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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마르셀 에메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3월
평점 :
현대인의 시간은 결코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말을 합니다. 시간은 돈으로도 살 수 없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주어진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시간을 돈으로 살 수 있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면요?
마르셀 에메의 소설집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에 수록되어 있는 「생존 시간 카드 : 쥘 플레그몽의 일기에서 발췌」라는 단편을 통해 그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정부는 식량과 생필품 부족에 대처하고 노동계급의 수익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p.39) 유용성이 떨어지는 사람들의 생존 시간을 제한하는 법령을 발표합니다. 유용성이 떨어지는, 다시 말해 쓸모없는 사람들은 한 달을 다 사는 게 아니라 그 무용성의 정도에 따라 일수를 정해놓고 다달이 그 일수만큼만 살도록(p.40) 제한하는 법령으로 당장 다음달인 3월부터 시행한다고 합니다. 그 쓸모없는 사람들의 범주에는 노인, 퇴직자, 실업자, 창녀, 부녀자 등이 포함되는데 쥘 플레그몽은 예술가와 함께 작가까지 포함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경악합니다.
쓸모없는 사람들, 곧 '부양을 받고 있을 뿐 그것의 실질적인 대가를 전혀 치르지 않는 소비자들'의 무리에 놀랍게도 예술가와 작가가 포함된다고 하지 않는가!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화가나 조각가나 음악가에게 그 조치가 적용되는 것은 이해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작가에게마저 그것이 적용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이것은 분명 자가당착과 양식에서 벗어난 판단 착오가 빚어낸 일이었다. 이는 우리 시대의 다시없는 수치로 남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작가의 유용성이란 증명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특히 나 같은 작가의 유용성은 아주 겸손하게 말해서 증명하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나에게는 한 달에 겨우 보름간의 생존만 허용되리라고 한다. (p.41~42)
한 달에 겨우 15일만 살게 된 쥘 플레그몽은 예전보다 훨씬 더 열심히 삽니다. 일기 쓸 시간을 못 낼 정도로 삶은 분주해지고, 이토록 짧은 삶에서 무엇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밤잠도 잊을 지경입니다. 작가인 그는 글을 쓰는 것도 더 열심히 합니다. 예전에는 석 주나 걸려서 쓴 것을 최근에는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원고를 나흘만에 쓰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문체나 사유의 깊이가 가벼워진 것도 아닙니다.
이런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난 그와는 달리, 일상이 엉망이 되어버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젊은 부인과 사는 노인 로캉통은 걱정이 많습니다. 자신은 겨우 6일만 살 수 있는데 젊은 아내는 15일이나 살게 된 것입니다. 이제 겨우 24살인 젊은 아내를 혼자 두고 잠든다는게 영 개운치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생존 시간의 마지막 날 사람들을 초대해 함께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함께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면 못 볼 꼴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잠자리에 같이 누워 있었다. 자정 일 분 전에 로캉통은 아내의 손을 잡고 마지막으로 일러둘 말을 하고 있었다. 자정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그녀는 남편의 손이 자기 손에서 녹아 없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 곁에 남아 있는 것이라곤 텅 빈 파자마와 긴 베개 위에 놓인 틀니뿐이었다. (p.48)
간밤에 다시 삶으로 돌아왔을 때 소스라치게 놀랐다. 지난달 16일에 나는 서 있는 상태에서 상대적인 죽음(요즘에는 일시적인 죽음 대신에 이 말이 유행하고 있다)을 맞았고 융단 위에 뭉그러졌다. 그랬다가 다시 깨어나 보니 나는 완전히 벌거숭이가 되어 있었다. 화가 롱도는 상대적인 죽음을 맞을 남녀 열 사람을 자기 집에 불러모았는데, 그 집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졋다. 그 꼴이 정말 가관이었을 것이다. (p.57)
법령이 시행되고 한달쯤 지난 4월에 한 남자가 쥘 플레그몽을 찾아옵니다. 자신은 아내와 세 자녀를 거느린 병약한 노동자인데 자기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자기의 생존 시간 배급표 중 일부를 팔고 싶다고 합니다. 몸이 허약해져서 힘든 노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회적으로 쓸모없는 사람이기는 해도 양심은 있었던 쥘 플레그몽은 그 남자에게 배급표를 사는 대신 약간의 돈을 주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자존심이 있었던 그 남자는 대가 없이는 돈을 안 받겠다며 배급표 한 장을 쥘에게 쥐어주고 떠납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부유한 사람들이 생존 제한에 많이 걸린 탓에 이런 식으로 생존 시간 배급표를 사고 파는 암시장이 본격적으로 형성됩니다. 가난한 노동자들은 자신의 생존 시간 배급표를 팔아 가족의 부족한 생계 수단을 보충하고, 부유한 사람들은 그 덕분에 더 많은 시간들을 살게 됩니다. 배급표를 많이 얻게 된 사람들은, 급기야 한 달 30일을 사는 것이 아닌 35일, 45일, 60일까지 살게 됩니다. 엄청난 부자 한 명은 6월 30일에서 7월 1일 사이에 무려 1967일을 더 살기도 합니다.
완전 생존 자격 보유자들은 시간의 흐름에 이상이 생겼음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6월이 길어진 것에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드은 나처럼 불법적으로 이 연장된 시간을 살고 있는 자들뿐이다. (p.68)
처음에는 이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정부 관계자들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증언이 기사로 보도되자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법령을 시행한지 4개월만인 7월에 생존 시간 카드를 폐지하는 법령을 다시 공포합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일방적인 정책들은 시대를 초월하고 늘 이런 모양입니다. 그 법령이 시행됐을 때 초래될 부작용들은 생각하지 못하고 우선 법령만 통과시키면 그만인거죠.
여기서 잠깐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이 법령을 만든 사람들도 돈이 엄청나게 많아서 부유한 사람들처럼 생존 시간 배급표를 무한정 살 수 있었다면, 그래서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은 날들을 살 수 있었더라면 이렇게 쉽게 법령이 폐지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마르셀 에메의 소설보다 더 나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당신에게!
아주 오래 전에 이 단편소설을 처음 읽었는데, 표제작인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보다 훨씬 강한 인상을 줬습니다. 시간은 돈으로 살 수도 없고,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주어진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절대적인 시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닐까요? 하루 24시간이라는 절대적인 시간을 돈만 있으면 상대적으로 더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KTX 비용도 비싸다고 느린 무궁화 기차를 타고 5시간 40분동안 꾸역꾸역 갈 수도 있고, 부유한 사람들은 전용 헬기를 타고 단숨에 날아갈 수도 있습니다. 절대적인 시간은 결코 늘어나지 않지만, 부유한 사람들은 시간을 절약해 줄 수 있는 도구들을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유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설가 김영하는 산문집 『보다』를 통해 스마트폰에 집착하는 현대인들은 마르셀 에메의 소설보다 더 나쁜 방향으로 시간을 부유한 자들에게 헌납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당신에게 주어진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는 온전히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당신은 오늘 어떤 하루를 보내셨나요?
스티브 잡스는 마르셀 에메의 소설을 더 나쁜 방향으로 실현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가난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자기 시간을 헌납하면서 돈까지 낸다. 비싼 스마트폰 값과 사용료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반면 부자들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제공한 시간과 돈을 거둬들인다. 어떻게? 애플과 삼성 같은 글로벌 IT기업의 주식을 사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의 부자가 한국의 가난한 젊은이에게 직접 시간 쿠폰을 살 필요는 없다. 그들은 클릭 한 번으로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시간을 헐값으로 사들일 수 있다. (『보다』, p.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