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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의 강 - 이미지의 시대를 연 사진가 머이브리지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창비 / 2020년 10월
평점 :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맨스플레인'이라는 용어를 탄생시켰던 리베카 솔닛의 대표작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때까지 내가 쓴 예닐곱권의 책들이 다룬 주제는 상당히 다채로웠지만, 나는 2003년 그해 여름에 나온 최신작에 관해서만 이야기했다. 『그림자의 강 : 에드워드 마이브리지와 기술의 서부시대』라는 책으로, 시공간의 소멸과 일상의 산업화를 다룬 내용이었다.
내가 마이브리지를 언급하자마자 그가 내 말을 잘랐다.
"올해 마이브리지에 관해서 아주 중요한 책이 나왔다는 거 압니까?"
나는 내게 할당된 배역, 순진한 아가씨라는 배역에 워낙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공교롭게도 같은 주제에 관한 다른 책이 동시에 출간되었는데 어째서인지 내가 그걸 놓쳤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기꺼이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었다. 그는 벌써 그 아주 중요한 책에 대해서 떠들기 시작했다. 장광설을 펼치는 남자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거만한 표정으로, 자기 자신의 권위라는 저 멀고 흐릿한 지평선에 지그시 시선을 고정한 얼굴로.
(…) 그 아주 중요한 남자분은 내가 처음부터 그 정체를 알아차렸어야 마땅한 책에 대해서 거만하게 떠들었고, 보다 못한 쌜리가 끼어들어 "그게 바로 이 친구 책입니다"라고 말했다. 아니, 끼어들려고 시도는 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말을 계속할 뿐이었다. 쌜리가 "그게 바로 이 친구 책이라고요"를 세번인가 네번쯤 말한 뒤에야 그는 말귀를 알아들었고, 그 즉시 꼭 19세기 소설에 나오는 사람처럼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12~14쪽
"그 아주 중요한 남자분"이 장광설을 늘어놓았던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출간 순서가 바뀌어서 이제야 번역되어 나왔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읽은 독자라면, "마이브리지에 관해서" 얼마나 "중요한 책"인지 아마도 궁금했을 것이다.
이미지의 시대를 연 사진가 머이브리지는 누구인가?
1872년 봄, 머이브리지는 말 한마리의 사진을 찍었고, 이 사진들은 세상을 바꾸게 될 새로운 예술로 이어지는 가교 역할을 하게 된다. 아마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는 못해도, 그가 찍은 이 유명한 사진은 한번쯤 보았을 것이다. 머이브리지가 찍었던 말 옥시덴트는 미국에서 가장 빠르기로 손꼽히는 마차경주마로, 옥시덴트의 마주는 릴런드 스탠퍼드였다. 스탠퍼드는 북미 대륙횡단철도를 기획한 사람 중 한명으로, 그는 철도 사업을 통해 억만장자가 되었다. 스탠퍼드는 "말이 달릴 때 네발이 모두 땅에서 떨어지는 순간이 있는지에 대한 논쟁을 머이브리지의 사진이 해결해주리라 기대"(13쪽)하며 머이브리지의 작업을 후원했다. 지금이야 카메라 셔터 한 번만 누르면 사물이 움직이는 순간을 포착해 빠르게 찍을 수 있지만, 당시만해도 대부분 정적인 사진만 찍을 때라 사진 기술이 턱없이 부족했다. 머이브리지는 여러 시도 끝에 말이 달리는 순간을 사진으로 찍어냈고, 그 사진들 속에는 말의 네발이 모두 공중에 떠있는 순간도 있었다. 이후 머이브리지는 움직이는 말 뿐아니라 달리는 사람 등을 찍으며 동작연구에 몰두하게 되고 그의 작업들을 기초로 영화 산업이 싹트게 된다.
머이브리지의 사진과 스탠퍼드의 철도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열차를 타거나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세상을 더욱 가까이 가져다주었다는 점이다."(27쪽) 이전의 속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폭발적인 속도를 세상을 둘러볼 수 있었고, 그렇게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의 속도감을 직접 가보거나 체험하지 않더라도 사진만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오히려 사람들은 실재보다 어떤 공간 안에서 연출되고 재현된 속도에 더 열광하기도 했다.
훗날 스탠퍼드는 어릴 때 죽은 아들을 생각하며 스탠퍼드 대학을 설립하기도 하는데, 머이브리지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가 사진을 찍느라 함께할 수 없었던 아내가 불륜을 저질렀고, 머이브리지는 그 불륜 상대를 죽여 살인자가 되기도 한다. 그의 작업과 관련해서, 머이브리지는 언제나 독창적으로 방법을 찾아냈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의 작업 방식들을 빌려가 머이브리지보다 더 성공하기도 한다.
머이브리지에 대한 존경심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에게는 분명한 결점이 있었다. 그는 독점기업과 날강도 같았던 당시 기업가들을 위해 작업했으며 권력에 순종했다─이는 당시 서부의 다른 풍경사진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이 구할 수 있는 후원자는 돈을 펑펑 쓰는 정부, 그와 동시에 지역을 식민지화하고 정복하는 정부뿐이었다. (232쪽)
예술적인 장점을 평가할 때 작품과 예술가 본인의 사적인 삶을 함께 고려해야 하는지는 우리 시대의 질문이다. 중요한 것은 개인사의 파편이 아니라 작품 안에 담긴 윤리─물론 이 둘은 절대 무관한 것이 아니지만─이다. 예술에는 항상 예술가의 흔적이 남게 마련이다. 머이브리지의 사적인 삶을 대변하는 소외는 그의 사진에서도 분명하게 보인다. 사진에서 보이는 독립성은 이단아였던 그의 삶의 특징이기도 하다. 하지만 머이브리지의 사진에서 볼 수 있는 거장다운 명징함은, 재판정에서 드러난 감정에 휩싸인 인물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역사의 '위인' 이야기들이 근래에 많은 공격을 받고 있다. 하지만 머이브리지를 살펴봐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은, 그가 없었다면 영화 매체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있었기 때문에 영화의 근원에 관한 무언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재능은 다른 데에서도 생겨날 수 있었겠지만, 그러한 재능을 가진 특정 인물의 흔적은 그렇지 않다. 머이브리지에 대한 반응은 복합적이지만, 덕분에 그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흘러 다니는 이미지'의 시대를 낳은 완벽한 선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놀라움의 시대, 진부함의 시대, 타락의 시대, 화려한 볼거리와 사악함의 시대, 되돌릴 수 없는 상실과 극적인 성취의 시대 말이다. 1877년, 머이브리지가 플로라도를 개신교 고아 시설에 맡긴 다음 해에 그는 진정 시대의 부모 역할을 맡게 되었다. (233~234쪽)
사실 이 책에서 중요한 것은 머이브리지가 아니다. 머이브리지와 스탠퍼드로 대표되는 19세기 후반의 미국, 특히 서부의 눈부신 발전과 새로운 문화 산업을 잉태하게 했던 당시의 분위기. 우리가 이 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들의 삶을 따라가다보면 당시의 미국이 어떻게 변화되고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선조' 혹은 '시초'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스탠퍼드는 시대의 흐름을 잘 탔고, 머이브리지는 그러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스탠퍼드는 타고난 사업가이고, 머이브리지는 예술가니까.
『그림자의 강』이 나오기 전부터 서부, 특히 캘리포니아는 리베카 솔닛의 주된 관심사였다. (…) 그런 작가에게 머이브리지라는 인물, 서부가 '형성'되던 시기를 말 그대로 관통했을 뿐 아니라 그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던 인물이 눈에 띄었을 것은 자명하다. 머이브리지를 깊이 들여다보자 스탠퍼드가 등장했고, 스탠퍼드는 서던퍼시픽 철도나 그의 이름을 딴 대학과 동의어였다. 그런 다음에는 미국 대륙 횡단열차 건설으 ㅣ이면에서 잊혔던 아메리카원주민과 중국인들의 존재가 드러났고, 스탠퍼드 대학의 설립 이념이 어덯게 현재의 실리콘밸리를 낳게 되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이 이 책이 담겨 있다.
사진의 역사에 대한 책은 많다. 캘리포니아를 소개하는 책은 더 많고, 철도의 발전을 이야기하는 책도 이미 다수 나와 있다. 하지만 그 세 가지가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고, 서로를 어떻게 가능하게 했는지 전하는 책으로는 솔닛의 『그림자의 강』이 유일해 보인다. 그 결과 철도와 사진과 캘리포니아는 각각 독립된 영역이 아니라, 서로 엉키며 19세기 캘리포니아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조건'이 되었음을 알게 된다. 솔닛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 삶의 조건들에 머이브리지가 어떻게 대응했는지, 그의 아내 플로라가 어떻게 대응했고 아메리카원주민들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보여주고 그들에게 감정이입함으로써, 기술의 발전과 세계관의 변화라는, 자칫 공허한 담론이 되어버릴 수 있는 주제를 삶의 단계로 내려온 '이야기'로 전하고 있는 것이다. 「옮긴이의 말」, 398~399쪽
나에게도 중요한 것은 머이브리지가 아니었다. 나는 이 책을 단순히 '리베카 솔닛'이라는 저자의 명성 때문에 선택했고, 역자가 "역사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솔닛의 '연구자로서의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나는 역작"(398쪽)이라고 평을 했지만 큰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어쩌면 모임에서 만났던 "그 아주 중요한 남자분"과 같은 실수를 내가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