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
실비 제르맹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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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 언제부터인가 그 도시는 내게 로맨틱한 감상을 던져 주었다. 언젠가는 꼭 여행하고픈 곳, 한번쯤은 사랑에 빠지고픈 곳. 아마도 두 남녀가 프라하에서 만나 사랑에 빠졌던 드라마의 영향이 큰 듯하다. 드라마 속 여주인공이 프라하에서 행복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그녀는 그곳에서 새로운 사랑을 만났지만, 과거의 사랑을 잃기도 했다. 그녀는 프라하 거리를 헤매며 울고 다녔다.

사실 프라하는 그리 로맨틱한 도시가 아니다. 밀란 쿤데라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보여 주었듯이 프라하는 상처투성이의 과거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프라하의 봄'을 찾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민주와 자유를 외치며 죽어갔다. '프라하의 봄' 을 찾기 훨씬 전인 2차 대전 때는 나치에게 짓밟히기도 했다.

 

여기 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이름도 나이도 얼굴도 없지만 프라하의 구시가 골목을 위풍당당한 몸으로 걸어다닌다. 그녀는 엄청난 거인이다. 그녀의 왼쪽 다리는 오른쪽 다리보다 훨씬 짧아서 심하게 다리를 전다. 그녀는 대단히 무거운 듯 힘겹게 발을 들었다가 내려놓는다. 마치 땅에 닿으면 큰 상처를 입기나 할 것처럼 힘겨워한다.

마치 환영처럼 도시에 나타나서 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여자, 그녀는 울고 있다. 세상의 모든 바람들을 향해, 인간들의 탄식과 눈물의 모든 소리를 향해 가슴을 열고서 울고 다닌다.

 

이 낯선 여자, 그녀는 누구일까? (p. 18)

 

원제 'La Pleurante des rues de Prague'에서 'La Pleurante'는 그냥 '우는 여자'가 아니라 '상복차림의 눈물 흘리는 여인상'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그렇다. 그녀는 이 거리에서 누군가를 잃었고,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은 여인이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이 거리에서 상처를 받은 모든 사람들의 탄식과 눈물을 대신해 울고 있다. 나아가 세상 모든 사람들의 소리를 담아 울고 있다.

 


그녀가 책 속으로 들어왔다. 그 여자는 떠돌이가 빈집으로, 버려진 정원으로 들어서듯 책의 페이지 속으로 들어왔다. (p. 13)

 

잉크의 길들은 모든 사람이 다 같이 공유하는 길이다. 그 길은 지름길이다. 꼬불꼬불한 미로들로 된 지름길이지만 때로는 우리를 숲속의 빈 터들 중에서 가장 밝은 곳으로 가파르게 인도하기도 한다. 한순간 삶이 거기에 있고 우리는 세상 속에 있다. 우리는 세상의 속살에, 한복판에 있어서 마침내 세상의 의미와 충만한 아름다움에 닿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한순간, 삶이 바로 여기에 빛나고 있고 세계가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것은 오래 지속되지 않지만 흔적들을 남긴다. (p97~98)

 

텍스트 속으로 들어온 그녀의 등장은 과히 도발적이다. 그녀가 지나간 곳은 잉크의 흔적이 남는다. 그녀가 울고 다닐 수 있는 텍스트는 프라하의 거리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며, 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그녀는 어느 한명으로 단정지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될 수 있고,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되어버린 존재이다. 그래서 그녀는 이름도 나이도 얼굴도 없었던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공유한 존재였기 때문에 그렇게 거대했던 것이다.

 

나는 그녀처럼 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한 사람을 알고 있다. 그도 항상 같은 거리를 맴돌며 웃고 다닌다. 아무도 그의 이름과 나이, 그가 헤매고 다니는 이유를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게 그 곳을 지키는 '장군'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는 이처럼 우리가 가까이서 만나볼 수 있는 누군가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그녀는 어떤 거리를 울고 다니며 잉크의 흔적을 남기고 있겠지.

 


그 여자는 책에서 밖으로 나갔다. 이제 그녀를 위한 페이지는 없다. 잉크는 지워져 투명해진다. 그러나 그 여자, 프라하의 거리에서, 이 세상의 모든 길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가 여기 있다.

그 여자가 여기 있다. (p. 149)

 

프라하 거리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의 그 크고 비물질적인 몸 속에서 나직하게 소리내며 흐르는 것은 비탄에 잠긴 사람들의 그 눈물인 것이다.

그 울고 다니는 여자는 두 가지 세계 사이에서, 가시적인 세계와 비가시적인 세계, 현재의 세계와 과거의 세계, 살과 숨의 세계와 먼지와 침묵의 세계 사이에서 끝없이 다리를 쩔뚝거리고 있다. 그 여자는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 사이를 오간다. 사라진 자들과 살아 있는 자들의 것이 한데 섞인 눈물의 남모르는 밀사가 되어. (p. 43)

 

희생자들의 고통이 정말 얼마나 사람을 아프게 하는가를 알려면, 한 방울의 눈물이 엄청난 무게라는 것을 사람들이 잊지 않으려면, 그 냄새를 맡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고 또 그것을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p. 50)

 

추상적인 시간이란 없었다. 시간은 항상 그 시간을 떠메고 가는 어떤 몸의 시간이고 산 자의 역사의 시간이다. 그래서 시간은 이 파열된 순간 푸른빛이 도는 그을음빛으로, 그곳에서 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의 침상에 병으로 부서진 몸으로 쓰러져 있는 어떤 사람의 시간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호흡도 뼈도 다 상처입은 어떤 사람. (p. 60~61)

 

그녀의 발소리는 텍스트들의 단어 속에 반향되고 그녀의 눈물은 행간에서 번뜩이다. (p98)

 

그 여자는 가시적인 것으로부터 빠져나가버렸다 ─ 그러나 어쩌면 그녀는 다만 모습을 바꾸었을 뿐 어쩌면 새로운 모습으로 계속하여 나타나지 않을까? (p. 136)

 

2007/12/19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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