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의 강 - 이미지의 시대를 연 사진가 머이브리지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창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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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맨스플레인'이라는 용어를 탄생시켰던 리베카 솔닛의 대표작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때까지 내가 쓴 예닐곱권의 책들이 다룬 주제는 상당히 다채로웠지만, 나는 2003년 그해 여름에 나온 최신작에 관해서만 이야기했다. 『그림자의 강 : 에드워드 마이브리지와 기술의 서부시대』라는 책으로, 시공간의 소멸과 일상의 산업화를 다룬 내용이었다.

내가 마이브리지를 언급하자마자 그가 내 말을 잘랐다.

"올해 마이브리지에 관해서 아주 중요한 책이 나왔다는 거 압니까?"

나는 내게 할당된 배역, 순진한 아가씨라는 배역에 워낙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공교롭게도 같은 주제에 관한 다른 책이 동시에 출간되었는데 어째서인지 내가 그걸 놓쳤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기꺼이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었다. 그는 벌써 그 아주 중요한 책에 대해서 떠들기 시작했다. 장광설을 펼치는 남자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거만한 표정으로, 자기 자신의 권위라는 저 멀고 흐릿한 지평선에 지그시 시선을 고정한 얼굴로.

(…) 그 아주 중요한 남자분은 내가 처음부터 그 정체를 알아차렸어야 마땅한 책에 대해서 거만하게 떠들었고, 보다 못한 쌜리가 끼어들어 "그게 바로 이 친구 책입니다"라고 말했다. 아니, 끼어들려고 시도는 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말을 계속할 뿐이었다. 쌜리가 "그게 바로 이 친구 책이라고요"를 세번인가 네번쯤 말한 뒤에야 그는 말귀를 알아들었고, 그 즉시 꼭 19세기 소설에 나오는 사람처럼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12~14쪽

"그 아주 중요한 남자분"이 장광설을 늘어놓았던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출간 순서가 바뀌어서 이제야 번역되어 나왔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읽은 독자라면, "마이브리지에 관해서" 얼마나 "중요한 책"인지 아마도 궁금했을 것이다.

이미지의 시대를 연 사진가 머이브리지는 누구인가?

1872년 봄, 머이브리지는 말 한마리의 사진을 찍었고, 이 사진들은 세상을 바꾸게 될 새로운 예술로 이어지는 가교 역할을 하게 된다. 아마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는 못해도, 그가 찍은 이 유명한 사진은 한번쯤 보았을 것이다. 머이브리지가 찍었던 말 옥시덴트는 미국에서 가장 빠르기로 손꼽히는 마차경주마로, 옥시덴트의 마주는 릴런드 스탠퍼드였다. 스탠퍼드는 북미 대륙횡단철도를 기획한 사람 중 한명으로, 그는 철도 사업을 통해 억만장자가 되었다. 스탠퍼드는 "말이 달릴 때 네발이 모두 땅에서 떨어지는 순간이 있는지에 대한 논쟁을 머이브리지의 사진이 해결해주리라 기대"(13쪽)하며 머이브리지의 작업을 후원했다. 지금이야 카메라 셔터 한 번만 누르면 사물이 움직이는 순간을 포착해 빠르게 찍을 수 있지만, 당시만해도 대부분 정적인 사진만 찍을 때라 사진 기술이 턱없이 부족했다. 머이브리지는 여러 시도 끝에 말이 달리는 순간을 사진으로 찍어냈고, 그 사진들 속에는 말의 네발이 모두 공중에 떠있는 순간도 있었다. 이후 머이브리지는 움직이는 말 뿐아니라 달리는 사람 등을 찍으며 동작연구에 몰두하게 되고 그의 작업들을 기초로 영화 산업이 싹트게 된다.


머이브리지의 사진과 스탠퍼드의 철도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열차를 타거나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세상을 더욱 가까이 가져다주었다는 점이다."(27쪽) 이전의 속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폭발적인 속도를 세상을 둘러볼 수 있었고, 그렇게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의 속도감을 직접 가보거나 체험하지 않더라도 사진만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오히려 사람들은 실재보다 어떤 공간 안에서 연출되고 재현된 속도에 더 열광하기도 했다.

훗날 스탠퍼드는 어릴 때 죽은 아들을 생각하며 스탠퍼드 대학을 설립하기도 하는데, 머이브리지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가 사진을 찍느라 함께할 수 없었던 아내가 불륜을 저질렀고, 머이브리지는 그 불륜 상대를 죽여 살인자가 되기도 한다. 그의 작업과 관련해서, 머이브리지는 언제나 독창적으로 방법을 찾아냈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의 작업 방식들을 빌려가 머이브리지보다 더 성공하기도 한다.

머이브리지에 대한 존경심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에게는 분명한 결점이 있었다. 그는 독점기업과 날강도 같았던 당시 기업가들을 위해 작업했으며 권력에 순종했다─이는 당시 서부의 다른 풍경사진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이 구할 수 있는 후원자는 돈을 펑펑 쓰는 정부, 그와 동시에 지역을 식민지화하고 정복하는 정부뿐이었다. (232쪽)

예술적인 장점을 평가할 때 작품과 예술가 본인의 사적인 삶을 함께 고려해야 하는지는 우리 시대의 질문이다. 중요한 것은 개인사의 파편이 아니라 작품 안에 담긴 윤리─물론 이 둘은 절대 무관한 것이 아니지만─이다. 예술에는 항상 예술가의 흔적이 남게 마련이다. 머이브리지의 사적인 삶을 대변하는 소외는 그의 사진에서도 분명하게 보인다. 사진에서 보이는 독립성은 이단아였던 그의 삶의 특징이기도 하다. 하지만 머이브리지의 사진에서 볼 수 있는 거장다운 명징함은, 재판정에서 드러난 감정에 휩싸인 인물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역사의 '위인' 이야기들이 근래에 많은 공격을 받고 있다. 하지만 머이브리지를 살펴봐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은, 그가 없었다면 영화 매체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있었기 때문에 영화의 근원에 관한 무언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재능은 다른 데에서도 생겨날 수 있었겠지만, 그러한 재능을 가진 특정 인물의 흔적은 그렇지 않다. 머이브리지에 대한 반응은 복합적이지만, 덕분에 그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흘러 다니는 이미지'의 시대를 낳은 완벽한 선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놀라움의 시대, 진부함의 시대, 타락의 시대, 화려한 볼거리와 사악함의 시대, 되돌릴 수 없는 상실과 극적인 성취의 시대 말이다. 1877년, 머이브리지가 플로라도를 개신교 고아 시설에 맡긴 다음 해에 그는 진정 시대의 부모 역할을 맡게 되었다. (233~234쪽)

사실 이 책에서 중요한 것은 머이브리지가 아니다. 머이브리지와 스탠퍼드로 대표되는 19세기 후반의 미국, 특히 서부의 눈부신 발전과 새로운 문화 산업을 잉태하게 했던 당시의 분위기. 우리가 이 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들의 삶을 따라가다보면 당시의 미국이 어떻게 변화되고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선조' 혹은 '시초'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스탠퍼드는 시대의 흐름을 잘 탔고, 머이브리지는 그러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스탠퍼드는 타고난 사업가이고, 머이브리지는 예술가니까.

『그림자의 강』이 나오기 전부터 서부, 특히 캘리포니아는 리베카 솔닛의 주된 관심사였다. (…) 그런 작가에게 머이브리지라는 인물, 서부가 '형성'되던 시기를 말 그대로 관통했을 뿐 아니라 그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던 인물이 눈에 띄었을 것은 자명하다. 머이브리지를 깊이 들여다보자 스탠퍼드가 등장했고, 스탠퍼드는 서던퍼시픽 철도나 그의 이름을 딴 대학과 동의어였다. 그런 다음에는 미국 대륙 횡단열차 건설으 ㅣ이면에서 잊혔던 아메리카원주민과 중국인들의 존재가 드러났고, 스탠퍼드 대학의 설립 이념이 어덯게 현재의 실리콘밸리를 낳게 되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이 이 책이 담겨 있다.

사진의 역사에 대한 책은 많다. 캘리포니아를 소개하는 책은 더 많고, 철도의 발전을 이야기하는 책도 이미 다수 나와 있다. 하지만 그 세 가지가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고, 서로를 어떻게 가능하게 했는지 전하는 책으로는 솔닛의 『그림자의 강』이 유일해 보인다. 그 결과 철도와 사진과 캘리포니아는 각각 독립된 영역이 아니라, 서로 엉키며 19세기 캘리포니아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조건'이 되었음을 알게 된다. 솔닛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 삶의 조건들에 머이브리지가 어떻게 대응했는지, 그의 아내 플로라가 어떻게 대응했고 아메리카원주민들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보여주고 그들에게 감정이입함으로써, 기술의 발전과 세계관의 변화라는, 자칫 공허한 담론이 되어버릴 수 있는 주제를 삶의 단계로 내려온 '이야기'로 전하고 있는 것이다. 「옮긴이의 말」, 398~399쪽

나에게도 중요한 것은 머이브리지가 아니었다. 나는 이 책을 단순히 '리베카 솔닛'이라는 저자의 명성 때문에 선택했고, 역자가 "역사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솔닛의 '연구자로서의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나는 역작"(398쪽)이라고 평을 했지만 큰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어쩌면 모임에서 만났던 "그 아주 중요한 남자분"과 같은 실수를 내가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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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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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라는 소설의 제목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연작시 「천국과 지옥의 결혼(The Marriage of Heaven and hell)」(1790~1793) 중에서 「지옥의 격언」(1793)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한 언론 인터뷰에서 토카르추크는 이 제목을 놓고, 편집자와 논쟁을 벌인 일화를 밝힌 적이 있다. 길고, 발음하기 힘든 데다 기괴한 제목이라 판매에 지장을 초래할 게 뻔하다며 출판사 측에서 완강히 반대한 것이다. 하지만 끝까지 제목을 고수한 이유에 대해 토카르추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너무 아름다운 시구(詩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한 줄의 문장이 바로 작품의 모토(motto)이자 메시지이고, 상징이자 메타포이기 때문이다. 「옮긴이의 말」 379~380쪽

편집자의 우려와는 달리, 오히려 이 기괴한 제목이 나를 끌어 당겼다. 도대체 어떤 내용의 소설이면 이렇게 고딕한 제목을 붙일 수 있는지 궁금했다.

두셰이코는 체코의 통신 주파수가 더 잘 잡히는 폴란드의 어느 산간 마을에서, 혹독한 겨울을 피해 마을을 떠난 사람들을 대신해 집을 관리해주는 일을 하고 있다. 오직 이웃인 '괴짜'와 다른 집들보다 조금 높은 곳의 오두막에 사는 '왕발'과 두셰이코만이 겨울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곳에서 지냈다. 그런데 한밤중에 '괴짜'가 찾아와서 '왕발'이 죽었다고 한다. 체코의 통신 주파수가 잡히는 바람에 경찰에 빨리 신고할 수 없었던 그들은, 처참하게 죽은 '왕발'의 몸을 정돈하면서 '왕발'이 자신이 사냥한 사슴의 고기를 먹다가 뼈가 목에 걸려 죽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이 이 오두막에 도착했을 때도 여기저기 사슴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그런데 늦게 도착한 경찰은 눈 때문에 사라진 사슴의 발자국을 보지 못했다.)

"그자는 자기가 밀렵해서 잡아먹은 사슴의 뼈에 질식당한 거예요. 무덤 너머의 복수인 거죠." 63쪽 두셰이코는 '괴짜'의 아들이자 '검정 코트'를 입은 지방 검사에게 자신이 본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검정 코트'는 그녀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를 이상한 소리나 늘어놓는 노인으로 여길 뿐이다. 그녀가 '동물의 복수'를 주장하면서 점성학까지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점성학이라니. 심지어 그녀는 점성학을 통해 자신이 죽는 날짜까지 알고 있다고 한다.) 그녀는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를 읊조리며 불길한 미래를 예감한다.

"나이 든 여성분들은 왜 그렇게 동물에 대해 신경을 쓰는지 말이죠. 혹시 자식들이 이미 다 장성했기 때문에 보살피고 돌볼 대상이 없기 때문은 아닌가요? 본능적으로 자꾸만 대체할 대상을 찾는 거죠." 159쪽

겨울을 피해 떠났던 사람들이 마을로 돌아온 이후에도 죽음은 계속되었다. 사냥꾼이 죽었고, 그들의 사냥을 합법적으로 눈감아 준 경찰서장이 죽었다. 그들의 죽음 근처에서는 늘 동물의 흔적이 발견되었고, 그녀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동물이 인간에게 복수를 하는 거야. 이건 그렇게 괴상한 이야기가 아니야. 동물들은 강하고 지혜로워."(113쪽)

평소 그녀는 사람들이 동물 사냥을 하는 것에 대해 행정기관에 민원을 넣거나 그런 행위들을 고발하곤 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고, 오히려 합법적으로 동물 사냥을 한다며 그녀를 미친 늙은이 취급했다. 게다가 그즈음 그녀가 딸처럼 키우던 개 두 마리가 사라졌다. 그녀는 사냥꾼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거라고 생각했다.

소설은 살인 사건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면서 긴장감 있게 전개된다. 마치 범죄 스릴러처럼. 하지만 이 소설의 핵심은 범인을 추적하는 것이 아니라 따로 있다. 바로 작가가 주구장창 강조하고 있는 그녀의 신념과 가치관에 대한 것이다. 작가는 동물 학대, 사냥, 동물을 먹는 것 등에 한결같이 목소리를 내왔고, 두셰이코는 작가의 신념과 가치관을 그대로 반영하는 인물이다.

두셰이코는 자신이 사냥한 사슴을 먹다가 죽은 '왕발'을 보면서 생각했다. '왕발'의 집 밖에서 마주친 사슴들이 그녀가 "사슴의 이름으로 계속해서 심판해 주기를 원했다"(348쪽)고. 그들에게는 다른 발언권이 없으므로, 고기를 먹지 않는 자신이 그들로부터 선택 받았으며 그들의 복수를 계속 이어나가야 한다고 말이다. 그녀는 그렇게 믿었다. "내가 당신들에게 이 모든 게 동물의 복수라고 계속 주장했던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게 바로 진실이었다. 난 그들의 도구였다." (357쪽) 그렇게 두셰이코의 살인은 시작되었다.

동물들이 아니라 동물들의 계시를 받은 두셰이코가 직접 살인을 했다는 사실, 게다가 죄를 받는 대신 유일한 친구 '왕발'과 '기쁜 소식'의 도움으로 두셰이코가 무사히 체코에 도착하는 결말은 동물을 먹는 것조차 꺼려하는 작가의 행보와 다소 상충하는 장면이라 불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소설 곳곳에서 드러나는 그녀의 사실적인 묘사와 문체들은, 스웨덴 한림원이 왜 201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그녀를 선택했는지 보여준다.

왕발의 죽음이 어쩌면 좋은 일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를 혼란스러운 삶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었으니까. 그리고 다른 생명체들을 그의 해코지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으니까. 그렇다, 갑자기 나는 죽음이 살균제나 진공청소기와 마찬가지로 정의롭고 유익한 것임을 깨달았다. 고백하건대 그때 나는 그런 생각을 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18쪽

"동물을 보면 그 나라가 어떤지 알 수 있어요. 그러니까 동물을 대하는 태도 말입니다. 사람들이 동물에게 잔인하게 군다면 민주주의나 그 어떤 시스템도 소용이 없습니다." 148쪽

"사실 인간은 동물이 그들의 고유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할 책무를 갖고 있습니다. 가축들은 그들이 우리에게서 받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주기 때문에 그들에게 애정을 돌려주는 건 인간의 의무입니다. (…) 인간이 동물을 지옥으로 내모는 순간, 온 세상이 지옥으로 변합니다. 왜 다들 그 사실을 모르는 걸까요? 어째서 인간의 이성은 사소하고 이기적인 쾌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요?" 156쪽

세상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절실히 깨닫는다. 인간의 편안함이나 쾌락을 위해서 창조된 건 더더욱 아니다. 168쪽

나는 모든 억울한 죽음은 만천하에 공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곤충의 죽음일지라도 말이다. 222쪽

"모든 면에서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었어요. 더 다정하고 현명하고 쾌활했죠 ……. 사람들은 동물들에게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생명체가 아닌 물건인 양 취급하죠." 282쪽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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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률 - 라이브 앨범 KIMDONGRYUL LIVE 2019 오래된 노래 [2CD]
김동률 노래 / Kakao Entertainment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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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오픈되자마자 예약주문 해놓고 배송 올 때까지 기다리느라 눈 빠지는 줄 알았다.

예판 기간 중에도 인기가 너무 많아서 품절 됐었는데,

다행히 일찍 주문한 덕분에 출시되자마자 바로 받았다.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콘서트도 없을텐데, 라이브 앨범이 있어서 정말 다행인듯.

들을수록 작년 콘서트 때의 감동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LP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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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게 뭐라고
장강명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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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에 올라온 『책, 이게 뭐라고』 리뷰를 보고 인터넷서점에서 미리보기 서비스를 통해 앞부분을 살짝 읽어보았다. 개인사와 자기 감정에 충실한 에세이를 싫어하는데다가, 평소 책 읽어주는 팟캐스트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전에 그의 소설을 읽어본 적이 있어서 소설가라는 믿음은 있었지만 에세이의 문체는 다를 수 있으니 직접 확인하고 선택하고 싶어서였다. 감정 과잉이 없는 시니컬한 문장을 보고 (다른 책들과 함께 구매하려고) 바로 장바구니에 담아뒀는데, 사지 않고도 읽을 기회가 생겼다. 직접 구매해서 읽을 생각이 없었던 책이라면 증정도서나 협찬도 받지 않는다. 책값을 아껴보겠다고 그럴 가치도 없는 책에 내 시간을 낭비하는 꼴이니까. (읽고 싶은 책을 읽기에도 시간이 부족하고, 맘에 안드는 책의 리뷰를 쓰는 것만큼 고역인 것도 없으니) 한마디로, 사려고 맘 먹었는데 운 좋게 도서 협찬을 받았다는 이야기다.

나는 TV나 유튜브, 라디오, 팟캐스트의 독서 프로그램 애청자도 아니다. 책 소개 프로그램을 보거나 듣느니 그냥 책을 읽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어느 책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 역시 글로 접하면 된다고 여긴다. 그래도 그런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하다. 신간을 낼 때마다. 책 홍보하러. 77쪽

장강명 작가는 요조와 함께 독서 팟캐스트 <책, 이게 뭐라고?!>의 진행을 맡은 적이 있었다. 북이십일 출판사와 팟빵의 지원을 받아 운영하던 팟캐스트였는데, (그런 이유에서 나는 듣지 않았다.) 이 책은 '읽고 쓰는 인간' 장강명이 팟캐스트를 진행하면서 만났던 사람들과 세계, 생각에 대한 글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독서 팟캐스트는 무엇일까? 긴 글 읽기를 버거워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 요약 서비스인가? 그런 팟캐스트도 있다. 특히 고전을 쉽게 설명하는 채널이 인기가 높다. 아니면 독서 팟캐스트는 교양 있는 사람들의 점잖은 토크쇼일까, 책은 그저 거들 뿐인? 그렇다면 진행자의 대화 솜씨와 매력 있는 초대 손님을 섭외하는 일이 중요할 터다. 그것도 아니면 신간을 알려서 구매로 이어지게 하는 홍보용 매체일까? 그게 분명한 목표이고 다른 사항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면 오히려 창의적인 시도들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199쪽

내가 만나서 어느 정도 친해지고 사정을 알게 된 다른 책 팟캐스트 중에서 운영비를 자체적으로 벌어서 해결한다는 곳은 한 곳도 없었다. 대형 서점이나 출판사의 예산으로 운영되는 곳도 있고, 대기업이나 독지가의 지원을 받는 곳도 있었다. 221쪽

앞서도 언급했지만, 나는 독서 팟캐스트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어서 듣지 않는다. 예전에 독서 모임을 할 때 이런 일들이 있었다. 책을 못 읽어서 팟캐스트와 유튜브를 대신 찾아서 들었다거나 거기서 나온 이야기들을 나열하는 것으로 자신의 생각이나 감상을 대신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그들은 팟캐스트와 유튜브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 책을 완독했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독서 팟캐스트나 유튜브를 통해 책에 흥미를 느끼고 직접 읽을 수 있어야 하는데, 단순히 듣는 것만으로 끝이라니. 장강명 작가 역시 팟캐스트를 진행한 적이 있었지만 이런 부분들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다.

"책과 독자 사이가 너무나 멀 때 그렇게 해서라도 책 쪽에서 한 걸음 독자 쪽으로 가야 하는 것인가, 그러다가 너무 많이 가면 이게 책이 책이 아닌 게 되는 것 같고. 그분들이 책 쪽으로 오지 않을 거라면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우리가 『이방인』이나 『인간 실격』에 대해 이야기해도 그건 책에 대한 콘텐츠이지 책 자체는 아닌데." 271쪽

그는 팟캐스트 뿐만아니라 출판시장 전반에 걸쳐 다양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 있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셀러브리티들, 표지만 바꿔서 리커버 에디션이니 초판본 에디션이니 하는 것들, 매년 곳곳에서 선정하느라 바쁜 올해의 책들과 유력 노벨문학상 수상자 관련 마케팅들, 두께는 얇은데 표지는 고급스러워지는 각종 경장편 시리즈들, 온갖 찬사로 무장하는 띠지들, 비판적인 독자들이 적다는 지적, '젊은 피'에 대한 평론가들의 찬사와 요구들. (최근에 우리는 한 젊은 작가를 통해 시행착오를 겪지 않았던가.)

이제는 한국이 출판업이 사실상 '셀럽 비즈니스'가 된 게 아닌가 싶다. 셀러브리티가 쓴 책이 잘 팔린다. 아니, 셀러브리티가 쓴 책만 잘 팔린다. 아예 처음부터 셀러브리티를 섭외해서 책을 만든다. 실제로 원고를 쓰는 거야 다른 사람이 얼마든지 해줄 수 있다. 셀러브리티이기만 하다면 반려견도 만화 캐릭터도 책을 낼 수 있다. 나는 한편으로는 그런 현실이 못마땅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알쓸신잡'에서 연락이 오기를 고대하는 마음이기도 했다. 34~35쪽

몇몇 기표를 뽑아내 신자유주의라든가 여성 혐오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 역시 게으르다고 본다. 거기에도 '읽어내겠다'는 의지는 희박하다. '젊은 피'에 대한 평론가들의 찬사와 요구는 강박에 가까워 보인다. 나는 신선한 피라면 환장하는 드라큘라가 아니기에, 그 지점에서 자세한 해설을 원한다. 새로운 얼굴은 새로운 얼굴일 따름이며,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늘 나타난다. 나는 읽고 쓰는 사람들 간의, 글자를 통한 대화를 원한다. 악평도 좋다. 181쪽

사실 많은 독자들이 생각하고 있던 부분들일텐데, 이런 이야기들을 이해관계자(=장강명 작가)의 글을 통해 듣게 되니 반가웠다. 물론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이해관계자라면 쉽게 드러낼 수 없는 부분을 진솔하게 쓰고 있다는 점, 이게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읽고 쓰는 것으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ㅡ『책, 이게 뭐라고』 뒷표지 ㅡ

'읽고 쓰는 인간'인 그는 읽고 쓰는 것에 대해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읽고 쓰는 일만으로 우리는 점점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153쪽) 신형철 평론가의 책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중에 나오는 문장인데, 팟캐스트 <책, 이게 뭐라고?!>에서도 다룬 적이 있다고 한다. 이 질문에 신형철 평론가는 김연수 작가의 주장을 소개하고 있는데, 김연수 작가는 어느 정도 긍정하고 있다. 반면, 장강명 작가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나는 오히려 '읽고 쓰면 더 좋은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실제로는 편리한 면죄부로 쓰이는 것 아닐까 의심한다. 힘들게 행동하지 않으면서, 읽고 쓴다는 쉽고 재미있는 일만으로 자신이 좋은 인간이 되고 있다고 믿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그런 허약한 가설에 기대 은근한 우월감을 즐기는 듯 비칠 때에는 좀 딱해 보인다. 156쪽

그는 에필로그에서 소크라테스(요즘 세간에서 자주 등장하는)와의 대화 형식을 빌려 이런 우려를 나타내기도 한다.

"나의 친구여, 그대는 1년에 책을 150권 가량 읽는다고 했지. 그렇다면 묻겠는데, 그중에 처음부터 끝까지 내용을 암기하는 책이 한 권이라도 있는가?"

"아니오. 없는데요."

"혹시 내용의 절반을 외우는 책은 있나? 반의 반은? 아니, 단 한 장이라도 정확히 암송할 수 있는 책은 몇 권이나 되는가? 읽은 뒤에 대략적인 개요만 떠올릴 수 있다면 애초에 그 책을 정독할 필요는 무엇이었나?"

이렇게 소크라테스는 나를 또 한참 가지고 논다.

"나의친구여,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언어가 그대의 앎에 봉사하지 않고 제멋대로 힘을 부려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것일세. 자네가 읽고 쓰는 세계라고 말하는 바로 그 세상 말이야. 그곳의 주인은 인간이 아닌 바로 언어 그 자체라네. 친애하는 동료들이 공자, 석가모니, 예수와 내가 글을 쓰지 않고 제자들을 말로만 가르친 이유가 궁금하지 않나? 우리는 글을 남기면 그것이 죽은 경전, 헛된 신학이 되어 펄펄 살아 움직여야 할 깨달음의 순간들을 방해할 것임을 알았다네." 307~308쪽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나는 읽고 쓰는 것이 사람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줄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읽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이고, 그 행위는 어쩌다가 듣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시간을 내어 이뤄지는 행위니까. 타인의 목소리를 들을 생각이 있다는 건, 귀를 닫고 아예 듣지 않으려는 사람보다는 적어도, 조금은 나은게 아닐까. 물론 작가의 우려처럼, 듣는 척만 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일부 사람들의 일이라고 믿고 싶다.

내게 독서는 호흡니다. 나는 이미 읽고 쓰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경고한 그 세계다. 3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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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앙마 2020-10-07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개인적으론 내 스탈이 아니었던가벼.. 장강명 작가의 소설을 만나봐야 할듯...
 
공부란 무엇인가
김영민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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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란 대학에 가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에서 하는 것이며,

대학에 가서는 무엇을 어떻게 배우면 좋은지에 대한 논의들이었다.

김영민, 『공부란 무엇인가』 248쪽

표지 속 공간은 어디에 있는 곳일까? 실제로 존재하는 곳일까? 예전에 비슷하게 꾸며놓은 곳을 본 적이 있는데, 섬뷰(island view)는 아니었다. 현재 김영민 교수의 공간은 아닐 것이다. 어떻게 저런 뷰를 가진 곳에서 글을 쓸 수 있겠는가. 아무튼 한참을 들여다보게 만든 표지다.

'추석이란 무엇인가'라는 칼럼으로 SNS에 이름을 알린 김영민 교수가 이번에는 『공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일부 독자들이 저자의 <추석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는 편집자의 기대"로 제목이 붙여진 "이 책에 담긴 글들은 다 공부의 각 측면에 대한 것이며, 그 글들을 통해서 공부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보기를 권하고 있다."(67쪽) 특히, 공부를 잘해서 가는 '대학'이 아닌 공부를 하기 위해 가는 '대학', 그런 '대학'에서 어떻게 잘 배울 것인가, 그런 측면에서의 공부에 대해 세세하게 다루고 있다.

애초 이 책을 읽는 와중에 작가의 어떤 문체에 꽂혀서 내 나름으로 신랄하게 리뷰를 써서 임시 저장해 두었었다. 그런데 「멍청한 주장에 대해 멍청한 비판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제목의 글을 읽고나니 도저히 리뷰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글의 내용은 이렇다.

상대 주장의 약점보다는 강점과 마주하여 비판적인 논의를 해야 한다. 상대의 핵심 주장에 강점이 있음에도 상대가 보인 약점에 탐닉한 나머지 그것을 상대의 '본질'이라고 간주해서는 안 된다. 하수들일수록 상대의 하찮은 약점에 탐닉한다. 형사무레서 시체가 등장하면, 그 시체를 둘러싼 드라마에 집중해야지, 시체 역을 하는 배우가 얼마나 꼼짝 않고 있는지만 집요하게 살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아무런 강점도 없는 경우는 어떡하냐고? 완벽하게 못생긴 사람이 없듯이, 완벽하게 오류로만 점철된 주장은 드물다. 기를 쓰고 상대 주장의 강점을 찾아내서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러지 안으면, 단점을 찾아내 즐기는 페티시(fetish)가 있다고 오해받을 수 있다. 상대의 주장에서 강점을 영 찾을 수 없으면, 이토록 형편없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용기 자체를 칭찬하면 된다. 211쪽

그랬었다. 어떤 한 부분이 마음에 거슬리자, 작가가 전달하고자하는 전체적인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부분을 토해 내지 않고서는 이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책읽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리뷰를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부분이 마음에 거슬러서 전체를 볼 수 없었던 게 아니라 내가 전체를 보지 못해서 그 부분이 자꾸 신경 쓰였던 게 아니었을까?

김영민 교수는 책을 읽고 그 책에 관하여 쓰는 서평이 기본적인 기능을 하려면 가장 먼저 적절한 요약이 필요하다고 한다.

하나의 전체로서 책에 대해 말하기

김영민, 『공부란 무엇인가』 147~149쪽

책을 소개하는 글이라면, 하나의 전체로서 그 책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요약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책 부분마다 흥미로운 포인트는 많다. 그러나 하나의 전체로서 그 책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서평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책이 그러한 답을 가능케 하는 통일성을 결여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 책을 굳이 소개할 필요가 있느냐는 회의가 들기는 하지만, 그때는 왜 그 책이 그런 상태에 이르고 말았는지를 보여주는 것도 좋은 내용 소개가 될 수 있다. 147~148쪽

깊이 있는 서평은 내용 소개에만 그치지 않는다. 본격적인 비평이 담긴다. 서평 대상이 된 책이 제공하는 정보 중에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수도 있고, 그 책이 담고 있는 주장들의 논리적 결함을 지적할 수도 있고, 그 책의 논의가 암묵적으로 기대고 있는 전제들을 문제 삼을 수도 있다. 물론 설득력 없는 비판을 늘어놓으면 서평자 자신의 얼굴에 검은 먹을 바를 뿐이다. 주례사 같은 서평도 문제지만, 근거 없는 비판으로만 일관한 서평도 문제다. 단순히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창의적인 질문을 던져서 그 책의 새로운 면모를 증명할 수도 있다. 148~149쪽

최악의 서평 중 하나는 서평을 단순히 자기 이야기의 발판으로 삼는 경우다. 물론 서평도 결국 자기 이야기를 담긴 담지만, 대상이 된 책을 섬세하고 충실하게 경유해야 한다는 장르의 규칙이 있다. 대상이 된 책 내용을 후다닥 요약한 뒤, 자기 이야기만 주절주절 늘어놓으려거든 다른 글의 형식을 취하는 게 좋다. 149쪽

한 권의 책을 요약하기란 쉽지 않다. 그나마 줄거리가 있는 문학들은 요약하기가 쉬운 편인데, 이 책처럼 칼럼 형식의 글들이 나열되어 있으면 전체를 아울러 요약하기란 보통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꼬투리를 잡고 늘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 책은 (이 글 도입부에 이미 적어둔) 저자가 한 문장으로 요약해 놓은 것이 있으므로, 그것으로 대신하면 될듯하다.

마지막으로, 읽는 도중에 서평을 쓰게 만든 문체에 대해서 아주 살짝 이야기 해보겠다. (원래는 이 포스팅을 가득 채울만큼 방대했다.)

내 나름대로는 끊임없이 '지적 변화'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지적 자극을 받아볼 수 있을까 싶어서 이 책을 선택했다. 전작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전작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내 기대에는 미치지 못하는 '지적 자극'이었다. 특히, '꿀벅지' 같은 단어를 책 속에서 마주치는 순간 기대가 와르르 무너졌다. 어떤 느낌으로 그런 단어들을 사용하는지도 알겠고, 요즘 독자들이 좋아하는 문체라는 것도 알겠지만, 거슬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좋은 문체를 보여준답시고 과한 표현을 남발하지 않는 일이다. 냉정한 분석이 이루어져야 할 국면에서 정서적 오지랖이 질질 흐르는 표현을 처발라서는 안 된다. 주장의 논리와 명료함이 논술문의 주된 승부처라고 할 때, 그런 표현은 독자가 논지에 집중하는 것을 오히려 방해할 뿐이다. 이를테면, 인간의 소화기관을 설명하는 학자가 배고픔 혹은 허기에 대해 서술할 때는 '배고프다', '허기진다'와 같은 간명한 표현이면 족하다. 배고픔이라는 생리 현상을 서술하면서 '인간이 평생 가장 자주 느끼는 결핍감, 그것은 바로 허기'와 같이 멋을 잔뜩 부린 표현을 구사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그저 건조하게 문법에 맞게만 쓰는 게 능사일까. 사실, 화려하지는 않아도 비문과 오타 없이 문법에 맞게만 글을 써주어도 감지덕지할 일이다. 그것만 갖추어져도 글을 읽다가 인생에 대한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있다. 202~2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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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0-09-14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해요, 조금더 고상한 아재개그라서 좋아했는 데, 이번 책은 그냥 아재...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