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와 꽃다지
이영미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1995년 12월
평점 :
품절


오래된 지금.

대학 내내 내가 기타를 가지고 놀던 곳은 학부에 속해있던 노래패의 방이었다. 언젠가 누구에게도 밝힌 적이 있지만,, "민중가요의 가사가 내 머리에 진동을 주었고, 그 끊임없는 주5일 음주제가 장을 흔들어댔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하지만 신기한 그 음악들을 하는 민중가요패라는 집단은 하나의 다이애스포라(diaspora)로 다른 통상적인 동아리와 달리 느껴졌고, 우리의 공연은 우리의 잔치였고, 우리를 대중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장소라고는 축제 때의 공연정도였다. (물론 친구라는 녀석들은 항상 끌려서 오곤했다.)

순진했던 1학년 때는, 김광석의 '나의 노래'라는 노래의 가사처럼 "나의 노래는 나의 힘"이기에 내가 순수한 열망을 가지고 노래를 부르면, 누군가 들어주는 이가, 그리고 노래를 함께 불러줄 이가 더 늘어나리라 생각했었고,

직접 노래패를 끌고 가던 2학년 때에는, 고립된 동아리로서의 노래패의 현실 때문에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고,

4학년이 되자, 민중가요의 '운동성'은 냉소적으로밖에 볼 수 없는 잔재처럼 느껴졌고, 이제는 점차 동아리 방의 추억으로만 민중가요가 남게되었다.

내가 되뇌이던 노래는 어느새 민중가요가 아닌, 예전부터 듣던 락음악으로, 그리고 새로 접하기 시작한 힙합음악으로 변경되기 시작했다.

한동안 왠지 죄 짓는 기분으로 피우던 양담배도 굉장히 우습게 편한 마음으로 피우기 시작했고,

스타일도 점차 진화했다. 그냥 아무 옷에서, 나름의 댄디함을 추구함으로....

그냥 아련한 추억. 그 자체로 끝난 거 아닌가?

문화예술운동가의 절규

이영미의 글은, 90년대에 절규하듯이 쓰여진 글들이다. 절규하면서 쓰는 이에게 그의 과격함을 탓하는 것은 도가 아니다. 그는 끊임없이 대안적인 민중예술을 세우고 싶었고, 그 안에서 사고하려 애썼다.

그 기록들의 모음이 어쩌면 "서태지와 꽃다지"이다.

사실 "서태지와 꽃다지"는 그녀가 택한 제목은 아닐 듯하다. 아마 그녀가 제목을 택했다면 "90년대의 대중문화와 문화실천", 이 정도가 아니였을까? 실제 서태지에 대한 글은 겨우 세토막에 그치고, 꽃다지에 관한 글 또한 한토막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선정적'(?) 제목을 입힌 출판사의 상술 덕에 이런 책이 한동안(최소 6년 동안) 절판되지 않고 살아있었다. (물론 지금은 절판되었다.)
 

자본주의시대의 대중예술 

그녀의 글은 처음 서문부터 '이를 악물고' 쓴 흔적이 강하다. 자신의 고집스러움 덕택에 청산주의를 면할 수 있었다는 다행스럽다는 자조의 말은 이미 시작부터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의를 보인다.

그녀는 왜 대중예술에 주목하는가? 

"그런데 이러한 대중예술이 하층의 대중층이라는 예술 불모지대에서 자기 세력을 장악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고급예술의 아성까지 침식하는 이 현성은, 단순히 우연적이고 일시적이라고 볼 수 없다. 자본주의라는 우리의 물적 토대와 너무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 대중예술의 출현과 팽창은 일시적이거나 우연적인것이 아닌, 역사의 필연적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자본주의 발전과정의 예술적 외현이라는 것이다. ... 새로운 사회, 새로운 예술로의 발전의 싹은, 가장 발전한 사회인 현재의 사회, 현재의 예술로부터 찾기 시작해야 한다."(pp.13-14)

즉 단순한 인식으로 대중문화를 욕하거나 칭찬하기 전에, 그러한 것의 자본주의와의 맥락을 살펴야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대중예술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대중예술은 가장 자본주의적인 예술이다. 대중예술의 궁극적인 생산 결정권이 예술가가 아닌 자본가에게 있으며, 그와 이해를 함께하는 정치적 지배집단의 부당한 간섭 속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예술이므로, 그 속에는 정치적, 경제적 지배이데올로기가 속속들이 배어있다. 그러나 또한 자본주의시대의 하층예술로서의 대중예술은 자본주의사회를 사는 다종의 노동자, 다종의 대중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p.21)

그녀는 '대중조작'이라는 측면으로 대중예술을 바라보는 것을 극복하기 바라면, 그 대안점이라는 것도, 이러한 '대중예술'이 판치는 현재로부터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민족예술운동은 ... 민주적이고 민족적이며 올바른 예술문화 구조를 만듦으로써 우리나라의 문화 예술 구조 전체를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는 곧 자본주의하 대중문화 구조의 재조정이다."(p.85)

따라서 이 책에 나와있다는 글들은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바라본 대중예술과 그 대안문화운동으로서의 '민족예술운동'인 것이다.

2007년에 바라본 "서태지와 꽃다지"

이 책을 읽다보면, 유난히 많이 나오는 말은 "변증법"이다. 맑스와 헤겔의 논리구조에 기대어서 글을 썼던 시대였던 만큼, "변증법"은 그 말없이는 결론을 쓰지 못할 정도로 많이 등장한다. 이러한 표현과 지금의 괴리만큼이나 그녀가 말했던 대안과 지금 문화적 장에서 생성될 수 있는 대안의 거리는 멀다.

이러한 전제에서 시작한 문화운동은 왜 실패했을까? 자본의 공세 때문에? 혹은 거대담론의 실패때문만일까?

물론 이 책은 실제적인 자본주의의 대중문화가 형성되는 것의 사회적 관계와 전반적인 시스템을 다 보아야 한다고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실제적인 비평은 내용비평에 국한 될 때가 많고, 그 내용의 허무성 지적 정도가 저자의 가장 디테일에 충실한 비평이다.

지금 이 책을 읽으면서, 락음악과 힙합음악으로 빠져나갔던 것에 후회했냐고 누가 물어본다면, 난 단연 "아니"라고 대답할 거다.

난 여전히 락음악을 들을 거고, 힙합음악을 들을 거고, 그 정신들에 대해서 모색을 추구할 거다.

왜냐하면, 그녀가 말했던 "민주적이고 민족적이며 올바른 예술문화 구조"에 대해서 도통 감을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민주적인 것에 대해서 감을 잡을 수는 있겠으나, 민족적이며 올바른 예술문화 구조라는 것이 무엇인지 도통 모르겠기 때문이다.

그녀는 절규하며 글을 쓰고 있지만, 마땅히 그가 넘어서고자 했던 '대중예술'은 변화되지 않았으며, 더 최첨단으로 나아가고야 말았다.

어디에서 대중예술의 힘은 추동되었는가?

....
 

물론 이러한 나의 비판이라는 것이 90년대의 시점에서 유효했었는 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유보적인 문제들이 많이 산적해 있다. 모든 글은 그 당대의 '행간'을 살펴봐야하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지금 이 시점에서 대안적인 문화를 사유하기 위한 자양분으로 이 책을 읽게되었으며, 한발 더 나아가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게 된다.

대안적 문화는 어디서 시작될 수 있을까??? 대안적 예술문화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p.s. 이러한 날이 살아있는 민중문예운동가였던 이영미는, 현재 한국의 대중가요사를 썼으며, 지속적으로 대중가요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다. '서태지와 꽃다지'에서 어떤 관점으로 변화하였는지가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