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옷의 세계 - 조금 다른 시선, 조금 다른 생활
김소연 지음 / 마음산책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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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시옷들을 시인의 상상력으로 시어로 직조해내다!

   글자에도 취향 같은게 있을 수 있다면, 나는 'ㅅ'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ㅇ'이나 'ㅎ'처럼 둥근 면이 없는 'ㅅ'은 시릴 정도로 날카롭고 차가워 보입니다. 게다가 두 개의 선이 서로 맞대고 있는 모습이 상당히 불안해 보입니다. 쓰는 사람의 필체에 따라 정대칭을 이루기도 하고, 한 선이 더 꼿꼿하게 서면 나머지 한 선은 훨씬 더 불안정하게 기대는 꼴이 되기도 합니다. 서로에게 등을 기대고 있는 사람의 형상(人)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무튼 마음에 들지 않는 'ㅅ' 입니다. 그래서 한동안은 이름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닉네임에 들어가 있는 'ㅅ'을 치환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애쓴 적도 있습니다.


   시인 장석주가 『불면의 등불이 너를 인도한다』에서 "시와 산문을 두루 잘 쓰는 시인"(p.377)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김소연은 산문집 『시옷의 세계』를 통해 'ㅅ'으로 시작하는 사소한 낱맡들을 시인 특유의 상상력과 감정들을 담아 또 하나의 '시어'로 직조해 냅니다. 「사라짐」, 「사소한 신비」, 「산책」, 「상상력」, 「새하얀 사람」, 「생일」, 「세 번째 상하이」, 「세월의 선의들」처럼 독자들에게는 사소하고 무의미한 낱맡들이 시인의 감성을 덧입고 적당한 "밀도와 온도와 습도"(p.214)를 머금은 시어들로 탄생합니다.


   밀도와 온도와 습도. 책을 읽을 때면 으레 이 세 가지를 기준으로 문장을 측정하는 버릇이 있었다. 밀도 높은 문장을 가장 좋아했고, 습도가 낮은 건조한 문장을 신뢰했고, 온도가 지나치게 높거나 지나치게 낮은 문장에서 풍기는 과잉을 부러워했다. 하고 싶은 말이 차고 넘칠 때, 그것을 집약하려는 집중력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문장의 높은 밀도는 글쓴이의 경지를 실감할 수 있어 좋았다.

   따뜻한 문장을 가장 꺼려했다. 따뜻한 문장은 삶을 달관한 듯한 깨달음과 위로로 포장되어 있기가 십상이다. 위선에 가깝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삶과 손쉽게 화해해버렸다는 의미에서 패배자의 모습과 비슷한 뒷맛이 남는다. (p.214)


   또한, 김소연은 『시옷의 세계』를 통해 「시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소회를 풀어놓기도 합니다. 이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시인은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자신의 재주에 더 의지해서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경험과 취재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내는 소설가들과는 달리 시인이 시어를 선택하고 그것을 풀어내는 것은 좀 더 직관적이고 천부적인 영역의 일이 아닐까요? 마찬가지로 소설가는 타고난 재능이 부족하더라도 노력한다면 될 수는 있지만, 시인은 그렇게 되기에 어려운게 아닐까요?

   하지만 『시옷의 세계』는 시인도 타고나는 것이 아닌 노력의 결과로 이뤄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김소연은 문장 하나를 써내기 위해 단어를 골라내는 일부터 신중하게 고민합니다.


   단어를 고르는 일에 능력이 있다면 나는 하루에 시를 열 편쯤은 쓸 수 있을 것만 같다. 문장은 도착해 있는데 내가 아는 단어들은 낡아, 나는 늘 새로운 단어에 갈급하다. 새롭되 전혀 새롭다는 느낌은 없이, 낡고 익숙한 느낌은 결코 아닌 채로, 문장 속에 슬그머니 스밀 수 있는 단어 하나를 찾는 데에 매일매일을 다 써버린다. 온 동네를 거닐고 커다란 사전을 꺼내고 인터넷을 뒤지고 낯선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 그 밖의 일들엔 아무 관심도 없다. 내게 단어를 선물해준 것이 기뻐 꽃씨를 심었고, 값진 단어 하나를 주워듣기 위해서 친구를 만났다. (p.252)


   시인을 두고 타고나야 가능한 것이라고 말하는 나같은 사람이 있는 것처럼, 시인을 엉뚱한 몽상가나 언어의 연금술사로 부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를 포함해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김소연은 말합니다. 시인의 상상력이란, 정확하고 과학적인 증표와 징표를 통해 징후를 밝혀내는 논리적 과정을 거치는 것이므로 '풍부하다'가 아닌 '정확하다'는 표현이 더 옳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김소연이 말한 '과학적인 증표와 징표'는 사소한 것도 지나치지 않는 '관찰력'의 다른 말이 아닐까요?


   시인의 상상력이란, 정확하고 과학적인 증표와 징표를 통해 징후를 밝혀내는 논리적 과정이다. 그러니까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표현은 틀린 표현이다. 상상력이 정확하다라는 표현이 오히려 더 옳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사이에 숨겨진 공간들, 그 경계의 영역들, 그 이상한 미지의 세계에 대해 느끼는 우리의 모호함을 시인은 상상력의 힘으로 정확하게 호명해낸다. (p.45~46) 


   우연찮게도 최근에 시인들이 쓴 산문집들을 연이어 읽었습니다. 자기 이야기에만 빠져있어 공감은 커녕 흥미를 잃게 만드는 대부분의 산문집들과는 달리, 그들의 문장 속에서는 그저 술술 읽어 내려갈 수만은 없는 밀도감이 느껴집니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시인 특유의 상상력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가 무심코 지나친 사소한 것들을 관찰하고 정확하게 문장으로 표현해 주니 어찌 공감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비록 우리가 놓치긴 했지만, 그것들 또한 우리 주변의 이야기들이니까요.


   시인이 가난한 것은 한 사회 안에 시인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시인이 너무 많은 것은 세상이 너무 병들었고 제도가 너무 지긋지긋하게 갑갑하기 때문이다. 병든 세상과 낡고 딱딱한 제도에 대한 불만은 창작 행위로 이어질 때에 창조적인 에너지가 된다. 가장 저비용으로, 게다가 아무 기술을 배우지 않고 모국어만 구사할 줄 알면 가능한 높은 접근성으로 인해, 게다가 혼자서 가능한 작당이라는 창작 방식으로 인해, 세상엔 시인이 이토록 많다. 그러나 시인이 가난한 것은 가난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잘 살고자 하는 욕망이지만, 다른 방식의 잘 살고자 하는 욕망이라서 시인은 가난할 수밖에 없다. 시의 욕망이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시인일수록 좋은 시를 쓸 확률이 높다. 윤택한 아파트에서 쓰인 시, 그림 같은 전원주택에서 쓰인 시에는 생명이 깃들어 있지 않다. 옥탑방 아니면 반지하, 도시의 변두리, 시골의 허름하고 불편한, 좁고 누추한 공간에서 쓰인 시에 오히려 생명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 시인은 명성을 쌓을수록, 나이가 들어 안정될수록 점점 나태해진다. (p.208~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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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마르셀 에메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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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시간은 결코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말을 합니다. 시간은 돈으로도 살 수 없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주어진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시간을 돈으로 살 수 있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면요?

   마르셀 에메의 소설집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에 수록되어 있는 「생존 시간 카드 : 쥘 플레그몽의 일기에서 발췌」라는 단편을 통해 그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정부는 식량과 생필품 부족에 대처하고 노동계급의 수익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p.39) 유용성이 떨어지는 사람들의 생존 시간을 제한하는 법령을 발표합니다. 유용성이 떨어지는, 다시 말해 쓸모없는 사람들은 한 달을 다 사는 게 아니라 그 무용성의 정도에 따라 일수를 정해놓고 다달이 그 일수만큼만 살도록(p.40) 제한하는 법령으로 당장 다음달인 3월부터 시행한다고 합니다. 그 쓸모없는 사람들의 범주에는 노인, 퇴직자, 실업자, 창녀, 부녀자 등이 포함되는데 쥘 플레그몽은 예술가와 함께 작가까지 포함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경악합니다.


   쓸모없는 사람들, 곧 '부양을 받고 있을 뿐 그것의 실질적인 대가를 전혀 치르지 않는 소비자들'의 무리에 놀랍게도 예술가와 작가가 포함된다고 하지 않는가!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화가나 조각가나 음악가에게 그 조치가 적용되는 것은 이해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작가에게마저 그것이 적용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이것은 분명 자가당착과 양식에서 벗어난 판단 착오가 빚어낸 일이었다. 이는 우리 시대의 다시없는 수치로 남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작가의 유용성이란 증명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특히 나 같은 작가의 유용성은 아주 겸손하게 말해서 증명하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나에게는 한 달에 겨우 보름간의 생존만 허용되리라고 한다. (p.41~42)


   한 달에 겨우 15일만 살게 된 쥘 플레그몽은 예전보다 훨씬 더 열심히 삽니다. 일기 쓸 시간을 못 낼 정도로 삶은 분주해지고, 이토록 짧은 삶에서 무엇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밤잠도 잊을 지경입니다. 작가인 그는 글을 쓰는 것도 더 열심히 합니다. 예전에는 석 주나 걸려서 쓴 것을 최근에는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원고를 나흘만에 쓰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문체나 사유의 깊이가 가벼워진 것도 아닙니다.

   이런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난 그와는 달리, 일상이 엉망이 되어버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젊은 부인과 사는 노인 로캉통은 걱정이 많습니다. 자신은 겨우 6일만 살 수 있는데 젊은 아내는 15일이나 살게 된 것입니다. 이제 겨우 24살인 젊은 아내를 혼자 두고 잠든다는게 영 개운치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생존 시간의 마지막 날 사람들을 초대해 함께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함께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면 못 볼 꼴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잠자리에 같이 누워 있었다. 자정 일 분 전에 로캉통은 아내의 손을 잡고 마지막으로 일러둘 말을 하고 있었다. 자정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그녀는 남편의 손이 자기 손에서 녹아 없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 곁에 남아 있는 것이라곤 텅 빈 파자마와 긴 베개 위에 놓인 틀니뿐이었다. (p.48)


   간밤에 다시 삶으로 돌아왔을 때 소스라치게 놀랐다. 지난달 16일에 나는 서 있는 상태에서 상대적인 죽음(요즘에는 일시적인 죽음 대신에 이 말이 유행하고 있다)을 맞았고 융단 위에 뭉그러졌다. 그랬다가 다시 깨어나 보니 나는 완전히 벌거숭이가 되어 있었다. 화가 롱도는 상대적인 죽음을 맞을 남녀 열 사람을 자기 집에 불러모았는데, 그 집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졋다. 그 꼴이 정말 가관이었을 것이다. (p.57)


   법령이 시행되고 한달쯤 지난 4월에 한 남자가 쥘 플레그몽을 찾아옵니다. 자신은 아내와 세 자녀를 거느린 병약한 노동자인데 자기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자기의 생존 시간 배급표 중 일부를 팔고 싶다고 합니다. 몸이 허약해져서 힘든 노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회적으로 쓸모없는 사람이기는 해도 양심은 있었던 쥘 플레그몽은 그 남자에게 배급표를 사는 대신 약간의 돈을 주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자존심이 있었던 그 남자는 대가 없이는 돈을 안 받겠다며 배급표 한 장을 쥘에게 쥐어주고 떠납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부유한 사람들이 생존 제한에 많이 걸린 탓에 이런 식으로 생존 시간 배급표를 사고 파는 암시장이 본격적으로 형성됩니다. 가난한 노동자들은 자신의 생존 시간 배급표를 팔아 가족의 부족한 생계 수단을 보충하고, 부유한 사람들은 그 덕분에 더 많은 시간들을 살게 됩니다. 배급표를 많이 얻게 된 사람들은, 급기야 한 달 30일을 사는 것이 아닌 35일, 45일, 60일까지 살게 됩니다. 엄청난 부자 한 명은 6월 30일에서 7월 1일 사이에 무려 1967일을 더 살기도 합니다.


   완전 생존 자격 보유자들은 시간의 흐름에 이상이 생겼음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6월이 길어진 것에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드은 나처럼 불법적으로 이 연장된 시간을 살고 있는 자들뿐이다. (p.68)


   처음에는 이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정부 관계자들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증언이 기사로 보도되자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법령을 시행한지 4개월만인 7월에 생존 시간 카드를 폐지하는 법령을 다시 공포합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일방적인 정책들은 시대를 초월하고 늘 이런 모양입니다. 그 법령이 시행됐을 때 초래될 부작용들은 생각하지 못하고 우선 법령만 통과시키면 그만인거죠.

   여기서 잠깐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이 법령을 만든 사람들도 돈이 엄청나게 많아서 부유한 사람들처럼 생존 시간 배급표를 무한정 살 수 있었다면, 그래서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은 날들을 살 수 있었더라면 이렇게 쉽게 법령이 폐지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마르셀 에메의 소설보다 더 나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당신에게!

   아주 오래 전에 이 단편소설을 처음 읽었는데, 표제작인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보다 훨씬 강한 인상을 줬습니다. 시간은 돈으로 살 수도 없고,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주어진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절대적인 시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닐까요? 하루 24시간이라는 절대적인 시간을 돈만 있으면 상대적으로 더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KTX 비용도 비싸다고 느린 무궁화 기차를 타고 5시간 40분동안 꾸역꾸역 갈 수도 있고, 부유한 사람들은 전용 헬기를 타고 단숨에 날아갈 수도 있습니다. 절대적인 시간은 결코 늘어나지 않지만, 부유한 사람들은 시간을 절약해 줄 수 있는 도구들을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유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설가 김영하는 산문집 『보다』를 통해 스마트폰에 집착하는 현대인들은 마르셀 에메의 소설보다 더 나쁜 방향으로 시간을 부유한 자들에게 헌납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당신에게 주어진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는 온전히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당신은 오늘 어떤 하루를 보내셨나요?


   스티브 잡스는 마르셀 에메의 소설을 더 나쁜 방향으로 실현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가난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자기 시간을 헌납하면서 돈까지 낸다. 비싼 스마트폰 값과 사용료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반면 부자들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제공한 시간과 돈을 거둬들인다. 어떻게? 애플과 삼성 같은 글로벌 IT기업의 주식을 사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의 부자가 한국의 가난한 젊은이에게 직접 시간 쿠폰을 살 필요는 없다. 그들은 클릭 한 번으로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시간을 헐값으로 사들일 수 있다. (『보다』,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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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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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피로,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피로!

   우리는 피곤합니다. 오랜만에 맞이한 달콤한 연휴에도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피곤한 걸까요? 재독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Müdigkeitsgesellschaft)』를 통해 우리가 이토록 피곤한 이유는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이토록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Leistungsgesellschaft)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푸코가 주장한 규율사회에서의 주민은 "복종적 주체"이지만, 성과사회에서의 주민은 "성과주체"입니다. 게다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이기도 합니다. 규율사회에서는 그저 해서는 안된다고 금지된 것을 잘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반면에 성과사회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미 경험하고 있듯이 이 사회는 무조건적인 "예스 위 캔"이 미덕으로 꼽히는 곳입니다.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믿는 사회, 즉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p.28)에서 더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발견하게 될 때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p.28)를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파괴적 자책과 자학으로 이어지면 우울증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을 반영(p.28)합니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속 사람들은 항상 행복합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신체와 지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할 수 없는 일들로 인해 생기는 피로와 우울증에 시달릴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스 위 캔"이라는 구호 아래 더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발견하기 전까지 끊임없이 스스로를 착취하며 오버 페이스 합니다. 결국 성과사회에서의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이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우리는 이 착취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덜 피곤하게 하고, 덜 우울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일까요? 한병철은 발터 벤야민과 니체의 주장을 빌려 사색적 삶의 부활(p.48)을 그 해결책으로 제시합니다. 인간은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야(p.48) 합니다. 그는 또한, 니체가 말한 "중단하는 본능"이 없다면 행동은 안절부절못하는 과잉활동적 반응과 해소 작용으로 흩어져버릴 것(p.49)이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우리는 이런 활동과잉의 흐름 속에서 분노하는 법까지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분노와 짜증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확산되어 가고 있습니다. 분노는 현재 속에서 중단하며 잠시 멈춰 서서 현재에 대해 총체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인데, 사람들은 그저 짜증만 낼 뿐입니다. 예를들면 이런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자신이 이토록 바쁜 이유가 불합리한 업무 프로세스 때문이라며 불만을 터트리면서도 그 프로세스를 바꿀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바쁘니까 당장 눈앞에 닥친 일을 처리하기에 급급할 뿐이죠.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듯이, 여기서 우리는 일손을 잠시 멈추고 이 불합리한 프로세스를 어떻게하면 바로잡을 수 있을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분노는 현재에 대해 총체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분노의 전제는 현재 속에서 중단하며 잠시 멈춰 선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분노는 짜증Ärger과 구별된다. 오늘의 사회를 특징짓는 전반적인 산만함은 강렬하고 정력적인 분노가 일어날 여지를 없애버렸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오늘날은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점점 더 확산되어간다. 사람들은 불가피한 일에 대해서도 짜증을 내곤 한다. 짜증과 분노의 관계는 공포와 불안의 관계와 유사하다. 공포가 특정한 대상에 관한 것이라면 불안은 존재 자체의 문제이다. 불안은 현존재 전체를 붙들고 흔들어댄다. 분노 역시 하나하나의 사태에 관한 것이 아니다. 분노는 전체를 부정한다. (p.50~51)

   "피로"는 자기 착취의 결과로 나타나는 산물인 동시에 스스로 잠시 멈출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독일 작가 한트케는 피로가 새로운 정신이 태어날 수 있도록 영감을 준다고 합니다. 피로하기 때문에 모든 감각이 지쳐 빠져 있는 그런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피로 속에서 특별한 시각이 깨어난다(p.69)고 합니다. 그래서 한트케는 이를 두고 "눈 밝은 피로"라고 말합니다.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원래 그만둔다는 것을 뜻하는 안식일도 모든 목적 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날,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날이다. 그것은 막간의 시간Zwischenzeit이다. 신은 창조를 마친 뒤 일곱째 날을 신성한 날로 선포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위의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그날은 피로의 날이다. 막간의 시간은 일이 없는 시간, 놀이의 시간으로서 본질적으로 염려와 노동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하이데거의 시간과도 구별된다. 한트케는 이러한 막간의 시간을 평화의 시간으로 묘사한다. 피로는 무장을 해제한다. 피로한 자의 길고 느린 시선 속에서 단호함은 태평함에 자리를 내준다. (p.72)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을 정리해 보면, 우리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성과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긍정의 과잉 때문에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는데, 이럴 땐 현재적 삶을 잠시 중단하고 사색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저자의 결론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소설가 장정일은 한 칼럼을 통해 『피로사회』를 경멸하는 이유를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피로사회』가 다른 철학자들의 개념과 논의를 날렵하게 짜깁기한 것으로, "성과 주체의 내면이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착취 구조를 외면하는 개개인의  무장해제는 요즘 유행하는 '힐링'에 그칠 공산이 크다. 무위 속에서 심신의 피로를 푼 개인 혹은 공동체는 심기일전해 자기를 착취하는 사회 속에 다시 뛰어든다"며, "대중이 불안과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전히 개인적 처방에만 의존할 뿐 정치 행동이 개인의 복리를 향상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역설합니다.

   개인적으로 긍정성의 과잉 시대에서 스스로 착취하기 때문에 피곤하다는 저자의 주장은 긍정하지만, 근본적인 처방이 아닌 자기 힐링적인 개인적 처방이라는 소설가 장정일의 의견 또한 공감합니다. 결국 『피로사회』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피로사회』를 선택한 독자의 몫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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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다 - 김영하에게 듣는 삶, 문학, 글쓰기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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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포기하며 사는 20대들에게! 이렇게 사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꿈은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꿈이 회사원이고 공무원이었던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아주 어릴 적에 제 꿈은 우주인도 되었다가 과학자도 되고, 라디오 DJ도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자 어릴 적에 꿨던 꿈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꿈을 꾸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지극히 흔한 직장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주인이 꿈이었던 아이가 흔한 직장인이 되기까지 다양한 과정들이 있긴 했지만 아무튼 결론은 흔하디 흔한 직장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윗세대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들을 듣곤 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정말 좋은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하지만 꿈도 없고 열정이나 도전의식 같은 것도 없이 현실에 안주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머릿속 생각이나 상상을 충분히 실현할 수 있는 시대에 살면서 우리는 왜 이토록 평범함을 추구하는 것일까요? 언제부터 꿈꾸는 방법을 잃어버리게 된 것일까요?

   어떤 이들은 아프니까 청춘이다, 열정페이 같은 말들을 내뱉으며 상처투성이인 우리들에게 누구나 다 아프니 그저 이겨내라고 말합니다. 이미 그 시절을 지나온 세대들이 던지는 이런 말들은 과히 폭력과도 같습니다.


   한 회사 사장님이 신입사원들을 앉혀놓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왜 현실에 안주하려고만 하는냐. 애플의 스티브 잡스나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봐라. 다 자기 집 차고에서 시작해 세계적인 기업을 만들지 않았느냐?" 그러자 한 신입사원이 옆에 있는 동료에게 그랬대요. "차고라고? 우리집에는 차고 없는데?" 그랬더니 동료가 그러더래요. "차고는 무슨, 차도 없는데. 아, 맞다. 집도 없구나." 지금 젊은이들에게는 '현실에 안주'한다는 것 자체가 꿈깥은 일입니다. 안주가 사치인 시대, 점점 더 나빠지지만 않으면 다행인 시대가 되었습니다. (p.15)


   김영하 작가는 이런 20대들에게 지난날 자신이 했던 것처럼 과감한 결단을 내려라, 예술에 투신하라, 인생을 걸어라, 이렇게 충고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이 20대로 살았던 과거와 현재의 상황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객관적으로 비교할 뿐입니다.

   그가 20대로 살았던 70~80년대는 경제성장률이 1년에 10퍼센트가 될 정도로 경제가 성장할 때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부모 세대보다 훨씬 더 공부를 많이 했고, 그래서 부모 세대보다 더 부유하고 풍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1986년의 대학 취학률이 겨우 22.3퍼센트에 불과했기 때문에 대학만 졸업하면 대기업에 취업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습니다. 게다가 비정규직이라는 말 자체가 없어서 한번 직장을 잡으면 평생 직장이 보장되곤 했습니다.

   김영하 작가 역시 그랬습니다. 장교로 임관만 한다면 전역과 동시에 대기업으로 취업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평탄한 길이 어느 정도 보장되는 ROTC 후보생을 그만두고 군대에 갔다가 제대 후 작가로 등단했습니다. 그가 입사원서 한 장 내지 않고 습작에 매달릴 수 있었던 이유는 경제성장률이 10퍼센트를 넘나드는 시절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안정된 직장을 다니고 있고, 아파트에 살고 있으니, 몇 년 동안 부모님께 빌붙어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시절에 대학을 다녔다면 자신 또한 그때처럼 행동할 수 없었을거라 말합니다. 게다가 갚아야 할 학자금 대출이 있고, 부모님도 안정적인 직장이 없고, 집도 아파트 담보 대출을 떠안고 장만한 것이라면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당장의 벌이를 위해 저처럼 흔하히 흔한 직장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잘 느끼자! 감성근육을 키우자! 비관적 현실주의자가 되자! 

   김영하 작가는 지금의 20대들에게 낙관주의자가 되는 대신 비관적 현실주의자가 되어라고 말합니다. 겉으로 보기엔 항상 파이팅 넘치는 낙관주의자가 좋아 보일지 모르지만 낙관주의자에게는 함정이 많습니다. 잘 될 때는 괜찮지만 한번 무너지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긍정적 사고'와 '낙관적 태도'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우리를 더 힘들게 만듭니다. 이것은 철학자 한병철이 『피로사회』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비관적 현실주의는 인상을 쓰고 침울하게 살아가자는 게 아닙니다. 현실을 직시하되 그 안에서 최대한의 의미, 최대한의 즐거움을 추구"(p.24)하라는 것입니다. 9ㆍ11 테러가 발생했을 때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은 대피할 시간이 충분히 있었지만 곧 소방관이 구하러 올거라는 지시를 받고 자기 사무실에 그대로 머물렀습니다. 대구 지하철 참사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동차 안에 연기가 자욱했지만 기관사가 방송으로 곧 열차가 출발할거라고 말하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 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동요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습니다. 나치 수용소에 수감된 수감자들은 연합군이 올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지만 '연합군은 오고 있다. 그러나 우리 기대만큼 빠르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여기서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 아직 시간은 있다'(p26)고 현실을 정확하게 판단했고 이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소수이긴 했지만 생존 확률이 높았습니다.

   이들처럼 비관적 현실주의자가 되려면 남과 다르게 사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스마트폰의 등장 이후 사람들은 사고하는 방법을 잃어버렸습니다. 스마트폰 액정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킨채 그저 흘려보내고 있을 뿐입니다. 누구나 보고 있는 스마트폰 대신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것도 좋습니다. 타인의 삶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남과 다르게 생각하고 남이 침범할 수 없는 내면을 구축하는 것. 이것이 바로 김영하 작가가 지금의 20대에게 내리는 처방입니다.


   견고한 내면을 가진 개인들이 다채롭게 살아가는 세상이 될 때, 성공과 실패의 기준도 다양해질 겁니다. 엄친아나 엄친딸 같은 말도 의미를 잃을 것입니다. 자기만의 감각과 경험으로 충만한 개인은 자연스럽게 타인의 그것도 인정하게 됩니다. 요즘과 같은 저성장의 시대에는 모두가 힘을 합쳐 한길로 나아가는 것보다 다양한 취향을 가진 개인들이 나름대로 최대한의 기쁨과 즐거움을 추구하면서 타인을 존중하는 것, 그런 개인들이 작은 네트워크를 많이 건설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문학을 하는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문학만큼 다양한 개인의 생각과 느낌을 작가마다의 독특한 스타일로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세계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문학은 태생적으로 개인주의적이며 우리에게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도 모두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세계입니다.

   많은 돈을 벌거나 명예를 쌓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우리에게 천부적으로 주어진 감각들을 최대한 활용하며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더 깊게 느끼는 삶, 남과 다른 방식으로 자기만의 내면을 구축하는 삶, 이런 삶의 방식이 필요한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잘 느끼자. 감성 근육을 키우자. 그리하여 함부로 침범당하지 않는 견고한 내면을 가진 고독한 개인들로서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가자. (p.35~36)


   김영하 산문집 삼부작 중 두번째 책인 『말하다』는 그동안 그가 여러 매체를 통해 했던 강연과 인터뷰가 실려 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큰 화제를 모았던 TEDxSeoul 강연 「예술가가 되자, 지금 당장」과 수많은 청년들에게 진정한 힐링을 줬던 SBS <힐링캠프> 강연 내용도 실려 있습니다. 처음부터 글로 쓰여진 글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말로써 전달하기 위해 쓰여진 글이라서 앞서 나온 산문집 『보다』보다 훨씬 큰 울림이 있는 산문집입니다.

   꿈꾸는 법을 잃어버린 당신에게,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흔하고 흔한 직장인들에게, 낙관적이지 못해 고민인 비관주의자에게, 현실에 상처 받고 위로에 더 큰 상처를 받은 당신이라면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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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학 스캔들 - 불꽃 같은 삶, 불멸의 작품
서수경 지음 / 인서트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책장에 꽂혀있던 『율리시스』를 꺼내어 읽고 있는 당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무인도에 딱 한 권의 책만 가져갈 수 있다면 어떤 책을 가져 가겠습니까?"
   이런 질문을 종종 받게 됩니다. 정말 식상한 질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답을 해야하는 상황이라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라고 답합니다. 만약 딱 한 권이 아니라 여러 권의 책을 가져갈 수 있다고 한다면, 그 대답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고 바뀝니다. 이 책들의 공통점은 항상 완독하기 위해 도전하지만 아직까지 완독을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머리가 텅텅 빈 금발의 미녀'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던 마릴린 먼로는 『율리시스』를 읽고 있는 모습이 사진으로 찍혀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녀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의 역할을 맡아 보고 싶다'고 얘기하면 기자들이 '도스토옙스키의 스펠링은 아느냐?'고 되묻을 정도로 '백치 금발 미인'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는데, 그런 그녀가 어렵기로 소문난 『율리시스』를 읽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이는 『율리시스』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율리시스』를 읽으려고 시도했다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모험이다.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선물하라.(p.209)

   『율리시스』는 "다 읽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은 소설, 읽는 내내 계속 읽을 것인지를 갈등하게 하는 소설, 세상에서 가장 많은 논문이 쓰인 소설, 심지어는 『율리시스』가 만들어 낸 문학박사가 『율리시스』를 읽은 독자들보다 더 많을 것이라는 농담까지 있을 정도"(p.209)로 접근하기 어려운 소설입니다.
   20세기가 끝나가던 해인 1999년, 영국과 미국의 평론가들에게 '영어로 쓰인 20세기 최고의 소설'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선정합니다. 하지만 작가의 생전에는 외설 시비 등에 휘말려 33년 동안이나 판매금지 조치를 당했고, 출간해주겠다고 나서는 출판사나 인쇄업자가 없어서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라는 작은 서점을 통해 마치 007 작전을 방불케하는 방법으로 비로소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소설입니다.
   『율리시스』는 "1904년 6월 16일 단 하루 동안 벌어진 평범한 광고회사 외판원이자 한 집안의 가장인 레오폴드 블룸의 일상 속 의식의 방황을 오디세우스의 모험에 상응하게 그려"(p.215) 낸 것으로 "장장 25만 개의 단어, 10개국의 언어가 동원되며 고어, 폐어, 속어, 비어, 은어 등 다채로운 어휘가 등장"(p.216)합니다. 제임스 조이스 조차 『율리시스』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율리시스』 속에 너무나 많은 수수께끼와 퀴즈를 감춰 두었기 때문에 앞으로 수세기 동안 대학 교수들은 내가 뜻하는 바를 거론하기에 분주할 것이다. 이것이 자신의 불멸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다." (p.210)

   작가 스스로도 인정할만큼 난해한 『율리시스』를 『영문학 스캔들』은 그와 얽힌 다양한 일화를 들려주며 다시 한번 완독에 도전하게끔 만듭니다.

   영문학은 우리들 모두 한 번쯤은 접해 본 외국 문학 중에서 가장 친근한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셰익스피어, 바이런, 예이츠 등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유명한 작가들과 작품에 대해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재미있는 뒷이야기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영문학에 대해 문외한인 일반 독자들도 가벼운 마음으로 읽다 보면 흥미와 호기심도 생기고 작가, 작품들에 대한 기초 지식과 교양을 쌓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쓰면서 가장 즐거웠던 것은 각 시대를 풍미했던 작가들의 작품들을 새롭게 다시 만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독자들도 읽는 즐거움과 문학적인 향취를 함께 누릴 수 있도록 작가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책 속에 되도록 많이 인용하고자 했다. (p.8)

   매력적인 외모와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스 오븐에 머리를 박고 자살한 실비아 플라스, 평생 사랑에 대한 수많은 아름다운 시를 남겼지만 그 자신은 사랑에 실패해 평생 독신으로 늙어 죽어갔던 예이츠, 죽음 후에야 공개할 수 밖에 없었던 슬픈 가족사를 가진 유진 오닐, 노벨문학상까지 받으며 작가로서의 최고의 삶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스스로 생을 마감한 헤밍웨이, 어릴적 받은 성적 학대의 기억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도 돌을 품에 안고 강 속으로 뛰어들 수 밖에 없었던 버지니아 울프까지, 『영문학 스캔들』에는 영문학사에 반짝반짝 빛나는 이름을 올린 25명의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예전에는 그저 지루하고 답답하게만 느껴졌던 작품들도 그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읽고나면 다시 읽고 싶어질 정도로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비록 당시에는 인정받지 못하고 숨겨져 있었지만 지금은 고전이 되어버린 작품들. 그 작품들이 고전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야기, 그 작품들을 고전의 반열에 올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오랫동안 책장 속에 꽂혀 있던 빛바랜 작품들을 다시 꺼내어 읽고 싶어질 것입니다!

   정말 훌륭한 작가들 중에는 치열하고 남다른 인생을 산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었다. 어찌 보면 평범하고 정상적인 인생을 산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의 파란만장한 스토리들이 대부분이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인생을 희생해서 예술을 얻었는지, 아니면 보통 사람들은 감히 엄두도 못 낼 치열하고 날카로운 삶의 고통이 있어야만 비로소 위대한 예술 작품이 탄생하게 되는 것인지, 그것은 잘 모르겠다.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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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5-03-24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엄두도 못낼 책입니다만.

뒷북소녀 2015-03-24 11:28   좋아요 0 | URL
몇 번이나 읽다가 실패해서 이번에 다시 도전해 볼까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