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대 감기 소설, 향
윤이형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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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밖에서도 연대의 힘을 보여준 윤이형 작가

2020년 1월, 윤이형 작가는 『붕대 감기』를 마지막으로 남기고 절필을 선언했다. 2020년 '이상문학상'의 우수상 수상자로 선정된 김금희 작가가 불공정한 저작권 계약으로 수상을 거부했고, 최은영, 이기호 작가도 연대 의사를 밝히며 수상을 거부했다. 이에 2019년 수상자인 윤이형 작가도 "상에 대해 항의할 방법이 활동을 영구히 그만두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며 절필을 선언한 것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외치는 연대들

'진경'과 '세연'은 고등학교 교련 시간에 '붕대 감기'의 짝꿍이 된 이후로 사십 대가 된 지금까지 친구로 지내고 있다. 그러나 그저 소식을 끊지 않고 지낼 뿐 서로의 내밀한 이야기까지 나누는 그런 친구 사이는 아니다. 그들은 SNS로 이어져 있었고, 댓글을 달아주거나 좋아요를 눌러주는 사이로만 지냈다. 전업주부인 '진경'과 비혼을 선택한 '세연'이 시시콜콜하게 공유하고 공감할 공통의 주제가 없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십 대 중산층 여성(처럼 보이는) 진경은, 페미니스트 편집자이자 작가인 친구 세연에게 끊임없는 가치판단의 대상이 된다."(153쪽) "친구가 친구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비혼 여성이 기혼 여성을 평가하고 있다."(53쪽)

세연이 갑자기 계정을 닫았다. 몇 주 후 다시 계정을 연 세여은 더 이상 일상 포스팅을 하지 않았다 공유하는 글들의 성격이 달라졌고, 자주 댓글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달라지더니, 쓰는 글들의 결도 달라졌다.

(…) 자신이 실제로 했고 앞으로 분명히 할 일들에 대해서만 짧게 또박또박 적어 올리는 세연을 보면 진경은 자신도 모르게 '미스트'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칙칙 소리가 나게 미스트를 뿌려주고 싶었다.

진경은 여전히 세연을 좋아했고 존경할 만한 친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지만 세연아, 너의 물기들은 어디로 갔어? 바람이 조금 빠진 자전거 타이어처럼 눌러보는 사람이면 누구나 피식피식 웃을 수밖에 없던 너의 여유는, 농담들은, 꿈꾸는 듯한 문장들은 어디로 간 거야? 그건 너와 내가 공유하던 빛나는 보물이었는데. 왜 이렇게 지상의 삶에 밀착되어 자갈과 흙과 모래 들만 바라보는 사람이 된 거야? 그 돌들끼리 부딪칠 때면 이를 가는 것처럼 진절머리가 나는 소리가 나던데, 어떻게 그것들을 쉬지도 않고 다 듣고 있는 거야? 진경은 그렇게 묻고 싶었다. 세연은 결코 들을 일도 대답할 일도 없겠지만. 49~51쪽

세연은 진경의 포스팅에 댓글을 달 수 없었다. 계속 자신의 머릿속에서 울려대는 그 말들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그게 자신의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서, 끊임없이 그 말들을 늘어놓는 주체가 다름 아닌 자신의 공포라는 것을 알아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117쪽

한편, 전업주부인 '진경'과 영화사에서 마케터로 일하고 있는 워킹맘 '은정'도 대조적이다. 8개월 전 은정의 아들 '서균'이 갑자기 쓰러져 의식불명이 된 이후 그녀는 일을 그만두고 아이의 간병만 하고 있다. 지금 은정에게는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하지만, 그녀 곁에는 아무도 없다. 그동안 일 때문에 아이 엄마들 모임에도 나가지 않았고, 일과 관련된 일 외의 다른 일들은 소모적이라며 아예 끊고 살았기 때문이다. 가끔씩 놀이터에서 아이 엄마들을 만나더라도 살가운 대화 한번 한 적이 없었다. 은정의 손에는 언제나 책이 들려 있었고, 미용실을 갈 때도 마찬가지였으며, 그런 은정에게 말을 거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우정이라는 적금을 필요할 때 찾아 쓰려면 평소에 조금씩이라도 적립을 해뒀어야 했다. 19쪽

8개월 만에 미용실을 찾은 은정을 진경의 딸 '율아'가 발견한다. 율아는 서균의 안부를 묻고싶어 하지만, 진경은 조심스러워한다. 아픈 아이의 안부를 묻는게 조심스럽기도 할테지만, 평소 은정의 성격을 알고 있다면 더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 왜 조심스러워야 돼?

율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만약 엄마가 많이 아파서 누워 있다면 율아는 누구든 엄마가 다 나았느냐고 물어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아무도 물어주지 않는다면 자신은 어린이집에 다니지도, 밥을 먹지도 못할 것 같았다. 먹더라도 다 토해버릴 것 같았다. 엄마는 서균이 엄마를 싫어하는 게 분명했다. 아니, 서균이를 싫어하는건가. 42쪽

'……아이는 아직 모른다. 달착지근한 마카롱 몇 개나 갑작스럽게 건네는 다정한 인사 같은 것으로는 괜찮아지지 않는 일들이 세상에 아주 많다는 것을. 누군가의 안부를 묻는 일이 점점 더 겁나는 모험처럼 느껴진다. 결과가 안 좋을 때가 더 많기 때문에. 그러나 나는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고, 그 마음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은 굳이 물어보았다. 나 역시 누군가가 그렇게 물어주기를, 종종 장미가 비를 기다리듯이 기다리게 되므로.' 46쪽

은정은 해미의 미용실을 다녔다. 패션지 대신 늘 자신이 가지고 온 책을 읽었던 손님, 올 때가 됐는데 오지 않는다. 은정이 마지막으로 왔을 때 해미가 선물한 책 한 권 때문일까? 그 책은 할레드 호세이니의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었고, 해미의 '인생 소설'이기도 했다.

마침 은정이 몸이 아파 출근을 못했을 때 은정이 다녀갔다고 한다. 해미 대신 지현이 은정의 머리를 커트했고, 아이가 아파서 최근까지 못 읽다가 이제야 읽기 시작했다고 해미에게 전해달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서 은정이 서균을 데리고 마지막으로 미용실을 방문했을 때, 소란 피우는 아이를 방치한 은정을 비난하는 트윗 글을 올렸다는 것이다. 나중에 아이의 소식을 들은 지현은 죄책감에 사로잡혔고, 친구 미진의 이야기를 꺼냈다. 미진은 불법촬영 피해자였는데, "친구가 감당하고 있는 정신적 무게를 같이 짊어지기가 버거워서 손을 놓아버렸다."(28쪽)고 했다. 지현은 그 죄책감을 덜어버리기 위해 집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탈코르셋 운동'이 시작된 뒤로 지현은 내적 갈등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직업으로 하고 있는 '미용사'라는 직업이 그런 운동과 반대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지현에게 해미는 그저 기도를 하자고 한다. 자신들의 일에 집중할 수 있게 걱정을 덜어달라고.

이 외에도 『붕대 감기』를 채우고 있는 인물들이 많다. 이혼 후 고향에서 소소하게 사진을 찍고 있는 사진작가 윤슬, 그녀는 가끔씩 서울에 들러 진경과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당돌하게 교수인 경혜에게 친구하자고 먼저 손을 건넨 채이는, 경혜의 동료교수에게 성추행을 당한다. 채이의 후배 형은은 채이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하는데, 마침 엄마의 직장 후배인 효령에게 연락이 온다. 엄마가 큰 병이라도 났을까봐 걱정했던 형은에게 엄마 명옥과 효령은 노후를 함께 하겠다고 한다. 아직은 그런 법이 없지만 '생활동반자법'이 생기면 재산이랑상속 관계도 좀 더 정확하게 정리할 수 있을거라고 하면서.

그녀들은 때론 대립을 하고, 또때론 연대를 하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페미니즘들'을 외치고 있다. 그녀들의 연대 혹은 대립을 심진경 문화평론가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이야말로 어쩌면 '진정한 페미니즘'이라는 강박에서 벗어나 '소문자 페미니즘들'을 만드는 일이며, 그럴 때라야 비로소 여성 연대는 가능할 것이다. 이때 여성연대란 단수적이기보다는 복수적이고, 통합적이기보다는 해체적이고, 무질서하고 개방적인, 그래서 非연대처럼 보이는 어떤 것이 될지도 모른다. 윤이형의 『붕대 감기』가 여성들끼리의 화해와 연합이 아닌, 서로 간의 다름을 인정하는 데서 끝나는 것은 이런 인식과 맥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진짜 페니미즘'을 넘어서:윤이형의 『붕대 감기』가 페미니즘'들'에 대해 말하는 방법」 1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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