빽판 키드의 추억
신현준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고등학생 때 있었던 일의 한자락.

고1, 방송반에서 울려나오던 노래에 빠진 나머지 Announcer에 도전했다. 그 때 사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PD였으나, 괜한 주눅과 뭔가를 쓰고 방송을 만든 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감조차 없었던 나는, 일단 아나운서가 먹고들어간다는 사실에 곧바로 아나운서를 지웠했지만, 실제로 방송반 생활을 하면서 나를 잡아끈 건 1년 선배였던 박진호(형 보고 싶네요. 뭐하고 지나나요?!!)의 음악관이었다. 이승환의 목소리로 천일동안을 열창하면서도 Mr. Big이나 Rialto, Radiohead, Nirvana를 틀어주는 그가 존경스럽기 시작했고, 음악관에 혁명적 변화를 겪고야 말았다. FinKL(Fine Killing LIberty라는... 어이 없는)이나 R.ef, 서태지와 아이들을 마냥 좋아하던 나는 어느날 부터 Rock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얼치기 락음악 매니아가 되었다.

친구들과는 커트코베인과 히데가 죽었는 지 안 죽었는 지를 가지고 대판 논쟁을 벌였으며, TV에 나오던 한 때는 흠모했던 아이돌 스타들에게 저주를 의식적으로 퍼붓기 시작했다.

그런 의식은 실제로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그날 까지 나를 휘감기 시작했고, 덩달아 인물과 사상, 강준만, 진중권, 한겨레21로 이어지는 지식인 스타들과 그 세계를 접함에 따라, 변할 수 없는 Identity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지금에서야 이야기하지만, 그건 내 체험이나 내 계급성의 인지가 아닌 마냥 잘나보고 싶었던 치기어린 과시욕과 공명심의 상징이기도 했다. 김규항의 말처럼 "달콤쌉쌀한 초콜릿" 같은 게 아니었을까?

여튼 덕분에 나는 Queen을 듣기 시작하고 프레디 머큐리를 존경하기 시작했고, Paul Gilbert같은 기타리스트가 되고 싶었고, 패닉을 들으며 UFO의 가사를 한국 사회에 도입시켜보기도 했다.

신현준, 빽판 키드의 추억

어쩌면 신현준은 내가 공감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일 거다. 말장난 하자는 게 아니라, 양면적이라는 거다. 어렸을 적의 빽판키드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내가 공감할 수 있는 거고(나는 열심히 내 버전의 mp3 playlist를 만들고 있었으니깐), 다른 한편으로는 그 만큼 음악을 내가 잘 듣지 않을 뿐더러, 나는 요즘 힙합에 미쳐있기 때문에, alter문화의 중심에 Rock을 놓는 그와 차별적이고 그런 면을 공감할 수 없다는 거다. 사실은 '공감'이라는 말을 붙이기 보다는 '차이'라는 점이 더 적절할 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현재 문화평론가이자 진보적 음악운동을 전개하는 신현준의 일대기에 대한 이야기다. 언제나 자서전류의 책을 쓰는 이들은 과거의 관점과 현재의 관점이 섞이는 지점에서 묘하게 고민하게 되는데, 그건 바로 과거를 현재의 관점으로 바라보느냐, 혹은 그 때를 그 때의 기억으로만 순전하게 정리하느냐의 문제이다. 마치 이는 랑케의 '사실 그 자체의 역사'냐, 혹은 E.H. 카의 '역사가에 의해서 판단된 역사'냐의 문제만큼이나 빈번하게 부딪히는 문제라 할 수 있겠다.

신현준은 랑케식으로 이야기를 호도하려하지 않는다. 그 때의 기억을 지금의 관점에서 추억하면서도 나름의 판단을 가하고, 그 것을 통해서 자기의 지도를 발견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저술은 한편으로 모자이크 같이 흩어져 있으나 결과적으로 단단하게 엮이고 그의 관점을 설명하고 그가 갈 방향까지의 길을 잘 보여준다.

민중문화가 주는 역동성에 빠져서 노래패 활동을 하면서도, 죽어가는 그 바닥에 대해서 계속 고민해야했던 내 대학시절의 모습과도 자꾸만 결합되는 그의 과거는 내 고민들의 단상과 묘하게 결합되어 이 책을 놓지 못하게 만들고, 결국 잡은 즉시 다 읽게 만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대안담론을 만들고자하면서 밴드음악을 추구했던 것이 어떤 의미였을까를 노찾사나, 인디밴드들에 대한 그의 기록을 통해서 다시금 고민하게 했다. 또한 과거의 한국 대중음악(그는 실제로 한국 음악사의 고고학을 작성한 바있다.)의 공과에 대한 부분과 그 가능성에 대한 부분을 읽으면서, 나의 좁은 음악에 대한 이해를 탓하게 만들었다.

이쯤에서 끝났다면, 이건 대중음악평론가 중 '학자연'하면서 '먹물티' 팍팍내는 작자의 단상에서 멈췄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한 발 더 나아가서 대중과 어떻게 소통할 까의 문제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이는 내게도 같은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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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신현준을 기억했던 건 그가 서사연에서 이진경과 함께 저술했던 '철학의 탈주'가 가장 처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열어가고자 하는 평론가로서의 관점을 더 주목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처음에는 안타까워했지만, 문화와 정치를 바라보는 그의 관점을 확인하고 편견은 치워버리기로 했다.

간혹 이런 부분일 것이다.

... 대학생문화가 꼭 청년문화가 되어야 한다든가, 청년문화의 아이콘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나름대로 1980년대는 '혁명'의 시대였으니까. ... 보다 직접적으로 말한다면, 똑같은 시대에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는 대학생의 정치적 저항과 록 커뮤니티의 미학적 반란이 그럭저럭 잘 어울리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어쨌냐고? 20년이 지난 지금도 운동권 대학생들은 록 음악을 여전히 외래문화 정도로 생각하고, 록 음악의 마니아들은 정치라면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면서 캠퍼스 내에서 방황하고 있는 현상이 안타깝다는 이야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pp. 203-206)

.... 이럴 때마다 나는 한국에서는 문화적 세련됨과 정치적 올바름은 영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씁쓸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 어쩌다가 문화적으로 세련된 취향을 가지고 있으면서 급진적 정치사상을 신봉하는 젊은 친구들을 만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럴 때도 '정치적 올바름을 문화적 세련됨의 하나의 장식품 정도로 취급한다'는 의심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다. 사회주의든, 무정부주의든 다른 무엇이든 급진적 사상을 실천하는 삶이 문화적 욕구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었다면, 지금 그걸 기꺼이 수용할 사람이 젊은 세대 중에 얼마나 있을까는 회의적이다. 그래서 가끔은 '펑크 밴드에게 열광하는 것과 <엽기적인 그녀>에게 열광하는 것이 과연 뭐가 다를까'라는 우문을 던지게 된다. 현답은 그들 스스로 내려줄 것이라고 믿는다.... (pp. 273-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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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와 꽃다지
이영미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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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지금.

대학 내내 내가 기타를 가지고 놀던 곳은 학부에 속해있던 노래패의 방이었다. 언젠가 누구에게도 밝힌 적이 있지만,, "민중가요의 가사가 내 머리에 진동을 주었고, 그 끊임없는 주5일 음주제가 장을 흔들어댔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하지만 신기한 그 음악들을 하는 민중가요패라는 집단은 하나의 다이애스포라(diaspora)로 다른 통상적인 동아리와 달리 느껴졌고, 우리의 공연은 우리의 잔치였고, 우리를 대중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장소라고는 축제 때의 공연정도였다. (물론 친구라는 녀석들은 항상 끌려서 오곤했다.)

순진했던 1학년 때는, 김광석의 '나의 노래'라는 노래의 가사처럼 "나의 노래는 나의 힘"이기에 내가 순수한 열망을 가지고 노래를 부르면, 누군가 들어주는 이가, 그리고 노래를 함께 불러줄 이가 더 늘어나리라 생각했었고,

직접 노래패를 끌고 가던 2학년 때에는, 고립된 동아리로서의 노래패의 현실 때문에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고,

4학년이 되자, 민중가요의 '운동성'은 냉소적으로밖에 볼 수 없는 잔재처럼 느껴졌고, 이제는 점차 동아리 방의 추억으로만 민중가요가 남게되었다.

내가 되뇌이던 노래는 어느새 민중가요가 아닌, 예전부터 듣던 락음악으로, 그리고 새로 접하기 시작한 힙합음악으로 변경되기 시작했다.

한동안 왠지 죄 짓는 기분으로 피우던 양담배도 굉장히 우습게 편한 마음으로 피우기 시작했고,

스타일도 점차 진화했다. 그냥 아무 옷에서, 나름의 댄디함을 추구함으로....

그냥 아련한 추억. 그 자체로 끝난 거 아닌가?

문화예술운동가의 절규

이영미의 글은, 90년대에 절규하듯이 쓰여진 글들이다. 절규하면서 쓰는 이에게 그의 과격함을 탓하는 것은 도가 아니다. 그는 끊임없이 대안적인 민중예술을 세우고 싶었고, 그 안에서 사고하려 애썼다.

그 기록들의 모음이 어쩌면 "서태지와 꽃다지"이다.

사실 "서태지와 꽃다지"는 그녀가 택한 제목은 아닐 듯하다. 아마 그녀가 제목을 택했다면 "90년대의 대중문화와 문화실천", 이 정도가 아니였을까? 실제 서태지에 대한 글은 겨우 세토막에 그치고, 꽃다지에 관한 글 또한 한토막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선정적'(?) 제목을 입힌 출판사의 상술 덕에 이런 책이 한동안(최소 6년 동안) 절판되지 않고 살아있었다. (물론 지금은 절판되었다.)
 

자본주의시대의 대중예술 

그녀의 글은 처음 서문부터 '이를 악물고' 쓴 흔적이 강하다. 자신의 고집스러움 덕택에 청산주의를 면할 수 있었다는 다행스럽다는 자조의 말은 이미 시작부터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의를 보인다.

그녀는 왜 대중예술에 주목하는가? 

"그런데 이러한 대중예술이 하층의 대중층이라는 예술 불모지대에서 자기 세력을 장악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고급예술의 아성까지 침식하는 이 현성은, 단순히 우연적이고 일시적이라고 볼 수 없다. 자본주의라는 우리의 물적 토대와 너무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 대중예술의 출현과 팽창은 일시적이거나 우연적인것이 아닌, 역사의 필연적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자본주의 발전과정의 예술적 외현이라는 것이다. ... 새로운 사회, 새로운 예술로의 발전의 싹은, 가장 발전한 사회인 현재의 사회, 현재의 예술로부터 찾기 시작해야 한다."(pp.13-14)

즉 단순한 인식으로 대중문화를 욕하거나 칭찬하기 전에, 그러한 것의 자본주의와의 맥락을 살펴야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대중예술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대중예술은 가장 자본주의적인 예술이다. 대중예술의 궁극적인 생산 결정권이 예술가가 아닌 자본가에게 있으며, 그와 이해를 함께하는 정치적 지배집단의 부당한 간섭 속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예술이므로, 그 속에는 정치적, 경제적 지배이데올로기가 속속들이 배어있다. 그러나 또한 자본주의시대의 하층예술로서의 대중예술은 자본주의사회를 사는 다종의 노동자, 다종의 대중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p.21)

그녀는 '대중조작'이라는 측면으로 대중예술을 바라보는 것을 극복하기 바라면, 그 대안점이라는 것도, 이러한 '대중예술'이 판치는 현재로부터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민족예술운동은 ... 민주적이고 민족적이며 올바른 예술문화 구조를 만듦으로써 우리나라의 문화 예술 구조 전체를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는 곧 자본주의하 대중문화 구조의 재조정이다."(p.85)

따라서 이 책에 나와있다는 글들은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바라본 대중예술과 그 대안문화운동으로서의 '민족예술운동'인 것이다.

2007년에 바라본 "서태지와 꽃다지"

이 책을 읽다보면, 유난히 많이 나오는 말은 "변증법"이다. 맑스와 헤겔의 논리구조에 기대어서 글을 썼던 시대였던 만큼, "변증법"은 그 말없이는 결론을 쓰지 못할 정도로 많이 등장한다. 이러한 표현과 지금의 괴리만큼이나 그녀가 말했던 대안과 지금 문화적 장에서 생성될 수 있는 대안의 거리는 멀다.

이러한 전제에서 시작한 문화운동은 왜 실패했을까? 자본의 공세 때문에? 혹은 거대담론의 실패때문만일까?

물론 이 책은 실제적인 자본주의의 대중문화가 형성되는 것의 사회적 관계와 전반적인 시스템을 다 보아야 한다고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실제적인 비평은 내용비평에 국한 될 때가 많고, 그 내용의 허무성 지적 정도가 저자의 가장 디테일에 충실한 비평이다.

지금 이 책을 읽으면서, 락음악과 힙합음악으로 빠져나갔던 것에 후회했냐고 누가 물어본다면, 난 단연 "아니"라고 대답할 거다.

난 여전히 락음악을 들을 거고, 힙합음악을 들을 거고, 그 정신들에 대해서 모색을 추구할 거다.

왜냐하면, 그녀가 말했던 "민주적이고 민족적이며 올바른 예술문화 구조"에 대해서 도통 감을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민주적인 것에 대해서 감을 잡을 수는 있겠으나, 민족적이며 올바른 예술문화 구조라는 것이 무엇인지 도통 모르겠기 때문이다.

그녀는 절규하며 글을 쓰고 있지만, 마땅히 그가 넘어서고자 했던 '대중예술'은 변화되지 않았으며, 더 최첨단으로 나아가고야 말았다.

어디에서 대중예술의 힘은 추동되었는가?

....
 

물론 이러한 나의 비판이라는 것이 90년대의 시점에서 유효했었는 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유보적인 문제들이 많이 산적해 있다. 모든 글은 그 당대의 '행간'을 살펴봐야하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지금 이 시점에서 대안적인 문화를 사유하기 위한 자양분으로 이 책을 읽게되었으며, 한발 더 나아가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게 된다.

대안적 문화는 어디서 시작될 수 있을까??? 대안적 예술문화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p.s. 이러한 날이 살아있는 민중문예운동가였던 이영미는, 현재 한국의 대중가요사를 썼으며, 지속적으로 대중가요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다. '서태지와 꽃다지'에서 어떤 관점으로 변화하였는지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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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당신에게 - 흔들리는 청춘에게 보내는 강금실의 인생성찰
강금실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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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에게는 어떤 생각의 꼬투리를 잡고 그침 없이 그 바닥에까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여 답을 찾는 습벽이 있는데, 어려움에 부딪히면 그 어려움을 이기려고 하거나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여 답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몰두하는 그 무엇의 긍정적인 힘으로 상황을 극복하여 가는 편이 더 현명한 생활방법인 것 같다. 나에게 인생의 해답이 주어져 있지는 않다.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난관과 파도가 겹쳐올 때 이게 왜 이러나, 이것을 어떻게 하면 이기나 하고 맞서기보다는 가벼이 몸을 날려 흐름을 타면서 시간의 강을 헤엄쳐 나가다 보면, 어느새 거기에서 벗어나 다른 지점에 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pp. 26-27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 겠다." p. 40

"나이 서른인 당신의 과거는 지금 당신의 현재를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이 해서 우리는 하나로 만난다. 나에게 주어졌던 체험의 고통들은 지금 당신이 이 사회의 진입문 앞에서 서성이며 갈등하는 고통들과 만난다. 고통의 모양과 색깔이 다르다 한들 이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도대체 무엇으로 내가 살아 있어야 하는지 하나의 몸체로 만난다. 나는 아무리 나 하나로 있고 싶어도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역사 속에 있고, 아무리 나 하나로 있고 싶어도 앞선 사람과 현재 당신 곁에 있는 사람, 미래에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들과 어우러져 있다."


읽고 쓰고 실천하고 다시금 한발 비껴나 춤을 추는 그녀. 그녀의 삶의 향기가 은은하게 다가오게 하는 책이다.

그녀가 어떤 행적을 했는지에 대해서 평가하는 것보다, 그녀의 리듬을 타는 그 선의 모습에서 나는 한 명의 유목민을 찾게 된다. 싹을 틔우고  유유히 사라지는 유목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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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 훔치기 - 한 저널리스트의 21세기 산책
고종석 지음 / 마음산책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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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자 고종석???

자유주의자라는 '말'은, 우리나라에서 '진보'라는 '말' 만큼, '말많은' '말'이다. 왜 자꾸 '말'이냐고? 그건, 이런 것들이 다 '말'의 '상찬'에서 비롯되는 허상에 가깝기 때문이다. 사실상, 자유주의자에 대해서 합의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자기를 자유주의자라고 하든, 남이 지칭하든, 일치되는 바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고종석도, 기실 그 '말많은' 자유주의자라 칭하는 사람 중에 하나이다.

우리나라에서 자유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을 대충 열거해 보기로 하자.

복거일, 고종석, 공병호, 강준만 등이 자신을 자유주의자라고 지칭한다.

과연 그들을 같은 카테고리 안에 엮을 수 있는가?

그걸 엮을 수 있다고 하는 자와 더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예를 들면, 복거일과 공병호는 어느 수준에서 묶을 수 있을 것이다.

리버러테리언(Liberatarian) 자유 지상주의자 수준에서... 장기를 매매하는 것도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 하이에크를 사랑하는 복거일 수준이라면,

조셈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에 몰두하신 나머지, 창조적으로 한달에 2권의 책과, 2권의 번역을 뱉어내는 분이 공병호다. ( 그 수준에 대해 말하지 않기로 하자. 서로 비참해 질 따름이다. )

하지만 고종석, 강준만과 이 둘을 '자유주의자'라는 카테고리로 과연 묶어 낼 수 있는가?

그러기에는 그들의 '자유주의'는 너무나 좌익적일 따름이다.

게다가 어느날 부터인가, '강준만'은 너무나 강한 사회적 책임이라는 가치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고종석은 더더욱 포지션을 말하기 어려운 사람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일단 자유주의자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가 없다. 어떤 측면에서의 자유주의인가?? 정치적 리버럴인가? 아니면, 경제적 리버럴인가? 아무래도 전자인 듯하다. 로크적 자유주의라기 보다는, 스튜어트 밀 식의 타인에 대한 배려를 포함한, 연대적 개념의 자유주의일 것이다. 하지만 정확한 포지션을 갈피잡기에 그의 행적이나 언행은 이따금 사람을 헷갈리게 만든다.

예를 들면, 어떤 면에서는 굉장한 사회적 가치에 대해서 발언하면서도, 동시에 복거일을 강하게 추천한다는 점이 그럴 것이다.

고종석이 바라본 21세기의 화두 - "코드 훔치기"

이 책은 고종석이 신문에 기고했던 특집기사를 묶어낸 책이다. 마지막 꼭지의 40장 "자유의 한계"의 마리화나 이야기를 제외한다면, 모든 기사는 기고를 묶은 것이고, 또한 기고 뒤에는 거기에 나왔던 인물이나, 개념에 대한 설명들을 친절하게 다시금 설명해 준다.

그냥 간단하게 묶어냈다는 느낌을 지우고, 다시금 더 정리했구나라는 생각을 들게끔 해주는 충실함이다.

사실 이 책을 산 건 2001년이다. 하지만 가지고만 있다가, 조금 읽다가 재미 없어서 놨던 것 같다. 역시 책이라는 건 사고서 뒀다가 묵혔다가 문제의식이 변한 어느 정도 시점에 읽었을 때 또 다른 맛이 있고, 색다른 감으로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고종석은 일관되게 양극단을 피하고자 하는 입장을 전개한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양극단을 피하는 입장이라는 거와 한국사회에서의 중도는, 정치적 중간자적인 말로의 '자유주의자'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의 '자유주의자'라는 말은,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용인되는 '정치적 올바름'에 가까운 말일 테다.

 예를 들면, 사회주의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고종석은,

"사회주의 '체제'의 부활은 이론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불가능하다. 마르크스의 재해석이나 마르크스주의의 '전화(轉化)'와 같은 이론적 덧칠을 통해서 그런 불가능한 과업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존재해본 적 없었던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에 대해 얘기하면서 사회주의 '체제'를 이론적으로 구출하려고 애쓰는 것은 부질없을 뿐만 아니라 부도덕하기까지 하다. ... 살아남는 사회민주주의는 제3의 길이 아니라, 조스팽식 사회주의에 가까울 것이다. 제3의 길은, 그것이 옳든 그르든, 자유주의와의 차이를 거의 잃었으니까."(pp. 22-23)

라고 말을 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정치/경제적 체제에 대한 그의 입장은 사회주의자가 된다. 다만 그의 사회주의 '안'에서 포지션은 중도적 '사회주의'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 대해서 우리는 '경제적 자유주의자'라고 말할 근거는 없는 게 되어버린다. 이러한 관점은 동시에 한국사회에서 '민주노동당 정도'의 입장인 '프랑스식 사회주의자'의 위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거의 모든 주제에 대해서 살펴볼 때마다 나타난다. 각 이슈에 대한 양극단의 입장을 정확하게 살피고 한발씩 뒤로 물러보면서 그 한계를 보이고 있지만, 사실 그가 기계적 중립을 취하는 건 아니다. 그는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의 관점으로 한발 더 나아간 상태에서 중립을 취하는 거다.

진보가 1이고 보수가 4라면, 그는 2.5의 관점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중도'가 아니라, 2의 관점에서 1과 3를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점으로 놓고, 2의 관점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의 관점에서 말이다. 아예 4는 배제하는 것이다.

한국의 '자유주의자'를 믿을 수가 없는 것이, 3.5의 관점에서 1과 4를 싸잡아 욕하면서, 4에 있는 극우파에서 반보밖에 못나가면서도 끝끝내 자신이 '수구'는 아니라고 하는 거라면, 이러한 고종석의 관점은 오히려 균형이 잡혀있다고 말할 수 있다.

동시에 이런 '균형'을 잡아보려는 생각 덕택에,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도그마들을 쉽게 깨어버릴 수 있는 거다. 그는 '진보'에 대해서 손을 들어주는 척하면서도 진보가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있는 '민족주의'등을 쉽게 한발 뒤에서 물러보면서 그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는 거고, 그건 입체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조건에 기인하는 거다.

그러한 균형감각 덕택에 그는 '자유주의자'라 칭하는, 칭함을 당하는 자 중에서 '보석'으로 받아들여지는 거다.

다만, 아직 배움이 짧아 그런줄은 모르나, 고종석이 프래그머티즘에 대해서 논하는 논지는 파악이 좀 어렵다.

"로티에 따르면 미국 사회는 프래그머티즘의 '실험적이고 희망에 찬 심성'을 정치로 만들었다."(p.318)

"중요한 것은 우리들을 더 잘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을 변형시키는 것, 그래서 우리들에게 더 낫게 보이는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p.318)

그의 생각대로라면, 프래그머티즘의 미국의 경향은 지속적인 진보를 담지해야 하나, 아직 그 부분은 장담을 할 수 없는 부분이고, 고전적인 비판들이 아직도 여지없이 드러맞는 미국인데,, 어떻게 '실험적이고 희망에 찬 심성'의 '정치'인지를 도통 이해할 수가 없는거다.

프래그머티즘의 이론적 결함인가, 미국사회가 '프래그머티즘'을 충실히 따르지 않는건가?

그 부분은 따로 논해야 겠지만, 후자가 아니라고 말하기는 굉장히 곤란할 것 같다. 하지만 그 부분은 더 공부해볼 '숙제'로 남겨둔다.

그리고 책의 논의와는 상관없지만, 그의 입장에 대해서도 좀 더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의 복거일에 대한 예찬을 아직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

한바탕 21세기 현안에 대한 브레인 스토밍을 하기에 '정치적으로 올바른' 한권의 책이다.! 지식을 얻기에 나쁘지 않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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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도시
하비 콕스 지음, 구덕관 옮김 / 대한기독교서회 / 199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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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60년대에 나와 한동안 에큐메니컬 신학계를 달구었던 하버드 신학과 교수 하비콕스의 저작.

1998년 신준수라는 녀석이 서울과학고에 진학할 때 읽어야 할 책에 넣어놨길래 나도 같이 아는척좀 하려고 샀는데,,

실상 9년만에 제대로 끝까지 읽었고,, 그 전까지 한 5년여간은.. 현석이형 집에서 (2002-2007) 사실상 유배당해 있었던 이 책..

그의 핵심주장은 간단하다..

성경은 시간적 세계를 통해서 재 조망해보아야하는 것이며,,

니체적 상대주의까지 나아가지는 않지만, 역사적 관점에서

모세의 exodus의 시대의 율법과

예수의 보편적인 케리그마의 선포의 세계관은 다를 수밖에 없고

현재의 세속화된 세계는 성경에서 비추어진 세계관과 다르지 않고

봉건시대 부락단위의 신학에서 우리는 탈피하여야 하며

현대의 시대에 걸맞는 다른 배치의 신학을 우리는 전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이상 관념상의 신앙에 얽매여 예수의 모습을 신화화하고 믿음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우리는 실천적으로 더욱 더 예수처럼 살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진리는 멀지 않다는 것. 그것은 우리의 세계에서 더욱더 실천적으로 세밀하게 나타나야 한다는 것.

예수천국 불신지옥의 구호로 협박하는 것이 아니라,

소외된 이들에게 더욱더 다원주의적인 넓은 가슴으로 다가가야 한다는 것.

어쩜 정통 기독교는 우리안의 배타성에 갖혀있는 것이 아닌가??

40년이 지났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쩌렁쩌렁 울려 우리의

교회에 경계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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