업을 버리는 정책의 연속이다. WTO 문제가 불거진 이후 10여년이 지나고 있지만, 농업은 언제나 '울며 징징대는' 귀찮은 존재였을 뿐, 그들에게 진정한 '시민권'과 '생산자'로서의 권리를 준적이 없으며, 가장 진보적이었던 정부는 "6헥타르" 즉 1만 5천평 이상을 가진 기업농 형태가 아닌 다른 농업 형태를 철수하는 기조로 농업을 집행했고, 그 결과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이제 곧 음식의 '안전'이라는 것이 쟁점이 될 텐데, 그 때 우리는 누가 만든 식재료를 가지고 음식을 만들어 먹어야 하는가? 농촌 공동화를 오히려 조장하는 현재의 풍토는 곧바로 '아픈 아이들의 세대'를 양산하게 할 수밖에 없다. 유기농을 먹여야 겠지만, 현재같은 농업공동화가 심화될 수록, 유기농 농산물의 국산비중은 줄어들 수밖에 없고, 유기농 농산물은 비싸질 수밖에 없으며, '하이엔드'화 될 수밖에 없다.

그의 저작들은 언제나 처음에는 '우울함' 그리고 '극한적인 절망'을 안겨주지만 대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빼놓지 않는데, 그렇기에 결론 부는 오히려 '마지막 기회'를 말하는 어느 정도는 희망적인 논조가 보인다. 또 그가 다른 사회과학자들과 다른 것은 지금까지 나왔던 솔루션들과 좀 다른 방식의 '공동진화'라는 시스템을 상정하는 대안들을 내놓는 다는 점이다.

그가 말하는 대안은 '생협'이다. 최소한의 '중간거래'를 차단하고 진정 믿을 수 있는 음식, 안전한 음식을 얻을 수 있는 대안으로서의 '생협'. 우리는 '생협'에 대해서 '먹물 좀 먹은 가방끈 여자들'의 '귀찮은 소비행태'로 이야기 하는 경우도 있고, 어쩌면 지금까지의 어떤 좌파들도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하지는 않는 듯하다. GMO에 대한 비판은 하지만, 그 대안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데, 우석훈의 강점이란 당장 쓸 수 있는 '정책'으로서의 '대안'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음식에 대한 선택은 언제나 '개인적'인 것이 된다. 내가 '아웃백'을 먹던지 아니면 집에서 엄마가 해주는 '된장찌개'와 '계란 후라이'를 먹던지는 언제나 내 선택일 것이다. 물론 내가 유기농을 사는 지 안 사는 지의 문제 또한 내 개인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대다수가 유기농을 먹을 수 있는 환경에 노출되게 하는 것과, 유기농을 소수의 백화점 특별 매장에서만 살 수 있는 환경에 대다수의 사람들을 처하게 만드는 것은, 사회적인 문제, 크게는 국가적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공동진화'해야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사실 '거대담론'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는 생각에 '디테일'을 읽어내는 능력이 떨어졌던 나에게 이런 우석훈의 저작들이 주는 힘이란 엄청난 것이고, Journalist가 되려는 계획에 있어서도 많은 소스를 주며, 어떤 방향으로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한 번쯤 다시 고민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있다. 다시 한번 그의 저작들을 찬찬히 살펴 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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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의 열망과 절망 - 진보.개혁의 위기를 말하다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엮음 / 후마니타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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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민주화, 처절한 응징의 20년


민주화, 6월 항쟁, 5월의 광주, 등등을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는가? 왠지 모를 뭉클함이 들지 않는가? 혹은 여전히 그 때 부르던 민중가요를 되뇌이지 않는가?

민주화의 상징이었던 6월 항쟁이 발발한 지 20년이 지났다. 문민정부를 거쳐 평화적인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룩되고, 또 한편으로 순수한 개혁세력(?)에 의한

정권이 성립되었고, 그 마지막 해수를 채워가고 있다.

민주화를 꿈꿨던 사람들이 바랬던 세상이 우리에게 과연 근접해 오고 있는가?

환멸의 정치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믿었던 이들에게 실망하는 것은 둘째치고 뒤통수나 맞지 않았으면 하는 경우는 발견하지 않았나??

아니 이 정도의 이야기도 굉장히 앞서가는 것일 수 있다.

오히려 이제 그러한 담론들이 '허무맹랑한' 소리에 처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건 아닌가?

막연한 진보에 대한 기대와, "역사는 진보한다"라는 믿음에 기대었던 이들에게 현재까지의 20년은 어쩌면 상실의 시대였을 수도 있고,

오히려 그런 진보적 담론들에 대해서 반대하거나, 혹은 이해하지 못했던 이들에게 이 20년은 철저한 학습효과를 통한 '부정'을 만들어 내는 기간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경향들을 정확하게 짚어내서 현장감 있게 펼쳐냈던 어떤 방법의 수단도 사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민주화 20년의 열망과 절망"은 이에 대한 처절한 현장 보고서다.

"이제 많은 이들에게 6월 항쟁은 기억을 통해서가 아니라, 활자와 다큐멘터리 필름을 통해 배워야 할 역사로 편입되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는 완성되지 않았다. 민주화 20년 동안 힘없고 소외된 자, 가난한 자들을 구원하고 민중을 위한 세상을 열겠다고 나섰던 사람들이 집권하고, 권력과 부와 명예를 얻고, 이 사회의 주류로 부상했다. 그런데 왜 새로운 사회를 향한 그때의 열정은 오히려 싸늘한 절망으로 식었는가? 그토록 목마르게 부른 민주주의가 왔는데 왜 아직도 가진 자는 더 많이 갖고, 없는 자는 더 가난해지고, 거리는 아직도 비정규직과 농민, 구조조정을 당한 자들로 넘쳐 나는가? 왜 처자식을 살해하고 자살하는 가장이 늘고 있으며, 굶주려 우유와 빵을 훔쳐 먹는 이들이 아직도 많은가?"(p.360)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부문의 치명적 단상들을 말로써, 그리고 현장의 모습으로써, 또한 지표로써 보여준다.

그리고 또한 그것들에 대한 대안들이 어떤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말해준다.

게다가 가감없이 진보를 비판하고, 어떤 면에서 문제점들이 발생하는 지 그 단면을 해부해 본다.

그 논쟁들의 축을 타고 지도를 그려보고 싶다.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역사적 맥락과, 철학, 경제적 배경이라는 것을 말이다.

어떤 거창한 담론보다 현실의 절절한 묘사가 더 강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저널리즘의 표본이다.!

p.s. 결론적으로 이 책은 최장집 선생이 말했듯, 민주주의는 결국 노동의 문제고 이 노동의 문제라는 것은 단순히 노사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질의 문제, 양극화의 문제, 전반적인 사회적 분위기의 문제가 된다. 고착화된 사회. 우리는 어떤 사회를 그릴까의 문제이기에 우리 사회의 단면을 살펴볼 수밖에 없는 거다. 그리고 그 중심에 노동의 문제가 있는거다. '노동의 정치적 위치'라는 것을 생각해 볼 수밖에 없고, 고용이라는 것이 주는 정치적 파장, 비정규직이 주는 사회적 효과를 더 염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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