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버웨어 판타 빌리지
닐 게이먼 지음, 나중길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릴적부터 나는 모험담을 좋아했다. 토끼를 따라 이상한 나라로 들어가는 앨리스, 회오리 바람을 타고 오즈의 나라로 떠난 도로시, 마법 가루를 뿌리고 네버랜드로 떠난 웬디, 노틸러스호를 타고 바다를 누비는 네모 선장 등.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런 모험을 동경하기는 마찬가지다.

 

직장인으로 평범하게 살아가던 리처드는 어느날 길가에서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아가씨를 만나게 된다. 평범한 남자라면, 이런 상황에서는 으레 기사도 정신을 발휘하곤 한다. 그가 아가씨를 도와준 이후, 그는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게 된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으로 변해버린 상황에서 그는 지상의 틈으로 굴러떨어져 지하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그는 그런 세계가 있을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제일 먼저 그가 도와주었던 아가씨를 찾아간다. 그녀의 이름은 도어,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을 찾고나면 그가 다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다는 말에 그는 그녀의 모험에 나선다.

지하세계, 말그대로 온갖 사람들이 아니 온갖 것들이 존재했다. 확실하게 없다고 생각했던 천사가 등장하는가 하면, 오래 전에 흑사병을 일으키고 많은 사람들을 죽였던 살인자, 괴수,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내는 능력이 있는 자 등 리처드는 여행을 하면서 많은 존재들을 만나게 된다.

여행이 끝나고 도어가 찾고자 하는 것을 얻게되자 리처드 또한 지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열쇠를 얻게 된다. 이름 그대로 '도어' 그녀가 지상과 지하를 오고갈 수 있는 문이었던 것이다. (그녀에게는 문을 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젊은 친구, 이 사실을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사실 두 개의 런던이 있네. 자네가 살던 런던 지상과 세상의 틈으로 굴러 떨어진 사람들이 사는 런던 지하가 있지. 이제 자네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된 걸 걸세. 잘 있길 바라네." (p.187~188)

런던의 지하세계에는 수백 명이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수천 명이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본래 이곳에서 살던 사람이거나 지상에 살다가 틈으로 떨어진 사람들이다. (p. 201)

아마 우리는 각자 다른 천사를 머리에 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천사는 모두 날개가 있고 머리 위에 후광이 있으며 나팔을 불며 땅에는 평화를 가져다주고 인간에게 유익한 일을 하죠." (p. 204)

 

여러 권의 무협지를 읽다보면 일정한 패턴을 발견하게 된다. 판타지 문학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네버웨어』를 읽으면서 『해리포터』시리즈와 비슷한 설정을 몇 가지 발견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배경이 런던이라는 것, 물론 BBC에 방영될 TV 시리즈였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설정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경우를 보더라도 상당수의 이야기들이 서울을 배경으로 설정되어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 도시에는 두 가지의 세계가 공존하고 있다. '인간'과 '머글'의 세계처럼 '지상 세계'와 '지하 세계'가 존재한다.

두번째, 주인공의 가족은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고 그 가족들은 어떤 어둠의 세력에 의해서 모두 죽임을 당한다는 사실. 이 책의 주인공은 리처드라고 할 수 있지만, 모험의 주체는 '도어'이다. 그녀의 가족은 문을 열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그래서 그녀만은 해치지 않았다. 문을 열어야 하기 때문에.

세번째, 어떤 이야기든지 마찬가지지만 반전이 버티고 있다. 대개 그 반전이라는 것은 같은 편인 줄 알았던 사람이 그들을 배신하고 이용한다는 점.

마지막으로, 다양한 이야기에서 차용된 것으로 보이는 이야기나 인물들이 많다.

"자, 그럼. 그냥 걸어가세요. 뒤돌아보지 마시고요." (p. 511)

지상으로 가는 리처드에게 도어가 던지는 당부인데, 이것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신화를 연상시킨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영화 속 주인공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판타지 모험을 펼쳤던 영화『젠틀맨 리그』가 자꾸 떠올랐다. 이 영화와 비슷한 스토리는 없었지만, 이것 저것이 다양하게 합쳐져 있었다는 점에서 떠올랐던 것이 아닐까. 

 

"당신이 만약 런던 지하에 사는 사람이라면 당신이 먼저 걸음을 멈추고 사람들에게 말을 걸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당신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해요. 그리고 설사 당신의 존재를 알아채더라도 지상 사람들은 금방 잊어버리죠." (p. 274)

"천사들은 일단 삐뚤어지면 어는 누구보다도 사악해지지. 루시퍼도 한때 천사였다는 사실을 떠올려보게." (p. 443)

 

2007/12/24 by 뒷북소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힐러리의 삶
칼 번스타인 지음, 조일준 옮김 / 현문미디어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2007년 1월, 힐러리는 대선 출마 선언을 한다. 어쩌면 가장 영향력이 있는 여성이 될지도 모르는 그녀, 퍼스트레이디로서 현명한 내조자 역할을 하고 바람끼 많은 남편의 거짓말도 덮어줄 수 있는 그녀, 처음으로 상원의원이라는 자신의 직책을 가지고 집중 조명을 받았던 그녀. 그녀가 이런 모습을 얻게 된 것은 삶을 향한 그녀의 강한 열정 덕분이었다.

어릴적 그녀는 총명한 학생이기는 했지만 남의 이목을 끌만큼 예쁜 소녀는 아니었다. 정리하지 않은 곱슬머리에 아랫니보다 돌출한 윗니, 예쁜 눈을 가려버린 안경과 히피를 연상시키는 옷차림. 말 그대로 그녀는 촌티가 줄줄 흐르는 소녀였고, 그녀의 집안 역시 그녀가 외모에 관심을 기울여 치장할 만큼 부유한 집안도 아니었다. 특히 보수적이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딸이 옷차림에 신경 쓰는 것마저 싫어했고, 상당히 폭력적이기도 했다. 그녀의 이런 환경은 우수한 성적으로 진학한 웰즐리 여대에서의 자신감 상실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녀 특유의 강인함으로 자신감을 회복하고 여느 웰즐리 여대생과는 다른 모습으로 그녀들의 지지를 얻기 시작한다. 상승곡선을 타기 시작한 그녀, 예일대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곳에서 그녀는 빌을 만나게 된다.

힐러리는 아버지로부터 억압 받으며 살고 있는 어머니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여성으로서 당당하게 살고 싶었다. 물론 그녀에게는 그런 능력이 충분했다. 그러나 빌을 만난 이후 그녀는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자신의 삶이 아니라 빌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녀는 빌과 함께 하기 위해 작은 시골이었던 아칸소에 머물렀고, 빌을 당선시키기 위해 선거 유세를 따라 다녔다. 빌이 대통령이 되어 백악관에 입성했을 때도 그녀는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뿐만 아니라 빌이 르윈스키 사건으로 정치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을 때도 그녀는 그의 편을 들어주었다.

 

"힐러리가 가진 정치적 잠재력은 누구보다 월등했습니다." _ 빌 클린턴 (p. 160)

 

힐러리와 빌의 결합은 환상 궁합이라 할 수 있다. 힐러리는 빌과는 달리 강인했고 추진력이 있었다. 자신의 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과감히 잘라버리는 결단력도 있었다. 반면에 빌에게는 그러한 특성이 부족했다. 빌은 대인관계에서도 우유부단했으며, 자신의 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조차 강력하게 대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우유부단함이 빌 특유의 유대감과 친밀함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니까 힐러리와 빌은 서로에게 없는 특성을 보완해주고, 그것으로부터 시너지 효과를 창줄하는 관계였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의 결합이 다분히 정치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힐러리는 빌을 정말 사랑했다고 했다. 그리고 빌을 처음 만났을 당시 힐러리는 굳이 빌에게 기댈 이유가 없었다. 스스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노선을 바꾸고 빌과의 결혼을 선택했던 것은 정말 그녀가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빌을 사랑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빌은 그런 힐러리를 무서워했다. 르윈스키 사건 때 그가 탄핵을 받을 위기에 처하면서도 끝까지 거짓말을 주장했던 것은 힐러리가 진실을 알게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퍼스트레이디로서 상원의원이 된 그녀, 어쩌면 예전에 그녀가 보여주었던 모습처럼 너무 자신감에 넘쳐 독선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달라졌다. 빌이 재위했던 8년 동안 그녀는 빌의 곁에서 그를 도와주며 빌의 장점으로 여겨지는 친화력과 정치력 등을 그녀의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주장을 펴기보다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맘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도 더이상 공격적이지 않으며, 굽혀야 할 때 굽힐 줄 아는 유연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힐러리의 대선 출마와 그녀의 당선 여부는 미국 뿐만이 아니라 전세계의 관심사다. 앞으로 그녀는 어떤 행보로 또 한번의 "클린턴 시대"를 열지 궁금하다.

 


위대한 정치가의 특성은 신념에 대한 일관성과 신념을 지키고자 하는 불굴의 정신, 그리고 지도력을 대담하게 발휘하기 위해 필요한 정체성의 인식이다. (p. 759)

 

힐러리는 《살아있는 역사》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 대부분의 내용이 유령작가에 의해 쓰여진 '자서전'에서 '환희'에 대해 기술된 몇 안 되는 부분 중 하나이다. (p. 142)

 

책을 읽으면서 칼 번스타인은 이 책을 왜 썼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는 앞서 나온 힐러리의 또다른 책인 『살아있는 역사』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면서도(앞서 나온 책을 너무 의식한 탓일까) 상당 부분 그 책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살아있는 역사』가 유령작가에 의해 쓰여진 것이라고 말하는 작가는 많은 사람들을 인터뷰 하며 그 내용들을 토대로 책을 펴냈다. 그리고 그 내용들을 단순히 연대 순으로 나열하고 있다. 물론 객관적인 사실만을 읽을 수 있어서 읽는 독자는 헷갈리지 않아도 되지만, 작가의 "관점"이 없다. 그가 힐러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힐러리가 일관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 것처럼 갈팡질팡 하고 있다.

마지막 맺음조차 '껍질 속의 그녀에게, 아주 조금이라도 세상을 바꿀 능력이 있을지 모르므로.'라고 마무리 하며 결론을 내리는 것을 회피하고 있다. 전직 기자라는 타이틀이 그를 중립, 아니 판단유보의 상태로 만들었던 것일까. 적어도 이런 책을 기술함에 있어서는 대상에 대한 확실한 "관점"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족 하나를 덧붙이자면, "A는 B(B는 C(C는 D하는 것이다)이다)이다" 처럼 괄호를 중첩 사용해서 무언가를 부연 설명하는 행위는 하지 말았으면 한다. 읽는데 짜증이 날 정도다. 차라리 하단에 따로 주를 달던가.

 

2007/12/25 by 뒷북소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드보일드 에그> 서평단 알림
하드보일드 에그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16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하드보일드(Hardboiled), 내가 이 단어를 맨 처음 접한 것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였다. 참 알 수 없는 단어였다. 단순히 직역을 하면 "열심히 끊인" 정도가 된다. 그런데 이것을 문학적으로 풀이하면 "냉혹 혹은 비정"이 된다. 열심히 끊였다면 분명 "열정"이 되어야 하는데 정말 아이러니한 단어가 아닐 수 없다. 

멋진 단어라고 생각은 했지만, 나와는 거리가 먼 단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점점 "하드보일드"해지는 내 모습을 보게 된다.

 

사립탐정, 이보다 더 하드보일드와 어울리는 직업이 있을까? 물론 <명탐점 코난>에 나오는 유명한 탐정처럼 코믹한 사람도 있지만, 분명 탐정에게는 "비정하고 냉혹한 현실에도 감상에 빠지지 않는 하드보일드"가 필요하다.

페이는 영화 속 말로처럼 하드보일드의 삶을 꿈꾸는 서른 셋의 사립탐정이다. 그러나 그에게 들어오는 일은 전혀 하드보일드하지 않다. 고양이, 개, 이구아나를 찾아달라는 일이 대부분이며 그의 단골 손님은 칠칠치 못한 동물병원 의사다. 그래도 수입은 나름 짭짤하다. 그는 좀 더 멋진 탐정 생활을 하기 위해 제임스 본드 옆에 있는 늘씬한 아가씨를 꿈꾸며 비서를 모집한다. 해변가에서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고 있는 사진을 동봉한 지원자, 그는 전화로 그녀를 바로 채용하지만 다음날 그를 찾아온 사람은 꼬부랑 할머니 '아야'였다. 아무리 봐도 60세 이하로는 보이지 않는 할머니가 자기에는 온갖 자격증과 경력이 있다며 한번 써보라고 들이댄다. 한 며칠 임시 채용할고 했으나 뜻하지 않은 의뢰 덕분에 그들은 환상의 커플이 된다.

 

오기와라 히로시, 그와는 『오로로콩밭에서 붙잡아서』 이후 두번째 만남이다. 두번 모두 상당히 유쾌한 만남이었다. 그러나 유쾌함만이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는 남다른 소재들을 가지고 이야기를 쓴다. 『오로로콩밭에서 붙잡아서』는 죽어가는 농촌을 살리기 위한 홍보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번 책은 그들의 필요에 의해서 예쁘게 키워지다가 버려지는 애완동물과 아무것도 의지할 곳이 없는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이다. 더이상 키울 수 없게 되어 버려지는 애완동물이나 더이상 사회적인 효용이 없어 방치되는 아야 할머니나 같은 처지가 아닐까.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존재를 보듬어 주는 페이 같은 사람이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쉽고 가볍고 유쾌하지만 절대 웃고만 넘길 수 없는 이야기를 쓰는 오기와라 히로시, 다음에는 어떤 소재를 가지고 우리 앞에 등장할지 기대된다.

 

"하드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어. 부드럽지 않으면 살 자격이 없고." _페이 (p. 153)

 

★ (p314:마지막 줄)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이건 뭘까? 오타인가?

[알라딘 서평단 도서]

 

2007/12/24 by 뒷북소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 달 후, 일 년 후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최정수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여주인공 조제는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하는 장애인이다. 그녀는 좁은 방에서 할머니가 주워 온 헌책을 읽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조제'라는 이름은 그녀가 좋아하는 프랑스와즈 사강의 소설 속 여주인공의 이름을 따 온 것이다.

 

현대 프랑스에서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진 작가 중 한 명인 프랑수아즈 사강의 『한 달 후, 일 년 후』에는 사랑 때문에 서로 얽혀있는 아홉 남녀가 등장한다.

영화 속 여주인공이 좋아했던 '조제', 그녀에게는 의학을 공부하고 있는 연하의 '자크'라는 남자친구가 있다. 과거 그녀의 연인이었던 작가 지망생인 베르나르도 여전히 그녀를 잊지 못해 주위를 맴돌고 있다.

'베르나르', 그에게는 이미 니콜이라는 부인이 있다. 또 그를 좋아하는 배우 베아트리스도 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과거에 집착하며 조제를 원한다.

아직은 큰 인기도, 큰 역할도 맡지 못했지만 아름다운 배우 '베아트리스', 덕분에 그녀 주위에는 많은 남자들이 있다. 이미 결혼한 알랭 말리그라스, 그의 조카인 에두아르 말리그라스, 그녀의 후원자를 자청한 쉰 살의 앙드레 졸리오. 그녀에게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 이내 식어버리는 불꽃 같은 것이다. 그녀는 진정한 사랑을 할 줄 모른다.

'에두아르 말리그라스', 그는 어느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하고 있고 한때 그녀와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에게 버림을 받은 상태. 그는 그녀 주위를 맴돌고 있는 다른 남자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를 미워하거나 증오하지 않는다.

'알랭 말리그라스', 그도 이미 결혼을 한 상태지만 베아트리스를 향한 사랑만큼은 감출 수 없다. 더이상 그 사랑을 감출 수 없게 되자 그는 술로 분출하게 된다. 사랑 때문에 그는 폐인이 되어 버린다.

알랭의 아내 '파니'와 베르나르의 아내 '니콜', 그녀들은 남편의 외도를 알고 있지만 그저 다시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사랑에 있어서 그녀들은 상당히 수동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듯 했다. 그러나 파니는 남편처럼 새로운 사랑을 찾아 나선다.

서로 얽혀있는 사랑 때문에 그들의 사랑이 파국으로 치닫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그들의 마지막 모습은 서로 실타래가 얽히기 전으로 돌아온다. 속으로는 여전히 서로를 향해 얽갈린 사랑을 품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모두들 제자리로 돌아온다.

 


"일 년 후 혹은 두 달 후,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p. 136)

 

"언젠가 당신은 그를 사랑하지 않게 될 거예요. 그리고 언젠가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게 되겠죠." _ 베르나르

사랑, 한때 나도 그것에 매달렸던 적이 있다. 그때는 내 사랑은 절대 변하지 않을거라며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싫어했었는데, 역시 시간이 지나면 무디어지는게 그것인가 보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으면 사랑에 대한 감정을 가져보기가 더 어려울 것 같아 며칠 전에  『스탕달의 연애론』을 샀다. 그런데 그 책을 읽어보기도 전에 사강, 그녀 덕분에 사랑에 대한 허무감만 더 커져 버렸다. 과연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다시 고독해지겠죠. 그렇게 되겠죠. 그리고 한 해가 또 지나가겠죠......" _베르나르

"나도 알아요." _조제

"조제, 이건 말이 안 돼요. 우리 모두 무슨 짓을 한 거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이 모든 것에 무슨 의미가 있죠?" _베르나르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돼요. 그러면 미쳐버리게 돼요." _조제 (p. 186)

 

2007/12/19 by 뒷북소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
실비 제르맹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라하, 언제부터인가 그 도시는 내게 로맨틱한 감상을 던져 주었다. 언젠가는 꼭 여행하고픈 곳, 한번쯤은 사랑에 빠지고픈 곳. 아마도 두 남녀가 프라하에서 만나 사랑에 빠졌던 드라마의 영향이 큰 듯하다. 드라마 속 여주인공이 프라하에서 행복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그녀는 그곳에서 새로운 사랑을 만났지만, 과거의 사랑을 잃기도 했다. 그녀는 프라하 거리를 헤매며 울고 다녔다.

사실 프라하는 그리 로맨틱한 도시가 아니다. 밀란 쿤데라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보여 주었듯이 프라하는 상처투성이의 과거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프라하의 봄'을 찾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민주와 자유를 외치며 죽어갔다. '프라하의 봄' 을 찾기 훨씬 전인 2차 대전 때는 나치에게 짓밟히기도 했다.

 

여기 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이름도 나이도 얼굴도 없지만 프라하의 구시가 골목을 위풍당당한 몸으로 걸어다닌다. 그녀는 엄청난 거인이다. 그녀의 왼쪽 다리는 오른쪽 다리보다 훨씬 짧아서 심하게 다리를 전다. 그녀는 대단히 무거운 듯 힘겹게 발을 들었다가 내려놓는다. 마치 땅에 닿으면 큰 상처를 입기나 할 것처럼 힘겨워한다.

마치 환영처럼 도시에 나타나서 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여자, 그녀는 울고 있다. 세상의 모든 바람들을 향해, 인간들의 탄식과 눈물의 모든 소리를 향해 가슴을 열고서 울고 다닌다.

 

이 낯선 여자, 그녀는 누구일까? (p. 18)

 

원제 'La Pleurante des rues de Prague'에서 'La Pleurante'는 그냥 '우는 여자'가 아니라 '상복차림의 눈물 흘리는 여인상'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그렇다. 그녀는 이 거리에서 누군가를 잃었고,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은 여인이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이 거리에서 상처를 받은 모든 사람들의 탄식과 눈물을 대신해 울고 있다. 나아가 세상 모든 사람들의 소리를 담아 울고 있다.

 


그녀가 책 속으로 들어왔다. 그 여자는 떠돌이가 빈집으로, 버려진 정원으로 들어서듯 책의 페이지 속으로 들어왔다. (p. 13)

 

잉크의 길들은 모든 사람이 다 같이 공유하는 길이다. 그 길은 지름길이다. 꼬불꼬불한 미로들로 된 지름길이지만 때로는 우리를 숲속의 빈 터들 중에서 가장 밝은 곳으로 가파르게 인도하기도 한다. 한순간 삶이 거기에 있고 우리는 세상 속에 있다. 우리는 세상의 속살에, 한복판에 있어서 마침내 세상의 의미와 충만한 아름다움에 닿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한순간, 삶이 바로 여기에 빛나고 있고 세계가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것은 오래 지속되지 않지만 흔적들을 남긴다. (p97~98)

 

텍스트 속으로 들어온 그녀의 등장은 과히 도발적이다. 그녀가 지나간 곳은 잉크의 흔적이 남는다. 그녀가 울고 다닐 수 있는 텍스트는 프라하의 거리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며, 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그녀는 어느 한명으로 단정지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될 수 있고,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되어버린 존재이다. 그래서 그녀는 이름도 나이도 얼굴도 없었던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공유한 존재였기 때문에 그렇게 거대했던 것이다.

 

나는 그녀처럼 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한 사람을 알고 있다. 그도 항상 같은 거리를 맴돌며 웃고 다닌다. 아무도 그의 이름과 나이, 그가 헤매고 다니는 이유를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게 그 곳을 지키는 '장군'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는 이처럼 우리가 가까이서 만나볼 수 있는 누군가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그녀는 어떤 거리를 울고 다니며 잉크의 흔적을 남기고 있겠지.

 


그 여자는 책에서 밖으로 나갔다. 이제 그녀를 위한 페이지는 없다. 잉크는 지워져 투명해진다. 그러나 그 여자, 프라하의 거리에서, 이 세상의 모든 길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가 여기 있다.

그 여자가 여기 있다. (p. 149)

 

프라하 거리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의 그 크고 비물질적인 몸 속에서 나직하게 소리내며 흐르는 것은 비탄에 잠긴 사람들의 그 눈물인 것이다.

그 울고 다니는 여자는 두 가지 세계 사이에서, 가시적인 세계와 비가시적인 세계, 현재의 세계와 과거의 세계, 살과 숨의 세계와 먼지와 침묵의 세계 사이에서 끝없이 다리를 쩔뚝거리고 있다. 그 여자는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 사이를 오간다. 사라진 자들과 살아 있는 자들의 것이 한데 섞인 눈물의 남모르는 밀사가 되어. (p. 43)

 

희생자들의 고통이 정말 얼마나 사람을 아프게 하는가를 알려면, 한 방울의 눈물이 엄청난 무게라는 것을 사람들이 잊지 않으려면, 그 냄새를 맡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고 또 그것을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p. 50)

 

추상적인 시간이란 없었다. 시간은 항상 그 시간을 떠메고 가는 어떤 몸의 시간이고 산 자의 역사의 시간이다. 그래서 시간은 이 파열된 순간 푸른빛이 도는 그을음빛으로, 그곳에서 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의 침상에 병으로 부서진 몸으로 쓰러져 있는 어떤 사람의 시간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호흡도 뼈도 다 상처입은 어떤 사람. (p. 60~61)

 

그녀의 발소리는 텍스트들의 단어 속에 반향되고 그녀의 눈물은 행간에서 번뜩이다. (p98)

 

그 여자는 가시적인 것으로부터 빠져나가버렸다 ─ 그러나 어쩌면 그녀는 다만 모습을 바꾸었을 뿐 어쩌면 새로운 모습으로 계속하여 나타나지 않을까? (p. 136)

 

2007/12/19 by 뒷북소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