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인간 1 - 북극성
조안 스파르 지음, 임미경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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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중앙의 어느 숲 속에 나무인간이 살고 있다.

그 나무인간은 목수나무로, 가구를 만들어서 선물하는 것을 좋아한다. 절대 살아있는 나무로는 가구를 만들지 않는 나무인간, 가만히 생각해보면 정말 웃긴다. 나무가 살아있든 죽어있든 그것은 상관없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살아있는 사람이든 시체든 간에 그것으로 무엇을 만들었다고 생각해보자. 두 경우 모두, 절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지 않는가.

그 나무인간에게는 친구가 있다. 엘리아우라는 노인인데, 그는 나무인간에게 글 읽는 법을 가르쳐준 사람이다. 그는 숲속에서 책방을 운영하는데, 그의 책방에서는 오래되고 절판된 책들도 구할 수가 있다.

엘리아우 곁에는 항상 골렘이라는 덩치 큰 친구가 따라 다닌다. 골렘은 엘리아우가 만든 진흙 인형으로, 피노키오와 재패토 할아버지처럼 골렘과 엘리아우도 그런 사이다.

어느날 이 조용한 숲 속에 불청객이 찾아온다. 알리트바라이의 왕은 나무인간이 엘리아우에게 만들어 준 나무 피아노를 자신에게도 만들어 달라고 한다. 단 숲 속에 있는 가장 오래된 나무인 아틀라스 떡갈나무로 1주일 안에 피아노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숲 속을 불태우겠다고 한다. 절대 살아있는 나무로는 만들지 않는 나무인간, 그러나 온 숲이 불타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여 아틀라스 떡갈나무를 베러 간다. 떡갈나무를 베러 간 그들은 떡갈나무를 지키고 있던 땅도깨비 카카를 만나게 되고, 시간 관념이 없었던 그들에게 불 폭탄이 날아든다. 그들은 왕의 성 꼭대기에 있는 북극성보다 떡갈나무가 더 높아서 왕이 떡갈나무를 없애려 한다는 것을 알고 왕에게 맞서러 떠난다.

왕에게 맞서기 위해 떠난 그들은 감옥에 갇히게 되고 2년 동안 잠을 자게 된다. 잠에서 깨어난 그들은 세상이 재앙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카카는 그의 동족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세상이 재앙으로 바뀌게 된 순간에도 잠을 자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들, 함께 길을 떠난 친구 카카가 죽임을 당할 때도 그냥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그들. 그들은 다시 그들의 보금자리로 돌아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살아간다.


나무인간과 동화 피노키오를 연상시키는 두 친구 덕분에, 게다가 책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림들 덕분에 따뜻한 동화일거라고 기대를 했었다. 하지만 나무로 가구를 만드는 나무인간의 잔인함을 유머러스로 가장하여 숨겨 놓았듯이 절대 따뜻한 동화는 아니다.

이 책에는 넘치는 그림들 속에 폭력을 감추어 두고 있다. 특히 카카가 상대의 성기를 잘라 죽였던 모습이나 자신의 성기를 잘라 털보들에게 할례하려고 하다가 죽는 모습에서는 그 폭력성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게다가 성기는 남성의 폭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리라.


할례는 남성의 성기를 절개하는 의식으로, 일종의 성년식이었다 . 특히 유대교도에서는 엄격하게 행해졌는데, 이것을 어기는 사람은 계약을 깨는 사람이라 간주되어 졌다고 한다. 2년 동안 잠든 사이 성장한 카카는 규칙을 따르기 위해 스스로 할례 의식을 치른다. 그러나 카카는 바로 죽임을 당한다.

이 책에는 규칙을 따르다가 죽임을 당하는 사람이 또 있다. 살아 있는 식물을 들여오는 건 금지라고 주장하던 엔지니어는 나무인간을 태우던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러나 유대 율법을 어기고 사슴고기를 먹은 엘리아우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고 있다.


규칙을 지키면 죽고, 규칙을 어기면 살아남는다는 이야기. 이것은 현실의 반영이자 작가가 하려고 하는 이야기의 역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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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시 - 눈을 감으면 다른 세상이 열린다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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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자 a형의 피를 타고난 나는 "제12회 일본호러 소설 대상 수상작"이라는 문구를 보고 순간 멈칫했다. 한번도 일본호러소설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일본영화가 좀 엽기적이고 공포스러운가. 빨간 표지에 그려진 야릇한 표정의 일러스트를 보자 공포심보다 호기심이 더 충동질하여 결국은 한장 두장 넘기게 되었다.

이 책은 두 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주의 : 스포일러 있음★

 

1. 바람의 도시

 

내게서 방향 감각이라는 것은 도통 찾아볼 수가 없다. 제로에 가까운 방향 감각 덕분에 나는 자주 가던 길에서도 방향을 잃고 헤매기가 일쑤이며, 매일 보던 길도 새로난 길이라고 인식할 정도이다. 그래서 나는 낯선 길 위에 섰을 때 묘한 공포감 같은 것을 품고 있다.

어릴적 주인공은 길을 잃고 헤매다가 낯선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길은 아무나 드나들 수 없고, 아무나 볼 수 없는 길이었다. 나이가 들어 12살이 된 주인공은 호기심으로 친구와 함께 그 길을 찾아 나서게 된다. 그리고 그 길이 인간들이 아닌 다른 세계의 신과 요괴들이 다니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두려운 마음에 빨리 벗어나고자 하였으나, 친구가 요괴들의 세계에서 죽임을 당하게 된다.

친구를 두고 혼자서 인간 세계로 돌아갈 수 없었던 주인공은 한 여행자를 따라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릴 수 있는 사원으로 함께 가게 된다. 하지만 요괴의 세계에서 죽은 사람도 요괴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그곳에서 다시 살아난 사람도 요괴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주인공은 죽은 친구의 영혼을 자유롭게 풀어주고 혼자 인간 세계로 돌아온다.

 

2, 야시

 

어느날 밤 야시가 섰다. 소년과 소녀는 야시를 구경하러 나서지만, 그 야시는 무엇이든 파는 곳이며, 무언가를 사지 않으면 절대 벗어날 수 없는 다른 세계의 야시였다.

어릴적에 소년은 그 야시에서 벗어나기 위해 함께 간 동생을 돈 대신 지불하고 야구를 잘 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는 그릇을 샀다. 집으로 돌아온 소년은 부모님께 동생을 구하러 가자고 말하려다가, 처음부터 동생은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세계가 세팅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소년이 얻은 능력이라는 것은 전보다 야구를 잘하는 것이지 유명한 프로선수처럼 야구를 잘하는 능력은 아니었다.

항상 후회를 하며 살아온 소년은 다시 야시가 서자 동생을 찾으러 야시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이다. 소년은 소녀에게 돈 대신 자신을 지불하고 동생을 사라고 부탁하고, 수중에 돈이 얼마 없었던 소녀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고만다.

인간의 지나친 욕심을 우려하여, 인간들은 평생 3번만 찾아올 수 있다는 야시. 다음 야시가 서면, 소녀는 소년을 찾아 야시를 찾아가게 될까?

 

덮으면서

 

어릴적에 그런 상상을 한 적이 있다.

이 세계는 다양한 차원이 존재하는 곳이어서, 한발짝 발을 옮기면 내가 존재하는 차원의 세계에서 다른 차원의 세계로 이동할 수 있다. 그곳은 시간이 다른 곳일 수도 있고, 장소가 다른 곳일 수도 있으며, 혹은 인간이 아닌 다른 생물체가 사는 곳일 수도 있다.

마치 어릴 적 내 상상을 그대로 옮겨 놓은듯한 이 책을 읽으면서, 공포스러움보다는 친근함을 느끼게 되었다.

 

만약 내가 야시에 발을 들여 놓는다면, 나는 무엇을 주고 무엇을 얻으려 할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얻고 싶은 것은 많지만, 포기하고픈 것은 도통 떠오르지가 않는다. 미우나 고우나 내 것이기에 포기할 수 없는 것인가보다. 나 또한 인간인지라 욕심이 많은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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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텍쥐페리의 전설적인 사랑
알랭 비르콩들레 지음, 호세 마르티네스 프룩투오조 자료협조, 이희정 옮김 / 이미지박스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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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에서는 내가 첫째지만, 일가 친척들이 모이면 내 위로 언니 오빠들이 한 부대씩 모여든다. 덕분에 나는 아주 어릴적부터 책 복이 터져서, 초등학생들이 읽는 한국전래동화 전집이나 세계명작동화는 물론이거니와 고등학생 오빠들이 읽는 위인 전집까지 섭렵하게 되었다.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나서 그렇게 내리 4년을 나는 언니 오빠들이 읽었던 먼지 냄새가 폴폴 나고 누렇게 빛바랜 책들을 읽어야만 했다. 그렇게 물려받은 책들을 모두 읽어버린 초등학교 4학년 겨울방학 때, 나는 처음으로 새 책이라는 것을 선물받게 되었다.

뽀얀 종이에 그려진 알록달록한 그림이 너무 좋아서 수 십번을 읽어버렸던 책, 그래서 내 생애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이 되었던 책, 그 책은 바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였다.

물론 어른이 된 지금도 생각날 때마다 꺼내어 보는 책이다. 다행히 『어린 왕자』는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묘한 매력이 있어 평생 읽어도 질리지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한가지 변하지 않는 건,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난 '어린 왕자'를 꿈꾼다는 사실이다.

 

그토록 사랑하는 장미와 다퉈 여행길에 오른 어린 왕자, 하지만 마음은 항상 장미에게 있었고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든지 장미를 떠올리고 마는 어린 왕자.『어린 왕자』의 저자 생텍쥐페리는 분명 그런 사랑을 하고 있을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린 왕자』 탄생 60주년 기념으로 출간된 『생텍쥐페리의 전설적인 사랑』에서는 그동안 꼭꼭 숨겨 두었던 그와 그의 유일한 장미였던 아내 콘수엘로의 사랑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내가 상상해 왔던 그런 사랑이 아니었다.

책을 읽기 전에는 분명 전설적인 사랑임을 의심치 않았는데, 책을 읽고나자 과연 그들의 사랑을 전설적인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하는 의문부터 시작해서 남녀간의 사랑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근원적인 문제까지 고민하게 되었다.

항상 그리워하지만 곁에 있으면 서로를 못 견뎌하는 그들, 많은 어려움 속에서 시작한 사랑이지만 정작 주변 사람들로부터는 인정 받지 못하는 그들의 곡예와 같은 사랑만이 책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분명 『어린 왕자』속 이야기는 그들의 이야기가 맞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랑은 동화처럼 그리 아름답지 못했다.

 

나는 죽기 위해 떠나는 게 아니야. 고통을 받고, 그렇게 해서 나 자신의 소유물들과 일체감을 느끼기 위해 떠나는 거야. <by 생텍쥐페리, p144>

 

"내가 당신을 기다리며 인생을 보낼 거란 사실을 알아 줘요. 늙고 기억이 모조리 사라진다 해도 당신을 기다릴 거예요." <by 콘수엘로, p164>

 

이 책은 생텍쥐페리와 아내 콘수엘로가 주고 받은 편지들, 그리고 콘수엘로의 자취를 따라 쓴 이야기들을 토대로 펴낸 책들이다.

따라서 자연히 생텍쥐페리보다는 아내 콘수엘로의 감정이 많이 녹아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비행을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콘수엘로의 마음이 느껴져서 안타까웠다. 시댁 식구들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마저 인정해주지 않는 생텍쥐페리와의 사랑을 혼자서 감당해 내고 있는 그녀가 너무나도 안스러워 나라도 그녀 편에 서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시도때도 없이 등장하는 편지와 사진 때문에 글을 읽으면서 깊이 몰입할 수는 없었다. 어찌나 맥을 뚝뚝 끊어버리는지, 나중에는 텍스트만 먼저 읽어버리고 다시 앞 페이지로 돌아와서 사진과 편지를 함께 보아야만 했다. 두서없는 편집이 정말 안타까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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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
엘리자베스 히키 지음, 송은주 옮김 / 예담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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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젬병인 것이 한 두개가 아닐지언대, 그 중에서도 그림이라는 것은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이게 무슨 기법으로 그려진 그림인지, 인상파 화가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그때 뿐이다. 다음에 다시 마주하게 되면 마치 처음 듣는 이야기인냥 그렇게 대하곤 한다. 나의 안목으로는 도저히 구별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그림들 앞에서 언제나 좌절을 맛보곤 한다.

 

그런 나임에도 불구하고 이건 누구의 어떤 그림이라고 큰소리로 말할 수 있는 화가가 있다. 바로 빈센트 반 고흐와 구스타프 클림트이다. 그들의 그림에는 다른 사람들은 절대 흉내낼 수 없는 터치와 언어가 담겨져 있다. 장황한 설명이나 묘사가 없어도 한눈에 고흐의 그림이구나 혹은 클림트의 그림이구나를 말할 수 있는 그런 것이 담겨져 있다.

 

 

<키스>, 1907~1908년

 

이게 어떤 화가의 그림이라는 것은 몰라도 누구나 한번쯤은 본 적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그림 <키스>,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많은 물음표들이 솟구친다.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여자를 품에 안고 있느라 얼굴을 볼 수 없는 남자, 얼핏 구릿빛 피부에 오똑한 코를 가졌다는 것 정도만 짐작할 수 있는 이 남자는 어떤 얼굴을 가지고 있을까? 

벼랑을 등 뒤에 두고 불안하게 발끝으로 지탱하며 무릎을 꿇고 있으면서도 불안한 기색은 커녕 편안하게 눈을 감고 남자 품에 안겨 있는 저 여자는 과연 누구일까?

황금빛의 화려한 의상을 걸치고 있는 두 남녀, 어쩌면 저 여자는 지체 높은 신분의 남자를 상대로 벼랑 끝에 매달린 듯한 사랑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남자의 얼굴은 감추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나도 안 보여주는 것보다는 조금 보여주는 것이 더 궁금증을 유발한다고 하는데, 보면 볼수록 궁금증이 증폭되는 그림이다.

 

세상 모든 여자를 아낌없이 사랑했던 천재 화가, 클림트

으레 화가들 곁에는 많은 여자들과 추문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클림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지만, 그의 곁에는 많은 여성 후원자들과 모델, 연인들이 있었다. 게다가 그녀들과의 사이에서 나온 12명의 사생아들도 있었다.

이 정도되면 클림트는 타고난 바랑둥이라고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의 곁에는 유독 순수한 사랑을 지키며 그가 죽는 순간까지 그의 곁에 있었던 한 여자가 있었다.

에밀리 플뢰게, 구스타프보다 12살 어린 그녀는 클림트에게서 그림 수업을 받으면서 그에 대한 사랑을 키웠다. 그녀의 첫사랑이었던 클림트, 그녀가 마음만 먹었다면 충분의 그의 여자가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단지 그녀는 그와 그를 스쳐지나가는 많은 여자들을 애태우며 지켜볼 뿐이었다.

그녀는 싫었다. 그런 여자들과 같은 부류의 여자로 취급받는 것이 싫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런 여자들처럼 온전히 그의 여자가 되길 원한다면 그녀들처럼 클림트에게 버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클림트가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것처럼 그녀 또한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하지만 그녀는 클림트처럼 많은 남자를 만나면서 욕망을 채우지도 않았다. 그녀는 오직 첫사랑인 클림트만 바라봤을 뿐이다. 다행히 클림트는 죽기 직전에 그녀를 찾았고, 그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도 그녀의 이름이었다. 덕분에 그가 죽은 후 36년 동안 그녀는 클림트와의 기억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우린 어렴풋이 <키스> 속 여자는 에밀리 플뢰게이며, 얼굴을 감추고 있는 남자는 클림트 자신이 아닐까 짐작하며 물음표들을 잠재울 수 있다.

 

이 소설의 화자는 클림트가 아니라 그를 사랑한 에밀리 플뢰게이다. 베르메르를 향한 소녀의 섬세하고 풍부한 감정묘사 때문에 소설로 몰입할 수 있게 해준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진주귀고리 소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그런 강력한 몰입은 없었다. 좀더 섬세하게 에밀리 플뢰게의 감정을 묘사해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반면에 책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있는 클림트의 그림들은 보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그 그림들을 그리게 된 과정이나 뒷 이야기들이 곁들여져 있어서 그것을 읽는 재미도 솔솔했다.

클림트, 그는 바람둥이에다가 자신의 자식조차 나몰라라 했던 냉혹한 남자였을지는 모르지만 여전히 내게는 매력적인 작가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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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하루
마르탱 파주 지음, 이승재 옮김, 정택영 그림 / 문이당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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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하루는 어떤가요? 지루한 하루, 한 템포 늦은 하루, 너무 바쁜 하루...

여기 완벽한 하루를 꿈꾸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잠들고, 다시 그 다음 날 눈을 뜰 때까지 오직 자살만을 생각하는 남자이다.

아침 뉴스 시작 2분 전에 잠이 깬 그는 아스피린 한 알을 먹고, 권총을 자신의 머리에 겨누고 방아쇠를 당긴다. 출근을 하기 위해 면도를 하면서, 성능 좋은 삼중 면도날 면도기로 자신의 대동맥을 베어 버린다. 갑자기 복통이 찾아오면 온갖 종류의 약과 술을 섞어 마신다. 출근길 엘리베이터에서는 쇠줄로 만든 올가미를 천장에 걸고 옆에 있는 두 사람을 버팀목으로 삼아 목을 매단다. 사무실에 도착하면 컴퓨터를 켜고 시한폭탄을 설치한 뒤 타이머를 점심시간 1분 전인 11시 59분으로 맞춰 놓는다. 퇴근을 할 때는 엘리베이터가 아닌 사무실 창문으로 뛰어 내린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잠자리에 들면서 자신의 몸에 기름을 뿌리고 성냥에 불을 붙인다. 그러나 그는 다음날 변함없이 청명한 아침 햇살을 보게 된다.

난 양복 속으로 몸을 들이민다. 전 지구적인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해 나는 매일매일 마치 선물용 포장 상자처럼 넥타이를 두른다. 하지만 아무리 예쁘게 포장을 한들 나라는 선물을 풀러 보는 사람이 없으니 개탄스러운 동시에 이루 말할 수 없이 불만족스럽다. 사람들은 그저 선물 상자만 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다.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필요도 없는 것 같다. 나는 아무개라는 누군가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의 속내를 보여 주기 위해 직접 포장을 개봉하는 그런 유(類)의 누군가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본문, p26~27>

그는 보통 사람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복통을 호소한다. 그의 몸 속에는 길이 6미터 짜리 백상어가 살고 있어, 그의 몸 속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그의 내장 기관들을 갉아 먹고 다닌다. 그러나 이 백상어 또한 그의 자살에는 크나큰 기여를 하지 못한다. 그를 괴롭히기만 할 뿐이다. 그가 몸에 기름을 뿌리고 불을 붙이자 목 속으로 기어 올라와 결국 입 밖으로 뛰쳐 나가고야 만다.

그는 그 대신 완벽한 그를 대신할 배우를 사서 자신인양 연기하며 돌아다니게 하고, 예쁘고 귀여운 아내와 아이들을 고용한다. 동료들과 지적이고 유머러스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 매주 개그맨과 대학 교수에게 자신이 나누어야 할 대화의 원고를 받기도 한다. 그래서 남들 눈에는 그가 아주 지적이고 멋진 남자이며, 문화생활을 즐기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 완벽한 사람으로 비춰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는 6개월전 친구 6명의 합동 영결식을 치루고 공동묘지에 묻었다. 비록 인간으로서는 존재하지만 친구로서는 이미 유령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시신도 없는 친구들의 합동 영결식을 지내고 매일 공동묘지를 찾아간다. 

집으로 돌아온다. 방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온다. 절망과 고독이 내 침대 위에 누워 서로를 얼싸안고 있다. 녀석들은 자제라는 말을 모르는지 밤만 되면 내 곁을 찾아와 수없이 사랑을 나누곤 한다. 난 다만 녀석들의 건강이 걱정될 뿐이다. 맥주를 꺼내려고 냉장고 문을 연다. 텅 비었다. 어제 분명히 장을 봤는데... 순간 등 뒤에서 캔을 따는 소리가 들린다. 뒤를 돌아보니 두려움이 내 마지막 캔 맥주를 염치없이 홀짝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본문, p167>

그로테스크, 이 한 단어보다 이 책을 더 잘 나타내는 말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처음 몇 장을 읽으면서는 기분이 상당히 언짢았다. 나 자신이 정형화된 인간이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로테스크한 이야기는 기발하다기보다는 오히려 거부감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계속 그의 하루를 엿보다 보니 소설 속 그가 참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스물다섯 살에, 나름대로 보수도 많은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 받으며 살고 있는 그가 왜 매일 자살을 꿈꾸어야만 하는걸까? 왜 내일을 걱정해야 하는걸까?

그에겐 그의 고독을 달래줄 가족이나 친구가 없다. 그가 자살을 시도하는 순간 조차도 주위 사람들은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다. 웃는 얼굴로 말을 건네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들은 웃는 얼굴의 가면을 쓰고 있을 뿐이다. 가면 속에 감추어진 그들의 진짜 얼굴은 무표정하고 무관심할 뿐이다. 그는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숨막혀 한다. 그러나 그조차도 그런 생활을 추구하고 있으며, 이미 중독되어 있다. 그는 값비싼 옷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완벽한 남자처럼 행동하며,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려 한다. 만약 그가 자신을 치장하고 있는 모든 것을 벗어 던진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웃고 있는 가면조차 보여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차마 그것을 버리지는 못하고 자살을 시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 나 자신은 한번도 죽음을 꿈꾸어 본 적이 없는지, 남들이 동경하는 완벽한 삶을 살기 위해 얼마나 아둥바둥 살고 있는지를 말이다. 우리의 삶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차마 그것에 맞서지 못하는 마음, 차라리 죽음이 쉬울거라는 자신감. 어쩌면 그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그로테스크하다고 생각했던 그의 독백들이 자꾸 되뇌여 진다.

 내게도 친구가, 진정한 친구, 소꿉친구, 여자 친구들, 학교 친구들이 있었다. 정말 신나는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정을 붙일 수 있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생기는 거리감, 거짓말로 인한 상처, 성인이라 착각하며 갖게 되는 서로 다른 성향, 이기주의적인 태도, 비열하고 무기력한 생활, 자존심 세우기, 매사에 심각하게 대하는 태도, 소리 없이 주고받는 상처, 미소와 무관심으로 치장한 채 행하는 공격 등 우리 마음속에 숨어 있는 온갖 종류의 벌레들 때문에 이제 내 주변에 남아 있는 친구들은 단 한 명도 없다. 하지만 슬픈 일은 아니다. 슬프지 않다는 그 사실이 슬픈 일인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그 자체로는 그다지 슬프지 않다. 나는 시간과 삶의 무게에 견디지 못하는 그런 우정은 좋아하지 않는다. 갑자기 절교를 하거나, 그럴싸한 일로 욕설을 주고받는다거나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우리의 우정은 아무런 소리도 없이 시나브로 자연스럽게 사라져 간다. 우리를 이어 주던 그 연결 고리가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끊어진다 하더라도 그 고리가 너무도 가늘고, 너무도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정의 소멸을 눈치 채지 못한 채 살아간다. 우리 몸의 모세 혈관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게 바로 그 연결 고리이다. 어느 날, 그 연결 고리의 모세 혈관이 모조리 끊어지고 나면 우리는 모두 남남으로 돌아서는 것이다. 모르는 타인처럼 말이다.  가끔은 그렇게 잊혀졌던 친구들이 자동 응답기에 메시지를 남기는 일도 있다. 간만에 동창회나 저녁 식사 모임 같은 "그래, 요즘은 무슨 일 하는 거야? 어떻게 사는 거야?"라는 상투적인 이야기를 주고받는 그런 자리에 나오라는 연락을 한다. 우리는 무조건 무슨 일인가를 하고 있어야 하고, 어떻게 되어 있어야만 하기 때문에 변치 않는 존재로 머물 수가 없다. 가장 좋은 것은 누군가가 되는 것, 그것도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그런 누군가가 되는 것이다. 과거에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우리 자신에 불과했을 뿐이다. <본문, p171~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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