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된 언어 - 국어의 변두리를 담은 몇 개의 풍경화, 개정판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자유주의자 고종석

'자유주의자 고종석'. 이것이야 말로 고종석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말이 될 것이다. 사람들도, 그리고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자유주의자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따라서 우리는 그 화자의 정치적 성향 혹은 오리엔테이션이 된 배경을 추측해 볼 수 있다.

Liberalist 자유주의자를 '보이지 않은 손'에 대한 예찬을 퍼붓는 사람, 즉 국가의 개입의 최소화를 이야기하는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 화자를 '자유주의자 - 우파'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반면 Liberalist 자유주의자를 '진보주의자'로 해석할 여지도 있는데, 이럴 경우 개인의 정치적 자유에 대한, '다수'의 폭력에서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소수'에 대한 존 스튜어트 밀의 입론과 비슷한 입장이 된다.

고종석은 어떤 포지션에 있는 걸까? 예전의 서평에서도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http://blog.aladin.co.kr/hendrix/1715157) 그는 정치적 자유주의자에 가깝다. 그가 말하는 자신의 자유주의에 대해서 들어보자.

   
 

 말하자면 복거일이 내게 가르친 것은 반공주의도 아니었고, 자유주의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딱히 개인주의도 아니었다. 그가 내게 가르친 것은 보편주의였고, 나는 그 보편주의를 통해서 내 반공주의, 내 자유주의, 내 개인주의를 짓누르고 있던 수치심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나는 본래의 나를 찾았다(p.107).

 내가 이해하는 자유주의자는 만인이 파시즘을 옹호하고, 만인이 볼셰비즘을 지지해도 이를 수락하지 않는 정신의 이름이다. 그 자유주의자는 비판을 통해서, 그리고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을 때는 폭력에 호소해서라도 전체주의를 분쇄할 각오가 돼 있는 사람이다. 그는 사상의 자유시장을 옹호하지만, 그 사상의 자유시장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사상에 대해서만은 너그러울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자유주의자는 때때로 반민주주의자다(p.110).

 
   

이런 고종석에 대해서 예전부터 갖고 있던 느낌은 '파리지앵' 같은 도회적이면서도 어쩔 때는 '풍류랑'같은 품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고종석이 한국어에 대한 책을 썼다는 것에 대해서 처음엔 이해가 가지 않았고, 내가 아는 한에서는 기껏해야 '한국어'에 관한 책들이라는 것이 비분강개하여 외래어가 범람하는 세태에 대한 비난조의 것들이었기 때문에 "왜???"라는 물음을 갖고 이 책을 집어봤다. 혹여, 기자준비에 도움이 되는 '글쓰기'나 혹은 '한글 용법'이라도 나올까봐서 말이다.

신화에서 벗어나야 하는 한국어

이 책에 있는 글들은 주로 계간지에 썼던 소논문들이다. 신문의 시평보다는 깊지만, 전문 학술지에 올라오는 글들보다는 대중적이다. 여기에 나오는 글들은 모두 한국어와 관련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어에 관한 논의들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민족주의'에 대한 논의도 관련이 된다.

그의 주된 주장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1. 우리는 흔히 한국어를 '국어'라 말하고, 또한 '한글'과 '한국어'를 혼용해서 사용하지만, 이 용법들은 모두 틀렸다. 공평성을 위해서는 '국어'라는 표현보다 '한국어'라는 표현으로 바꿔 사용하는 것이 우리의 '정치적 올바름'을 위해서 필요한 일일테고, '한글'이 없던 시절에도 '한국어'는 존재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명확히 구분해서 써야한다(다만 이것들을 강제할 수는 없는 데, '용법'이라는 것은 언제나 관행으로 굳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우리는 7세기의 신라의 말과 글이나, 15세기의 초창기 한글로 쓰여진 말과 글, 그리고 현대의 말과 글 쓰임새를 같은 선상에 놓고 모두 '한국어'라고 묶지만, 기실 언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사소통'인데 과연 세가지의 '한국어'가 섞였을 때 우리는 같다고,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민족주의'로 해석하는 역사를 읽음으로써 '한국어'의 동형성만을 강조하지만, 사실 '한국어'는 역사를 살펴볼 때, 여러 족속들의 이질적 요소들이 섞여서 구성되어온 '감염된 언어'였고, 지금도 감염되고 있고, '감염'은 정당한 것이 된다. 따라서 순수한 '한국어'를 찾는 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신화추적의 행위에 불과하다. 만약 찾을 수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유아적 표현 이상이 안된다.

3. 결론적인 이야기지만, 한국어는 언제나 열려있어야 할테고, 완고한 '순수한 한국어'로의 지킴은 오히려 한국어 자체의 진화를 방해하고, 어쩌면 한국어 자체를 약화시키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영어 공용화론, 복거일

매번 고종석의 글들을 읽을 때, 부딪히는 난점이었지만, 그의 '복거일'에 대한 예찬은 이해하기 어렵웠다. '순수한 시장주의자'이자, 모든 것을 시장으로 환원한 나머지 '장기거래'마저 시장메커니즘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복거일에 대해서 왜 그리도 고종석이 예찬하는 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의 변이다.

   
 

 복거일은 내 스승이다. 나는 그에게서 반공주의가 부끄럽지 않은 신념이라는 것을 배웠고, 소수의 옹호가 힘들지만 값진 실천이라는 것을 배웠다. 또 나는 그에게서 집단의 이름으로 추구되는 '선'이 그 집단을 이루고 있는 개인들에게 흔히 파멸적이 된다는 것도 배웠다(p.106)

 앞으로 내가 어떤 글을 쓰든, 그 글들에는 스승의 그림자가 어른거릴 것이고, 스승의 목소리가 메아리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늘 내 자랑으로 남을 것이다. 카뮈가 그르니에에 대해 그랬다던가, 아무튼 나는 과거에도, 무슨 말을 하다보면 어느 새 스승의 말투로 말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카뮈가 자기 목소리에 담긴 그르니에의 목소리를 자랑스러워했듯, 나 역시 내 목소리에 섞인 스승의 목소리가 자랑스럽다(p.108).

 
   


하지만 나는 여전히 복거일에 대한 고종석의 예찬을 찬성할 수가 없다. 이러한 복거일은 언제나 '자유주의'의 간판을 들고 나타나지만, 대체로 보면 언제나 노조에 대한 '자유주의적 비판'은 있었으나, 재벌에 대한 '자유주의적 비판'은 없었고, 재벌을 키워준 '자유주의적 독재정권'에 대한 예찬은 있었으나, 제도적으로 자유주의를 완성시켜 시스템으로 '자유화'를 완수한 '개혁진보'에게 그는 과감하게 '좌파'라는 딱지를 붙여대는 편향되고 부당한 발언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감염된 언어>가 1999년에 나온 것을 감안하면, 아마 지금쯤은 고종석의 생각이 변했으리라고 가정해본다.

또 하나 논쟁적인 포인트는 '영어공용화'론에 관한 것인데, 영어공용화를 복거일이 주창하자 한동안 '지식사회'에는 난리가 났었는데, 고종석은 기실 논쟁의 포인트를 모르고 '반대론자'들이 논쟁을 벌였다 이야기한다. 사실 복거일이 바라는 논쟁의 구도는 '민족주의 vs 세계화주의'였고 자신의 대답은 '세계화' 시대에 있어서 가장 합리적인 대안으로서의 '영어공용화'론이었는데, 그와 상관없이 복거일은 '공용화론자'들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방법으로의 민족주의자로 불리기도 했었다는 것이다.

나 역시 민족주의에 대해서 굉장히 비판적이고, 아니 이제는 '퇴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지만, 한켠에는 '민족주의'에 물들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공용화론'이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책을 덮고서 좀 생각을 해보고서야 내 입장이랄 것에 대해서 떠오를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한국어'에 대해서 처음으로 딴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걸 이제 깨달았다는 것에서 내 무지를 잠시 탓했고, 또 한편으로 굳이 '번역투'나 '외래어 사용'에 자꾸만 마뜩찮아 하면서 불편해 할 필요가 없다는 해방감을 갖게된 것에 만족한다. '순수한 한국어'가 없는 이상, 중요한 것은 '윤문'일 뿐, 순수한 '순우리말'일 필요는 없게 되는 것 아닌가?

 

사족. 영어공용화론에 대한 내 반론

치사하지만 영어는 생존수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는 언제나 동적이고 '영어' 위주의 지배체제가 지속성을 가지고 얼마나 갈지는 장담을 못하겠다. 고종석의 말마따나 그 중국인들이 쉬이 그들의 문자체계를 포기할 지가 의심이 되고, '미국'의 패권이 얼마를 갈지 난 장담을 못하겠다. 요즘 '서브프라임'사태를 봐서도 그렇고... 미국 중심의 '영어'의 잔영은 물론 오래가겠지만, 그것이 영구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영어의 필요성이란 것은 그 자체가 '생존'이 되는 이에게 최대치, '교양'으로 여기는 이에게 최소치로 다가갈 뿐이다.

게다가 '번역'의 수준이라는 것이 점차 '사람의 손'을 타지 않고도 쉽사리 이루어지기 때문에 '정보화시대'의 '컨텐츠 경쟁'사회에 있어서 '정보 조직력' 혹은 '정보 이용능력' 등의 능력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요즘이기에 난 공용화론의 '실효성'을 잘 모르겠다. 모든 사람이 '영어'를 알아야 하는가?? 난 유보적이다.

이에 대해서 고종석은 '계급적 함의'를 들면서 공용화론을 옹호한다. 영어가 공용화되지 않는 것이 주는 계급적 함의를 말이다. 하지만 영어가 공용화된다해도 그것의 파급을 동시적으로 이룰 수 있다고 믿을 수는 없으며, 오히려 그것들은 '세월'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에 그 동안 벌어진 '계급적 균열'에 대한 대안 없이 사실 '계급'을 들먹거리는 것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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