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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8개월 28일 밤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살만 루슈디가 들려주는 현대판 '천일야화'
『2년 8개월 28일 밤』을 날수로 계산하면 1001일 밤이다. 그렇다. 이 소설은 『천일야화(千一夜話)』 (제목의 '천일'을 보통 '1000일'이라고 생각하는데, '1001'이다)를 현대판으로 다시 쓴 것으로, 31세기의 누군가가 21세기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의 판타지 소설이다. 31세기의 그 누군가는 친절하게도 대강의 내용을 이야기 앞부분에 정리해서 들려준다.
이 책은 마족의 위대한 공주였던 어느 여마신, 벼락을 마음대로 부려 번개공주라 불리며 오래전에, 우리가 12세기라고 부르는 시대에 한 인간 남자를 사랑했던 여인에 대한 이야기며, 그녀의 수많은 후손에 대한 이야기이며, 기나긴 세월이 흐른 후 그녀가 이 세상에 돌아와 잠시나마 다시 사랑에 빠졌다 전쟁에 나서는 이야기다. 또한 여러 마족, 남성이든 여성이든, 날아다니든 기어다니든, 선하든 악하든 도덕 따위에는 무관심하든, 아무튼 온갖 마족에 대한 이야기이며, 2년 8개월 28일 밤, 다시 말해서 천 날 밤 하고도 하룻밤에 걸쳐 이어졌던 위기의 시대, 혼란의 시대, 우리가 괴사의 시대라고 부르는 그 시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다, 그 시대가 끝난 후 이미 천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그 시대가 우리 모두를 영원히 변화시켰다. 다만 그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우리의 미래가 말해주리라. 17쪽
먼저 이 이야기를 하려면 11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위대한 철학자 '이븐루시드'는 개방적 사상 때문에 세비야에서 루세나로 귀양살이를 하러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열여섯 살쯤 먹은 소녀 '두니아'를 만나게 된다. 이븐루시드는 그녀를 집안에 들여 가정부 겸 연인으로 삼는다.
어느 나그네가 그 이름을 지어주면서 그리스어로 '세계'를 뜻한다고 설명해줬는데 자기는 그 뜻이 마음에 들었단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번역한 바 있는 이븐루시드는 굳이 토를 달지 않았다. 그 이름은 여러 언어에서 '세계'를 뜻하므로 굳이 학식을 뽐낼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왜 하필 세계를 뜻하는 이름을 골랐지?" 그가 묻자 소녀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내 몸에서 세계가 태어날 테니까, 그리고 내가 낳은 아이들이 세계로 퍼져나갈 테니까." 19쪽
사실 '두니아'는 인간이 아닌 마족의 위대한 공주였지만 마족과 달리 이성을 중시했던 이븐루시드를 사랑하게 됐다. 마족들은 넘치는 성욕을 가졌는데, '두니아' 역시 2년 8개월 28일 동안 세 번이나 수태했고 그때마다 여러 아이를 한꺼번에 낳았다. 이븐루시드는 두니아의 넘치는 성욕을 이야기로 가라앉히기도 했다. 이븐루시드는 2년 8개월 28일만에 사면 복권되어 귀양살이를 끝내고 왕실 주치의 자리로 돌아갔고, 두니아와는 결혼하지 않았으며 자식들에게 자신의 성을 물려주지도 않았다. 그들의 후손들은 귓불 없는 마족의 외모만 물려받게 된다.
호메로스, 발미키, 비야사, 셰에라자드.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간단히 '우리'라고 칭할 뿐이다. '우리'는 자신이 어떤 생물인지 이해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생물이다. 271쪽
그로부터 800년이 지난 21세기의 뉴욕, 무시무시한 폭풍우가 그치자 2년 8개월 28일 동안 괴이한 일이 잇따랐다. (귓불 없는) 정원사 제로니모는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처음에는 제로니모가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미세하게 떠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 높이 부양하게 되었고 전염병처럼 주변 사람들도 공중부양을 하게 된다. '스톰 베이비'라는 아이가 시장실에 버려지게 되는데 이 아이에게는 사람들의 부정부패를 알아차리는 능력이 있었다. 낙뢰를 맞고도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손가락에서 번갯불이 나왔다. 괴사(怪事)가 일상사처럼 일어나던 시대였다. 이것은 모두 대홍수 때 인간계와 마계 사이에 틈이 생기면서 인간계로 나온 흑마족들이 벌인 것들이다.
한편, 위대한 철학자 '이븐루시드'에게는 '가잘리'라는 숙적이 있었는데, 대홍수가 끝난 뒤 가잘리가 흑마신에 의해 깨어난다. 과거에 가잘리는 푸른 병 속에 갇힌 흑마신 주무르드 샤를 풀어주고 3가지 소원권을 획득한다. 그는 당장 소원을 비는 대신 자신이 "언제든 어떤 달이 뜨는 밤이든" 원하는 때로 소원을 유예하는데, 그 덕분에 죽은 후에도 소원을 빌 수 있게 되었다. 가잘리가 원한 것은 여느 인간들처럼 "막대한 재산, 더 큰 성기, 무한권력"이 아니라 인간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심어주는 것.
"두려움만이 죄 많은 인간을 하느님께 이끌어줄 수 있소. 두려움은 하느님의 일부분이오. 절대자의 무한한 권능과 인과응보 앞에서 나약한 피조물 인간에게 어울리는 반응이라는 의미에서 말이오. 두려움은 곧 하느님의 메아리라고 말할 수도 있겟소. 그 메아리를 들을 때마다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자비를 애원하지. 지상의 일부 지역에서는 이미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있소. 그런 곳은 굳이 건드리지 마시오. 인간의 교만이 팽배한 곳, 인간이 스스로를 신처럼 여기는 곳, 그런 곳을 찾아가 무기고와 환락가를, 그리고 기술과 지식과 재산을 떠받드는 신전을 때려부수시오. 하느님은 곧 사랑이라고 부르짖는 감상적인 지역도 찾아가시오. 가서 진실을 보여주시오." 190쪽
그랬다. 가잘리는 흑마신을 이용해 "인간이 신앙을 버리고 이성을 선택"할 것이라고 주장한 이븐루시드에게 맞서고 싶었던 것이다. 이에 두니아도 마계의 규칙을 어기고 죽은 이븐루시드를 깨워낸다.
두니아의 바람대로 귓불 없는 두니아의 후손들이 세계 곳곳에서 살고 있었고, 두니아는 후손들이 마족의 능력을 깨우칠 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는 두니아가 사랑하는 인간계가 쾌락과 비이성으로 난무하지 않도록, 후손들과 함께 흑마족들에 맞선다.
환상적인 이야기는 곧 현실을 이야기하는 다른 방법!
역사와 신화를 넘어서 마족과 마계라니. 이미 앙투안 갈랑의 『천일야화』도 읽어보았지만, 거기에 환상적인 요소가 더 더해진 것 같아서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도대체 살만 루슈디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친절하게도 살만 루슈디는 31세기의 누군가를 통해 힌트를 주고 있다.
이것은 우리 인류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인데, 까마득한 옛날의 이야기라서 때로는 이것이 역사인지 신화인지를 놓고 논쟁이 벌어진다. 어떤 이들은 지어낸 이야기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누구나 동의하는데,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곧 현재에 대한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환상적인 이야기, 상상을 다룬 이야기는 곧 현실을 이야기하는 다른 방법이기도 하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야기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할 텐데,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무의미한 일을 가급적 피하려고 노력하기 마련이다. 304쪽
살만 루슈디는 현실의 어떤 이야기를 담아내고 싶었던 것일까? '위대한 철학자' 이븐루시드는 과학과 이성을 중시한 그의 사상 때문에 고향에서 내쳐지고, 더이상 그의 철학을 설파하거나 저술하는 일도 금지되고, 그가 쓴 모든 책이 소각되었다. 살만 루슈디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악마의 시』라는 책 때문에 그의 목에는 현상금이 내걸렸고, 처형 당할 위험에 빠졌다. 루슈디는 그로부터 10년 가까이 영국의 보호 아래 숨어 살았고, 인도에서는 그의 책이 금서로 지정됐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몸소 체험했던 이야기, 현실에서는 직접적으로 할 수 없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분노는 제아무리 정당하더라도 결국 분노한 자를 망가뜨리기 마련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것으로 인해 새로 태어나듯이 증오하는 것으로 인해 몰락하고 파멸하다. 402쪽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