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옷의 세계 - 조금 다른 시선, 조금 다른 생활
김소연 지음 / 마음산책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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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시옷들을 시인의 상상력으로 시어로 직조해내다!

   글자에도 취향 같은게 있을 수 있다면, 나는 'ㅅ'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ㅇ'이나 'ㅎ'처럼 둥근 면이 없는 'ㅅ'은 시릴 정도로 날카롭고 차가워 보입니다. 게다가 두 개의 선이 서로 맞대고 있는 모습이 상당히 불안해 보입니다. 쓰는 사람의 필체에 따라 정대칭을 이루기도 하고, 한 선이 더 꼿꼿하게 서면 나머지 한 선은 훨씬 더 불안정하게 기대는 꼴이 되기도 합니다. 서로에게 등을 기대고 있는 사람의 형상(人)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무튼 마음에 들지 않는 'ㅅ' 입니다. 그래서 한동안은 이름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닉네임에 들어가 있는 'ㅅ'을 치환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애쓴 적도 있습니다.


   시인 장석주가 『불면의 등불이 너를 인도한다』에서 "시와 산문을 두루 잘 쓰는 시인"(p.377)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김소연은 산문집 『시옷의 세계』를 통해 'ㅅ'으로 시작하는 사소한 낱맡들을 시인 특유의 상상력과 감정들을 담아 또 하나의 '시어'로 직조해 냅니다. 「사라짐」, 「사소한 신비」, 「산책」, 「상상력」, 「새하얀 사람」, 「생일」, 「세 번째 상하이」, 「세월의 선의들」처럼 독자들에게는 사소하고 무의미한 낱맡들이 시인의 감성을 덧입고 적당한 "밀도와 온도와 습도"(p.214)를 머금은 시어들로 탄생합니다.


   밀도와 온도와 습도. 책을 읽을 때면 으레 이 세 가지를 기준으로 문장을 측정하는 버릇이 있었다. 밀도 높은 문장을 가장 좋아했고, 습도가 낮은 건조한 문장을 신뢰했고, 온도가 지나치게 높거나 지나치게 낮은 문장에서 풍기는 과잉을 부러워했다. 하고 싶은 말이 차고 넘칠 때, 그것을 집약하려는 집중력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문장의 높은 밀도는 글쓴이의 경지를 실감할 수 있어 좋았다.

   따뜻한 문장을 가장 꺼려했다. 따뜻한 문장은 삶을 달관한 듯한 깨달음과 위로로 포장되어 있기가 십상이다. 위선에 가깝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삶과 손쉽게 화해해버렸다는 의미에서 패배자의 모습과 비슷한 뒷맛이 남는다. (p.214)


   또한, 김소연은 『시옷의 세계』를 통해 「시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소회를 풀어놓기도 합니다. 이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시인은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자신의 재주에 더 의지해서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경험과 취재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내는 소설가들과는 달리 시인이 시어를 선택하고 그것을 풀어내는 것은 좀 더 직관적이고 천부적인 영역의 일이 아닐까요? 마찬가지로 소설가는 타고난 재능이 부족하더라도 노력한다면 될 수는 있지만, 시인은 그렇게 되기에 어려운게 아닐까요?

   하지만 『시옷의 세계』는 시인도 타고나는 것이 아닌 노력의 결과로 이뤄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김소연은 문장 하나를 써내기 위해 단어를 골라내는 일부터 신중하게 고민합니다.


   단어를 고르는 일에 능력이 있다면 나는 하루에 시를 열 편쯤은 쓸 수 있을 것만 같다. 문장은 도착해 있는데 내가 아는 단어들은 낡아, 나는 늘 새로운 단어에 갈급하다. 새롭되 전혀 새롭다는 느낌은 없이, 낡고 익숙한 느낌은 결코 아닌 채로, 문장 속에 슬그머니 스밀 수 있는 단어 하나를 찾는 데에 매일매일을 다 써버린다. 온 동네를 거닐고 커다란 사전을 꺼내고 인터넷을 뒤지고 낯선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 그 밖의 일들엔 아무 관심도 없다. 내게 단어를 선물해준 것이 기뻐 꽃씨를 심었고, 값진 단어 하나를 주워듣기 위해서 친구를 만났다. (p.252)


   시인을 두고 타고나야 가능한 것이라고 말하는 나같은 사람이 있는 것처럼, 시인을 엉뚱한 몽상가나 언어의 연금술사로 부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를 포함해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김소연은 말합니다. 시인의 상상력이란, 정확하고 과학적인 증표와 징표를 통해 징후를 밝혀내는 논리적 과정을 거치는 것이므로 '풍부하다'가 아닌 '정확하다'는 표현이 더 옳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김소연이 말한 '과학적인 증표와 징표'는 사소한 것도 지나치지 않는 '관찰력'의 다른 말이 아닐까요?


   시인의 상상력이란, 정확하고 과학적인 증표와 징표를 통해 징후를 밝혀내는 논리적 과정이다. 그러니까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표현은 틀린 표현이다. 상상력이 정확하다라는 표현이 오히려 더 옳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사이에 숨겨진 공간들, 그 경계의 영역들, 그 이상한 미지의 세계에 대해 느끼는 우리의 모호함을 시인은 상상력의 힘으로 정확하게 호명해낸다. (p.45~46) 


   우연찮게도 최근에 시인들이 쓴 산문집들을 연이어 읽었습니다. 자기 이야기에만 빠져있어 공감은 커녕 흥미를 잃게 만드는 대부분의 산문집들과는 달리, 그들의 문장 속에서는 그저 술술 읽어 내려갈 수만은 없는 밀도감이 느껴집니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시인 특유의 상상력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가 무심코 지나친 사소한 것들을 관찰하고 정확하게 문장으로 표현해 주니 어찌 공감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비록 우리가 놓치긴 했지만, 그것들 또한 우리 주변의 이야기들이니까요.


   시인이 가난한 것은 한 사회 안에 시인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시인이 너무 많은 것은 세상이 너무 병들었고 제도가 너무 지긋지긋하게 갑갑하기 때문이다. 병든 세상과 낡고 딱딱한 제도에 대한 불만은 창작 행위로 이어질 때에 창조적인 에너지가 된다. 가장 저비용으로, 게다가 아무 기술을 배우지 않고 모국어만 구사할 줄 알면 가능한 높은 접근성으로 인해, 게다가 혼자서 가능한 작당이라는 창작 방식으로 인해, 세상엔 시인이 이토록 많다. 그러나 시인이 가난한 것은 가난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잘 살고자 하는 욕망이지만, 다른 방식의 잘 살고자 하는 욕망이라서 시인은 가난할 수밖에 없다. 시의 욕망이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시인일수록 좋은 시를 쓸 확률이 높다. 윤택한 아파트에서 쓰인 시, 그림 같은 전원주택에서 쓰인 시에는 생명이 깃들어 있지 않다. 옥탑방 아니면 반지하, 도시의 변두리, 시골의 허름하고 불편한, 좁고 누추한 공간에서 쓰인 시에 오히려 생명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 시인은 명성을 쌓을수록, 나이가 들어 안정될수록 점점 나태해진다. (p.208~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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